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8:23-28 ㅣ김남수목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3차 전도여행은 대부분은 에베소에서 보내게 됩니다. 에베소 전도는 그 규모와 시일로 보아 바울의 선교를 통해서 최대의 것이었고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 일대에 그의 활동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볼로의 예비적 활동에서 시작이 되는데 아볼로는 박학능변의 전도자였으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굴로 부부가 그를 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게 하고 성령을 받게 하여 훌륭한 전도자로 세웠습니다. 아볼로의 이야기는 바울의 선교 여행기의 한 삽화이나 신약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주는 것입니다.
24절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아볼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볼로의 인물됨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인데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에서 태어난 유대 교민입니다.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곳은 지정학적으로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해있습니다. 애굽(이집트)의 맨 북단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2000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보면 세계에서 제일 큰 도시가 로마요, 두 번째가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만큼 큰 도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루살렘이나 혹은 바벨론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도시가 아니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상적 도시를 이루기위해서 의도적으로 세운 도시입니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분당 판교」라는 신도시를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혀 아무것도 없는 곳에다가 계획적으로 도시를 세운 것입니다.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권세를 자랑하기 위하여 좋은 지역을 선택하고 세계 중심이라고 하는 그런 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이럴게 역사가 깊지 아니한 도시이기 때문에 이곳의 시민들도 각별합니다. 애굽 사람, 로마 사람, 헬라 사람, 유대 사람 이렇게 네 민족이 공존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섞여 살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이 100 만 명이나 살았다고 합니다. 이 100 만 명이라는 숫자는 그 당시로는 굉장한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 사람이 많고, 공통으로 쓰는 언어는 헬라어 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히브리 종교, 헬라 철학, 로마 정치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 세 가지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더 이야기 할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칠십인경」입니다. 70 인이 번역을 했다고 해서 흔히들 「칠십인경」이라고 합니다. 「칠십인경」이란, 히브리말로 된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지금도「칠십인경」은 매우 소중하게 쓰입니다. 히브리말로 된 성경의 본래의 뜻, 곧 그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바로 이「칠십인경」이 보충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칠십인경」이 만들어졌느냐? 그 경위는 이렇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유명한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50만-60만 권에 해당하는 많은 장서가 이 도서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히브리말 성경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보수파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책들과 같이 나란히 놓는다는 것은 당찮지 않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은 상당히 생각을 깊이 한 끝에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성경을 가져다가 놓되, 히브리말 성경을 가져다 놓더라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부득불 헬라말로 번역을 해서 갖다 놓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칠십인경」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곳이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전설에 위하면「사도 도마」가 이곳과 애굽에 맨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히브리 종교에 능통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마음껏 연구하며 자랐습니다. 헬라 철학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헬라 철학과 히브리 종교에 대해서 능통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유대인입니다. 24, 25절에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도’ 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데, 여러분, 이 말을 오해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의 뜻을 상식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도’, ‘주의 도’, 혹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길 도(道)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도’ 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 원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고스요, 하나는 호도스입니다.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도’ 라고 번역하고, ‘말씀’ 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요 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을 옛날 번역에는 “태초에 도가 있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도’ 는 호도스입니다. 이것 역시 한자어로는 길 도(道)입니다. 문자 그대로 길입니다. 그러나 걸어 다니는 길이 아니고, 추상적 의미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진리요 생명의 길이요, 모든 생명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삶의 원리-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이런 뜻에서 ‘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헬라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 “아볼로가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했다” 는 것입니다. ‘주의 도’ 는 기독교를 가리키는 별명의 하나입니다.
