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12-26 | 김남수 목사]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며 복음을 증거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도 받지 못하고, 죄목도 정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법을 어겨가면서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바울을 없이 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천부장이 상황 판단을 하기로는 바울을 내놓으면 분명히 그는 찢기어 죽습니다. 때문에 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 놓아 바울이 죽게 되면, 그를 죽인 자들을 찾아야 하고, 이유를 알아내야 하고, 일이 아주 복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곳의 질서를 맡고 있는 천부장의 입장에서는 바울을 무사하게 보호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군인들의 영문 안에 바울을 가두게 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본대로 “그 날 밤에(11절)”이 어려운 소동이 있는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죽지 않는다. 담대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로마에 갈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로마에 무사히 갈 것이다 하십니다.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십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큰 위로요, 하나님의 큰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봐도, 왜 바울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묻지 마세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실 테니까, 우리는 그대로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 알겠다고 그러지 마세요.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네 곁에 있다. 너와 함께 있다. 너와 함께 한다 하십니다.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로마에 갈 것이다. 이 말씀이 있은 후, 2 년 후에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당장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일차적으로 로마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본문을 보니, 로마로 가게 되는 과정의 하나로 바울은 더 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되어 있지만,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이 고통스러운 사건으로 인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으로는 길이 꽉 막혀 있으므로 로마로 통하고자 하는 것이에요. 고난의 길,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너는 로마로 가리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리라고 하신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첫 단계가 뭐냐 하면,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는 꼼짝 못하고 죽게 생겼어요. 그래서 가이사랴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이사랴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계속 그를 죽이고자 하니까, 천부장이 기회를 봐서 놓아 줘도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할 수없이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로마로 갑니다. 참으로 오묘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으로는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놀랍고도 신비로운 진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요, 신비로운 우주적 구원의사역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악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 십자가의 사건은 가야바와 안나스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심지어 헤롯당까지 몽땅 합하여 만든 하나의 걸작품입니다. 악의 승리요, 악의 최고조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 저들은 성공했다고 여길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겼다. 예수님을 죽였다. 하고 만세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들은 망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그 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주적 진리입니다. 이렇게 우주적인 놀랍고 신비로운 경륜을 보고, 그 속에서 그 빛 속에서, 오늘의 본문을 이해 해 보세요. 그러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12-14절의“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라는 말씀을 보니,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한 사람이 40여명 있었다고 합니다. 살리기로 맹세했다면 모르겠지만, 죽이기로 맹세한 이 사람들은 참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오늘날 IS와 같은 극렬분자요, 극악한 살인집단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대 제사장들에게 고용된 것 같아 보입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기에“아!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난 먹지 않겠다.”라고 했겠습니까? 이들은 벌써 대제사장으로부터 바울을 죽이라고 하는 지령을 받은 것 같아요. 마치, 가룟 유다가 제사장으로부터 은 30을 받은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몇 사람을 고용했는데, 그만 기회를 놓쳤어요. 소동하는 가운데 바울을 죽여야 했는데, 못 죽였다는 말입니다. 이미 여러 번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에 제사장이 대노한 것입니다. “너희들 무엇 하는 것들이냐? 돈만 받아먹고!” 사정없이 책망하게 되니까, 이제 이런 맹세까지 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물어 볼 것이 있다 하고 바울을 불러 내 주세요. 산헤드린 공의회까지 오는 동안에 숨어 있다가 틀림없이 없애 버리겠습니다. 만일 없애지 못한다면 저희가 죽겠습니다.” 본문에 보니, 저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를 죽이기까지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12절).” 과연 이 사람들 죽었는지, 살았는지, 저는 궁금해요. 맹세했으면 맹세한 대로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바울을 못 죽였으니, 그가 로마로까지 가버렸으니, 이 사람들은 분명히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쓸데없는 맹세를 한 것입니다.
이제 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것을 신앙으로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시기를 “옛날에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들이, 선지자를 죽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어요. 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입니까? 살인이라는 악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의를 이루고자 합니다. 무서운 생각입니다. 무릇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어떤 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충성된 행위라고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여기서 음모가 주어집니다. 보십시오, 그러면 왜 당당하지 못하고 음모를 꾸미는 것입니까? “천부장에게 물어 볼 말이 있으니 한 번 더 공의회에 나오게 하라”고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알아볼 양으로(15절)”- 알아 보는게 아니라 알아보는 척 합니다. 그렇게 바울을 유도해서 끌어내 천부장이 있는 곳, 즉 군인들이 사는 영내를 벗어나서 공의회로 가도록 하고, 그 노상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간사한 짓입니까?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서 15절에“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들을 더 자세히 얼어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이와 같이 그럴듯한 이유를 빙자하여 꾸미는 음모, 이것이 얼마나 불신앙적입니까? 어디에나 이러한 음모는 있습니다.
