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10-21 l 김남수 목사]
제사장 아나니아의 고소를 당한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세 번째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그가 체포될 때에 영문의 층대에서 변명한 일이 있었고, 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기변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생사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로마의 총독인 벨릭스는 로마를 대신하여 법적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사형을 집행할 수 있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 사형을 선고하거나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지만, 죽이기로 작정하고 로마사람들에게 넘겨서 사형을 언도할 수 있게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형에 대한 권한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로마 총독 앞에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와 함께 곧 집행되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벨릭스 총독 앞에 선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선 것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여기에 죽고 사는 생사문제가 걸려 있습니다.이렇듯 절박한 법정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대로 바울은 담대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결단한 믿음이 있습니다. 아마 주께서“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 네가 로마로 가리라,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과 또 자기를 담대하게 하시던 성령의 역사와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변명을 구차하게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해서 내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내가 무엇을 전하고 있으며, 내가 왜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를 역력히 만인 앞에 증거코자 하는 바울의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자세는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구차한 자세가 아닙니다. 벨릭스에게 잘 보여 가지고 우선 이 자리로부터 모면해보겠다는 비겁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송사한 사람들은 3절에“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하고 아첨의 긴 인사를 하는 한심한 무리들과 대조해 볼 것입니다. 사실은 고소한 사람들보다 피고인 바울 쪽이 더 다급합니다. 바울은 생사가 걸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입을 열어 말씀하는 첫 마디를 보세요.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된 것을 내가 알고, 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10-11절)”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유대를 다스렸으니 우리 종교문제와 나의 문제에 대하여서도 충분히 알 것입니다. 그럼으로 본인은 간단히 말합니다.” 이런 자세입니다. 구차하게 긴 설명을 하려하지 않아요. 이 담대함, 이 선명함, 이 용기 있는 모습이 오히려 벨릭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둘째로, 그는 사실을 간단하게 말씀하려 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려 합니다. 구차하게 긴 이야기나 부탁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그는 고난을 당해도 좋습니다. 사형을 당해도 좋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결론이 내려져도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지금 의도하는 바는 오직“나는 복음 전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다.”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부활을 전한다는 것, 이 한 가지 연유로 고난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이라면 다 좋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예수 전하는 것, 이것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당하겠다.―이것이 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설파합니다.
오늘 바울의 자기변호 내용은 5, 6절에 더둘로가 고소한 세 가지 조목에 대한 답변입니다.
서론적 인사(10절)에 이어,
첫째 조목인 소요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하고(11-13절),
둘째 조목인 이단에 대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시인하고, 그것이 바른 신앙임을 변증한(14-6절)후,
셋째 조목인 성전을 더럽혔다는데 강하게 반박하였습니다(7-21절).
첫째 소요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함(11-13절)
11절에“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바울은 총독의 지식과 경험에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총독이 오랜 세월 동안 유대에 머물렀던 그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있다가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불과 열이틀 밖에 되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한 짧은 기간을 강조하는 것은 그 짧은 기간에 로마 당국에 대한 반역을 도모한 군중을 선동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음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입니다.
12절에“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바울은 자신이 성전에서 누군가와 변론하는 것이나, 또는 사람들을 모아서 선동시키는 현장을 고소자들 중에 본 자들이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그들이 자신을 고소한 사실은 날조된 거짓이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논리적인 바울의 변론은 간결하면서도 너무 생생하여 아무도 변론을 펼 수 없었습니다.
13절에“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아나니아 일행이 많은 죄목을 들어 바울을 고소했지만, 그것을 증언할 증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논리 정연한 변론은 이제껏 그를 고소하였던 더둘로의 고소내용 전체가 거짓이었음을 밝혀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이단에 대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시인하고, 그것이 바른 신앙임을 변증함(14-16절)
14절에“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바울은 그를 고소하는 자들이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모두 반박하면서 이제까지 그가 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고소자들이 나사렛 이단이라고 부르는 그 교리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고소자들의 말과 같이 백성들을 미혹하는 황당무계한 이론이 아니라, 이제껏 유대인들이 믿어왔던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기록한 것인데,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어찌 이단이 될 수 있겠느냐고 반박했습니다.
15절에“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은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전심으로 믿으며 부활의 소망도 갖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은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므로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의인과 악인이 반드시 부활하리라는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도 있습니다. 물론 부활신앙은 대제사장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마는, 당시의 유대교 정통교리의 한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더둘로에 의하여 고소되어 이단이라고 정죄된 내용은 이스라엘 조상 대대로 믿어 온 부활신앙에 대한 잘못된 주장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총독에게 이 세 가지의 경위를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총독이 그 사건에 대하여 정확히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16절에“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바울은 총독 앞에서 담대하게 변론함으로써 더둘로가 자신에 대하여 고소한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날조된 것임을 밝혔습니다. 자기는 다만 조상 적부터 믿어왔던 하나님의 말씀과 그 예언의 성취를 믿으며, 장래의 소망인 부활 신앙을 전했을 뿐이고, 대중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킨 일이나 성전을 모독하거나 더럽힌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양심에 거리낌이 조금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셋째,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17절에“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고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이 구제금을 전달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연보를 모아서 예루살렘에 가지고 온 이유는 예루살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도와주며 성도와의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제를 통하여 그의 동족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했습니다.
18절에“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바울은 자신이 성전을 찾는 것은 성전을 모독하기 위해서거나 사람들을 모아 소동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대로 결례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갔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사람들을 모은 일은 없었으며, 이 일에는 저희들이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성전에서 경건히 결례를 행하고 있을 때에 아시아로부터 온 몇 몇 유대인들이 소란을 피우며 자신을 붙잡았다고 바울은 증언했습니다.
19절에“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을 미워하여 소동을 일으켰지만 바울을 정식으로 고소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고소했다면 바울을 송사하기 위하여 그들이 법정에 나와야 하는데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법적으로 바울을 고소할 어떤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0절에“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자신이 심문받을 때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범죄의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거짓을 날조한 고소자들이 자신을 정죄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증거를 보이라고 총독에게 당당하게 부탁했습니다.
21절에“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고소자들이 바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죄목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목은 로마법으로는 도저히 범죄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했던 연설은 대중을 선동하거나 군중을 소요를 일으키는 내용이 아니었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교리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교리로서 이단의 말도, 식민지 백성을 격동시켜 통치 국가인 로마에 대한 반발을 일으키게 하는 말도 아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의 마음에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며, 고소자들의 날조된 송사가 너무나 터무니없는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바울과 같은 자기변호를 하는 참된 용기는 그 신앙과 깨끗한 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길을 가셨습니다. 바울도 이 길을 갔습니다. 우리 또한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양심을 따라서,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본문 말씀대로“이 도를 쫓아서”주저함이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