아볼로는 예수에 관하여 배워서 안 사람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한 자요, 주의 도를 배워서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연구하는 중에 율법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메시야 대망 사상을 설명해 주는 것이 구약 성경이라고 하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므로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메시야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마지막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고, 그 세례 요한이 예언한 메시야가 오셨다 여기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를 자세히 보면 구약 성경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분이라는 이야기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배워서 알고 그래서 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7, 28절에 “그는 아가야로 건너가서 믿는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며 구약을 풀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더라” 고 합니다. “다른 유대인들을 말로 이기더라”입니다. 워낙 학식이 높으니까 누구도 그를 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바를 남에게 담대히 설명하고 가르치는, 그리고 변론에서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누구한테도 지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확고하게 설명해서 다른 사람을 이기는 그런 변론적인 사람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바로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도 좋고, 성경도 많이 배웠고,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까지 알고 있지만, 메시야가 오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재림하신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요한의 세례는 알면서도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뜻은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의 복음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사도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볼로 이 사람은 마음 밭은 좋은데, 복음의 씨앗이 없습니다. 씨앗이 없으니까 생명이 발생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듣고 그 증거를 받아들일 때에,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듣지 못한 복음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듣지 않는 복음을 어떻게 믿습니까? 아볼로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을 사도들을 통해서 그 증거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고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렇듯 학자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변론자인 사람이 에베소에 와서 또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예수를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곳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에 비하면 상대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볼로는 성경과 모든 일에 대해 대 학자인 반면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천막 치는 업을 가진 서민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경적인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볼로를 만났습니다. 26절에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고 합니다. 아볼로를 불러다가 자기 집에 앉혀 놓고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일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에게 배우게 생겼습니까? 그러나 그는 배웠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배우는 자세가 겸손입니다. 가르치기도 잘 하지만 배울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계속 가르치려고만 하고 배우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가르친다고 가르치기만 잘하고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은 그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계속 배워야 합니다. 배움의 자세-아볼로는 아주 겸손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배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배울수록 더 배우려고 하고, 가르치면서 더 배웁니다. 아볼로는 학자입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배웠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학문 없는 경험이 경험 없는 학문 보다 낫다” 학식 있는 바보들이 가장 한심한 바보들입니다. “학식은 지혜로운 자를 더욱 지혜롭게 만들고, 미련한 자를 더욱 미련하게 만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학식이 사람을 지혜롭게 하지 못해요. 어리석은 사람은 공부할수록 더욱 어리석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집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체험이 있는 신앙인이요, 예수 증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볼로는 바로 이 사람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왜 입니까? 그들에게는 체험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체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체험 없는 지식을 버리고, 체험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생생한 증거를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성령과 성령사역에 대한 체험을 받아들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그는 확실히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우리가 이 체험적 신앙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성경을 좀 안다고 해서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 받지 못하 자가 성경을 많이 알면 골치 아파요. 이런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질문을 해도 이상한 질문만 합니다. 그런 것만 가지고는 “목사님 이것 이것 어떻게 됩니까?”하고 물어옵니다. 그때 마다 “저도 모르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것도 몰라요?” 합니다. “모르는 것이 더 많지요” “그러고도 설교합니까?” “예 설교하지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꼭 괴상한 것만 들고 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령과 함께 성경을 읽어야 되고,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905년 평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초기라 선교사님들이 교회의 목사님이고,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목사님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를 줄 때에는 주로 선교사가 세례 문답을 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문답이 아주 까다로웠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을 많이 했는데 거기 합격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70이 넘은 노인장 한 분이 예수를 믿어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데, 번번이 불합격입니다. 선교사는 하는 수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는 다른 것은 묻지 않을 테니까, 사도신경과 십계명, 주기도문만 외워 가지고 오세요, 그러면 합격시켜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열심히 외웠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외웠다가도 선교사 앞에 딱 서면 갑자기 깜깜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2년 동안을 줄곧 낙제했습니다. 세례는 당연히 못 받았습니다. 3년째 되는 해에 노인은 또 세례를 받으려고 문답하러 가는데, 보나 마나 또 못 외울 것 같던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선교사님” “왜요?” “유아세례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른 세례는 그만 두고 유아세례를 주시지요.” 선교사님이 너무 좋아가지고 “그렇게 합시다.” 하고는 당장에 세례를 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신경 못 외운다고 안 되겠습니까?
여러분! 너무 많이 안다고 잘 난체 하지 맙시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이 아는 게 중요합니까? 많이 믿는 게 중요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지식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성경을 많이 보고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물론 많이 봐두면 좋지요. 그러나 학문 없는 경험이 경험 없는 학문 보다 낫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체험적 신앙, 신앙고백이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아볼로는 그런 의미에서 학자로는 참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라고 하는 아주 서민인 그들에게 몇 마디 딱 듣는 순간에 “아, 이 분들은 다르다”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아볼로 그 자세가 훌륭합니다. 그는 옥토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마음에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체험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지식을 단순하게 만드는 단순한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는 내 구주”이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서 부활하셨고, - 확실하고 단순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떤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 있습니까? 내 믿음은 어디에 속합니까? 내가 정말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바른 성령의 체험을 가지게 된 때에,
내가 가진 지식이 유익해 집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울수록 믿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증거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아직도 바른 신앙 고백이 없고 성령의 체험이 없다면, 그런 자세로 성경을 읽을 때에 오히려 의심과 문제만 많아지고,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고백하는 사도행전적 맥락에서의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가 하는 공부, 그가 하는 봉사, 그가 하는 수고가 다른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꼭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