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1-18 | 김남수 목사]
베드로의 가이사랴 고넬료 집의 방문은 교회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예루살렘의 유대계 신자들은 반발을 일으켰고, 힐난하는 그들에게 베드로는 자신이 행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대로 순서대로 설명하므로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그리고 이 문제를 통해 이방전도의 선교적 신학기초가 확실해진 것입니다.
I.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간 사실 설명(행11:1-12)
오늘 본문 1-10절까지는 베드로의 설명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고넬료 집에 가게 된 사실을 설명합니다. 왜 누가는 같은 내용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했을까요? 초대교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선교적 의미를 가지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넬료가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이방사람을, 이미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형제로 영접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을 받고,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또 그들이 성령을 받고 세례까지 주었습니다. 고넬료 일가가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인이 된 고넬료 권속을, 먼저 믿는 유대 기독교인이 영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문제입니다. 보십시오. “이방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도 예수 믿고, 저들도 예수 믿었다. 유대사람도 예수 믿었고, 이방사람도 예수 믿었다. 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에다 대 놓고 저 사람들은 본래 이방사람들인데, 생활습관도 우리와 다른데 하고, 딱 벽을 쌓는 것입니다. 심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분을 자세히 보면, 이방사람이 예수 믿었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세례준 것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사실입니다(행11: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이방인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기 전의 유대인의 생활규범입니다. 이 생활규범을 예수 믿는 다음에도 고치지 못했다는 점, 이 점이 중요한 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데 왜 같이 못 먹는 것입니까? 왜 서로 오고 가고 못합니까? 그런데 유대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었다 하더라도 이방인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다 하는 이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도 안 되고, 더구나 들어가 함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풍습과 문화가 걸림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슈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집단주의적 이기주의입니다. 문화적인 우월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 문화가 더 좋다. 너의 문화가 나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로 교제(코이노니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 - 여러분이 성도의 교제를 넓혀 갈 때에 혹이라도 있는 사람이다 없는 사람이다, 유식한 사람이다 무식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구별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사람이 예수 믿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베드로가 보니 한심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같은 반발과 힐난 앞에서 일어난 일을 차례로 설명했습니다. 4절에 “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가로되” 베드로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지만, 침착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실을 차례대로 죽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나는 그대로 순종한 것뿐이라고 사실 그대로 설명했습니다.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마침내 오해가 풀리고 할례자들은 베드로 말에 동의하게 되어 우리가 잘못되었습니다. 하고 이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II. 이방인 고넬료 권속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자 성령님이 임하심을 증거 (행11:11-18)
본문11-18절까지는 10장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사실을 증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 성령을 받은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이 행동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원리 즉 행동원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신학화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설교할 때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이 신학적 사건이 됩니다.그 사건이 신학적 사례가 됩니다. 부차적이지만 잘 들어 보십시오. 중요합니다. 이 사례가 확증되는 순간에 그것이 일반화하여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제 설명이 된다면 그것은 온 세계로, 어느 민족에게나,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 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치유사역은 믿는 자의 능력과 권세(눅9: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를 알고 사역에 적용하여 믿음으로 행하면 누구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건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증거는 이방으로 통하는 엄청난 선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었던 복음이, 마침내 이방으로 전해지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느냐 하는 문제가 신학화 하면서 풀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행동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하나의 사례가 신학화하면, 그겻이 일반성을 가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믿고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과정을 통해서, 그 설명을 통해서, 그 신학적 해석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한 사건이 신학적 체계를 잡으면서, 일반화하고 보편화합니다. 신학적 체계를 잡음으로서 모든 세대,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 질 수 있는 기초, 혹은 출발점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을 신학화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객관적 사실의 그 의미를 잘 깨닫고 신학화해야지,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감하거나, 자기의 주관적 견해나, 교파의 특수한 사상을 가미하여 신학화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된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오고 오는 후대에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혼란을 야기 시킵니다. 오늘날 신학이론에 그러한 신학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생이 바로 성령세례다 입니다. 또는 성령세례는 오순절 날 단회적인 사건이다 하는 등, 이런 신학사상이 있습니다. 이 신학사상을 그대로 따르다 보면, 교회의 부흥과 선교에 장애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을 줍니다. 성령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을 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사상은 후대들이 성경을 바로 깨닫고, 성경을 바로 가르치려고 할 때, 어려움을 격게 됩니다. 베드로는 설명합니다. 