[사도행전 24:1-9 | 김남수 목사]
드디어 바울의 고소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에 도착하고 바울의 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1절에“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왔습니다. 바울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고 공격을 받았던 그는 이번에는 기어코 바울을 고소하여 정죄하겠다고 작정을 하고, 치밀한 준비를 하고 달려왔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을 미워하는 장로들과 함께 바울의 증언을 불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그의 변론을 묵살하기 위해 직업적인 변호사까지 대동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도 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고소인은 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그는 가이사랴까지 와서 로마 총독 앞에 섰습니다. 우선 이 행동 자체가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 사람을 만나거나,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방사람 총독부, 이 땅의 정치적 근거지가 되는 이 재판정, 그것도 고소하는 고소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 자체부터가 이미 제사장으로서는 신분의 중요한 위치를 떠난 일이라 하겠습니다. 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변호사와 함께 왔다고 합니다. 변호사도 재판이기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언어가 다양했기 때문에 재판하는 재판장이 사실을 알아보기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샛말로 통역이 필요했고, 사실을 사실대로 변호하는 사람, 곧 변호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변호사와 함께 왔고, 아나니아가 원고이지만 총독 앞에서 말하는 것은 더둘로라고 하는 변호사였습니다. 더둘로는 언변이 탁월한 재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충성했기 때문에 아나니아의 눈에는 그가 바울을 송사하는데 적격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본문 1-5절을 보면 긴 말인데, 아첨하는 말은 깁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아첨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3절에“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더둘로는 아나니아의 사주를 받아 벨릭스 총독에게 최고의 아첨의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더둘로는 지금 유대가 누리고 있는 장기간의 평화와 여러 가지 발전된 모습들은 모두가 다 벨릭스 총독의 선정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는 거짓된 아첨의 말로서 바울의 태평을 누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극에 달하여 민중의 항의하는 목소리는 높아만 갔습니다. 벨릭스는 폭도들이나 강도들을 진압한 것뿐입니다. 그러한 일도 무력으로 잔인하게 처리함으로써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더 큰 반감을 샀습니다. 그 당시가 태평성대가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짓말을 더둘로는 바울을 송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벨릭스는 노예출신으로 로마 총독에까지 올라 간 사람입니다. 그는 못된 일은 다 저질렀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한 짓을 다 했습니다. 제사장 요나단이 벨릭스의 폭정을 비난했다가 벨릭스가 보낸 암살단에게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제사장 아나니아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선배인 요나단을 죽였던 벨릭스 앞에 가서“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이렇듯 인사불성이 됩니다. 아나니아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아첨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엄청난 범죄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바울을 없애겠다는 일념뿐입니다.
5절의“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괴수)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이 말씀을 보면, 이제“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 병자라”하고 세 가지로 고소합니다. 먼저는, “소요케 하는 자”요, 둘째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괴수)”요, 셋째는, “성전을 더럽게 하므로”-이런 식입니다.
아나니아의 고소 내용을 좀 생각해 봅시다. 먼저, 소요케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시끄럽다고, 소요죄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을 지어서 전염병(염병)이라고 했습니다. 염병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말로“로이몬”은 영어로는“페스트”입니다. 이것은 전염병으로“흑사병”이라 합니다. 이 병은 빨리 없애야지, 그냥 놔뒀다가는, 온 시민인 유대인과 로마인이 다 죽습니다. 그래서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인 즉 소요를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이 사람 간다는 곳이면, 시끄럽다는 것이지요. 문제가 시끄러워진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도 복음을 전했어요. 이 사실로 소요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일어난 이유를 가만히 보면, 바울 때문이 아니라 바리새인 때문이었습니다. 극단주의적인 유대인들 때문에 난 것이지, 즉 유대인 자기네들 때문에 소요가 난 것이지, 바울 때문에 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네들이 문제를 일으켜 놓고, 그 책임을 바울에게 돌립니다.
소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지요.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그들은 못마땅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네를 따라 온 사람들이 이제는 바울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자기들에게 피해의식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소요라고 했습니다. 전염병(염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진리성이 아랑곳없습니다. 내게 오는 이익과 손해, 이것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는 묻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만 위주로 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진리냐 거짓이냐가 먼저가 아니니까, 이런 것은 전혀 아랑곳없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기 염병이라고 하는 말은 원래 역설적으로 한 말입니다. 밉게 보여서 염병이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사실은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다” 가루 속에 누룩이 주금만 들어가도 어느 사이에 쫙 퍼져나가니까요. 전체를 누룩으로 만들어 나가거든요. “복음은 그와 같다”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말하면“복음은 염병과 같다”입니다. 그렇잖아요? 저 사람들이 볼 때에는 나쁜 말이지마는 이건 아주 좋은 말입니다. 왜요? 복음은 반드시 변화시키니까요. 예수 믿고 달라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성격도 달라지고, 가치관도 달라지고, 건강도 달라지고, 인간관계도 달라집니다. 염병이니까요. 염병 균이 들어가면 열이 나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흑사병과 같다 이 말입니다. 병은 변화를 일으켜요.