느헤미야서에 볼 것 같으면, 느헤미야가 퇴락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있을 때에 많은 적이 있습니다. 이 적들은 느헤미야를 죽이기로 했습니다.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가 할 말이 있으니 오노평지로 나와 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네 번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거절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바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너무 바쁘고 막중하기에 지금 어디 왔다 갔다 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듣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면합니다. 만일 저들이 부르는 데로 오노 평지에 나갔더라면, 그는 암살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런 음모가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좋은 얘기 하는 것처럼 “조금 만납시다, 이리로 오십시오.” 해 놓고 중간에 엄청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음모 자체가 자살행위라는 것도 동시에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말, 여우와 나귀가 함께 짝을 지어 사냥을 나갔습니다. 여우는 이쪽에서, 나귀는 저쪽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사자를 만났습니다. 매우 굶주린 이 사자는 여우를 잡아먹겠다고 덤빕니다. 여우는 간사하게 말을 합니다. “사자님, 몸집이 작은 나를 잡아먹어 봤자 배가 차겠습니까? 저 쪽에 나귀가 있는데, 그 놈을 내가 잡아 드릴 테니 나를 놓아 주십시오” 사자는 “그래라” 하고 인심을 썼어요. 이에 여우가 나귀를 부르고는 살살 꾀어서 깊은 함정에 빠뜨렸어요. 그 다음에 사자에게 가서 말을 했습니다. “내가 저 함정에 나귀를 빠뜨려 놨으니 이제 가서 잡수십시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가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여우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나귀를 다음 날 아침에 먹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래 오늘 너를 먹겠다.” 이것입니다. 여우가 먼저 죽었습니다. 이 우화를 왜 말씀드리는고 하니, 사람들이 음모를 꾸며 누구를 죽이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음모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 15, 16절에 보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나타납니다.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하필이면 바울의 생질이 이 음모를 알게 됩니다. 어떻게어떻게 이 비밀이 누설됩니다. 노상에 매복했다가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그는 곧바로 바울에게 갑니다. 가서 얘기를 다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듣고 그를 백부장에게 청하여 천부장에게 보냅니다. 본문 17-24절에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 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음모를, 이 정보를 천부장에게 다 알려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내가 들은 소문 한마디, 내가 아는 정보, 내가 아는 지식,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 이게 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서 듣고, 보고, 만나는 사건들입니다.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때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지나가는 얘기 한 마디도 듣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해서 역사가 바뀝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알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바울의 생질이 어디서 어떻게 듣게 되었든 간에 그 음모를 다 들었어요. 그리고 바울이 죽지 않도록 일을 처리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너는 로마로 무사히 가리라. 로마에 무사히 가려면 바울이 죽지 않아야 갈 것 아닙니까? 바울의 생질이 한 마디 소문을 들었다는 것, 그가 용기 있게 처리한 것, 이 하나 하나가 다 오묘한 것입니다.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들어서 감동이 되나 안 되나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천부장이 40 여명이 죽인다는데 창병, 보병, 마병 등 470 명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해서 바울을 무사히 가이사랴로 보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 까지는 64km입니다.별로 멀지 않는 거리입니다. 본문 23-26절 밤중에 총독 벨릭스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470 명을 군인을 호위병으로 따라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이 무사히 가이사랴 총독에게까지 보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분명히 주님께서는 바울이 로마까지 무사히 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곳이 없어야 로마에 갑니다. 있지 못하도록 되어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로마로 가게 하기 위한 과정에 오묘한 일이 하나 둘씩 이루어집니다. 한 문이 닫히면서 다른 문이 열려요. 한 길이 닫히면서 다른 길이 열려요. 이렇게 해서 바울을 로마까지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에 바울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로마에 가리라, 그러나 그 경로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언제 가리라는 것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가기는 갈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노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제 그 약속을 믿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잠시도 이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풍랑이 일어나든, 일이 겹치든, 내가 매를 맞든, 나에게 비난이 있든, 어떤 격동이 있어도 분명히 내가 계획하고 내 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약속이라면,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통하여, 언제 이루어지는지는 묻지 마세요. 다만 믿고, 순종하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것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충성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상을 받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