베드로 자신의 행동이 합당한 것이며,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18절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베드로가 겪은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이 베드로가 증거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의심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제부터는 이방사람도 구원하신다, 이방사람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다 하고 문을 활짝 여는 순간이 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사건을 사람들이 이제 믿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이제 거치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바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실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특별히 본문에는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갈 때, 12절에 “형제 6명이 함께 갔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이 많습니다. 6명이면 베드로까지 합하여 7명입니다. 한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 7명이 함께 경험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사람이 보고 한 사람이 깨닫는 것이 아니라, 7명이 함께 경험한 것이므로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2명을 증인으로 세우는데, 로마인이나 애굽인들은 7명을 세웁니다. 그래야 문서가 완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 7명이 함께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성령 받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선교와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적 계획, 다시 말씀드리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이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혹 내가 실수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혹 내가 죄를 짓는 일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 없는 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 값으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그렇게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로워지고자 하는 마음보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하나 희생해서 저 사람 살릴 수만 있다면, 나 하나 희생해서 다른 사람 구원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할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본문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는 대로 합니다. 12절을 보면 “성령이 명령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저 사람들과 함께 가라” 하시므로 명령대로 갔노라 하십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왜 딴 소리가 있습니까?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또 성령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 판단을 중지해야지요. 성령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저 사람을 사랑하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하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방사람의 집에 가라 하시니 가는 것이지요. 저 집에 가서 복음 전하라 하시니 전해야 하는 것이지, 이방사람의 집이니 안 됩니다. 그런 일은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사람의 집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의심하지 말라 하시면 의심안하는 것입니다. 판단 중지 - 사실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이 옳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것이 옳고, 밑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판단하기로 하면 끝이 없어요. 오직 성령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성령이 가라 하시면 알겠습니다. 할 것이요. 성령이 의심하지 말라 하면 않겠습니다. 할 것이요. 복음을 전하라 하시면 전하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15절에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복음을 전했더니 오순절에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한 것과 같이 저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방인도 구원받고 성령 받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데에야 누가 이러쿵 저러쿵 합니까. 우리에게 임했던 성령이 똑같이 역사해서 저들에게도 임하니라. 그런데 우리 생활규례를 어겼다고 따질 것이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나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고, 너의 판단도 중요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그에 따라 순종합니다. 내게 납득이 되느냐 안 되느냐 문제되지 않아요.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이런 것은 나와 상관이 없어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로 믿고 밀어붙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것 때문에 망설이지 않아요. 어떤 후유증이 오건 상관 안 해요.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냥 믿고 가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태도입니다.
16절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행 1:5)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말씀이 그 시간에 그 현장에서 생각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현장에 갔을 때, 그 현장에 막 부딪치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로 이미 깨달았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때에 주셨던 말씀이 거기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용기가 납니다. 주저할 것이 없어요. 그야말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설교하는 동안에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노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17절에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성령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의 뜻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것을 누가 가로막으며 누가 비판할 것이냐, 내가 누구관대 그것을 막겠으며 너희는 누구관대 그것을 막겠느냐 너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너희들도 별 도리가 없이,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너희가 나같이 생각했다면, 그 자리에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라 하는 확신이 오는 순간에 세례를 베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너희가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나도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역사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는데, 누가 막겠으며 누가 문을 닫겠느냐. 그런고로 나는 거기에 동참하고, 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노라 - 이렇게 사실을 증거 합니다.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다시는 더 묻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잠잠했습니다. 18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이제 의심은 끝났습니다. 결론도 끝났어요. 모두가 공감대를 이루었어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저희기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그래서 오늘날 이방인에게, 즉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어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살아가는데 어떤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기의 생각이나 고집, 편함, 시류나 이 시대의 세상풍조를 따를 것입니까? 모름지기 사도 베드로가 취했던 그 행동원리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본을 따라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께 순종하여 살아가며,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므로,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영광 돌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