또 하나는 반드시 전염, 전파되어요. 흑사병은 곧 퍼져 나갑니다.
여러분, 벙어리 교인은 있을 수 없어요. 은혜 받은 사람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내가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말 안할 수 있어요. 복음을 받고 체험한 사람은 말 안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못된 사람은 은혜를 원수로 갚아요. 전에 이웃에 사는 초등학교 학생이 학교 갔다 오는데, 아 이 녀석이 가방을 메고 오면서 종잇장 하나를 들고 흔들며 와요. 아는 아이이기에 가까이 가서“야, 너 학교 갔다 오니? 뭘 그렇게 흔들고 오니?”하고 물으면서 보니 성적표입니다. 자세히 보니 모두“수”입니다. 이 녀석이 이것을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할 데가 없어 놓으니 그러고 오는 것입니다. 네가“너 공부 잘했다”칭찬해 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어떻게나 좋아하는지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은혜를 어떻게 자랑 안할 수 있어요. 어떻게 말 안 할 수 있어요. 자꾸 전파하기 마련입니다. 자랑하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승리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깁니다. 시기도, 비판도, 고난도, 오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필경에는 복음이 승리합니다.
둘째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우두머리)라 합니다. 이단이란 헬라어로“하이레시스”라는 말의 뜻은 파벌, 당파입니다. 정통교리에 불합한 교리를 택한 파, 즉 이단을 뜻합니다(갈 5:20; 벧후 2:1). 그런고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우두머리)라, 괴수는 행렬의 오른편 줄의 선두에 선자를 가리킵니다. 즉, 이단의 지도자 첫째가는 자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에 그리스도인을“나사렛당”이라고 호칭한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갈릴리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있지마는 나사렛 당이라고 부른 일은 업었는데, 여기서 그렇게 부릅니다. 이 당성을 메시아니즘의 일부분으로 보려했습니다. 유대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는 메시야 운동이 많았습니다. 구약 예언의 맥락을 따라, 로마로부터 유대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는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무리가 있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하여 저들은 바울의 복음운동을 정치적 운동, 메시야 운동의 하나라고 몰아붙이려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사건인줄 알면서도, 굳이 이것을 정치적 사건으로 몰아붙여 고소함으로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핍박을 할 때에는 꼭 그렇습니다. 단순한 신앙적 이유로만 핍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꼭 정치적이라는 구실을 붙여서 처벌하고 핍박했던 것이 기독교 핍박사의 맥락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전을 더럽혔다고 합니다. 6절에“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바울이 성전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어서 성전에 넘어갈 수 없는 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담을 넘으면 유대인들은 성전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방 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덮어놓고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죄목을 만들어 고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저들은 40 여명이 작당하여 바울을 암살하려던 것을 숨겼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허위고소를 끝까지 버틸 작정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부에게 한 마리 개가 있었는데, 하루는 변호사네 개가 이 농부의 개를 물어 죽였어요. 이 농부의 마음이 참 아파요. 그래서 변호사한테 가서 말했습니다. “변호사님, 미안하지만, 우리 집 개가 변호사님 개를 물어 죽였습니다.” 변호사는 노발대발합니다. “이 몹쓸 개가 있나! 그럼 그 개 값을 물어 줘야지, 30만원을 내 놓으세요.” 농부는 이때라 하고 “아차, 말을 좀 실수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당신네 개가 우리 개를 물어 죽였습니다. 그러니 30만원을 주셔야겠습니다.” 순간 변호사는“아 그 미물 짐승들끼리 싸우다 죽었는데 그걸 가지고 뭘... ” 하고 말을 뒤집습니다. “아니오, 당신 입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개 값 30만원을 내놓으시오.” 변호사는 꼼짝 못하고 30만원을 내 놓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꼭 기억하고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잘못된 재판, 이런 재판이 그냥 넘어갈 줄 알고 있지마는 재판하는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가 이런 못된 말로 고소하고 있지마는 그것을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재판장 위에 더 높으신 재판장이 계십니다. 위에 계신 재판장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벨릭스는 도처에 소요가 일어나므로 유배의 형을 받고 되돌아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고소인,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자기네가 이런 음모를 꾸민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기네가 고소한다고 고소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건, 모든 음모, 모든 생각과 말, 위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아나니아는 대 제사장이면서도 이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 앞에 대항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