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3-7ㅣ 김남수 목사]
제가 어느 목사님의 저서를 읽는데 그 목사님이 굉장히 진솔하게 자신의 경험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기 때문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 간증문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잠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 목사님의 아들이 큰 고민에 빠져서 근심과 상심, 절망감에 헤메고 있었습니다.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로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성격의 고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괴로워서 절망에 지친 아들을 어떻게 위로할까 생각하시다가 아들이 잠들었을 때 몰래 방에 들어가 그의 옆에 누워 속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생각하기로는 자신이 아들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없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옆에 누워서 속으로만 기도하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아들 방에 들어가 옆에 누워서 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들어와서 조용히 옆에 눕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이 없어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내 마음, 내 중심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여기에서 용기를 얻어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일을 새롭게 개척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는 위로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고후1: 3~7, 7:4~13, 이 두 곳에서 집중적으로 위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배경을 말씀 드리면 우리가 잘아는 대로 고린도 교회는 분쟁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잘못된 일들을 지적도 하고 책망도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의 말씀을 듣고 회개도 하고 뉘우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럴 때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위로의 편지를 쓴 것입니다. 즉 책망을 하고 책망의 효과가 있을 때, 고린도후서를 통해 위로를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위로’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활의 모든 면에 있어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우리에게 오신 성령 하나님은 ‘보혜사’십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오’인데 ‘보혜사’란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부름을 받고 곁에 와서 권고하고 변호해주며 위로해주는 ‘위로자’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꾸중을 듣고 울고 있을 때 우리는 아이를 끌어 당겨서 안아줍니다. 바로 이것이 위로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낙심하고 곤고할 때, 따뜻한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새 힘을 북돋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로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도 위로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내 속으로 난 자식도 제대로 위로하지 못합니다. 위로 받고 위로한다는 것 말은 쉽지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참된 위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본문에서 참된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3절에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열릴 때 그는 위로 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까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그는 영영 비뚤어진 마음에 함몰되어갈 것입니다.
위로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위로를 거부한다면 어디서 위로를 받겠습니까? 그는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마음, 여유, 열린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설사 사람의 위로를 받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위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이게 될 때 다음 단계로 비로소 사람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그는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위로의 하나님’에 관해 깊이 생각해 봅시다. ‘위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데 그런 우리를 곁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우리가 지불해야 할 눈물과 고통, 질고와 저주를 몸소 대신 받으시고 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었는데, 그리스도안에서 교제가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곁으로 부르심으로 내가 아들의 위치와 신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위로’는 영어로는 comforter로 번역하는데, comforter라는 단어 자체가 ‘힘을 북돋아준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넘어지고 쓰러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치료받고 힘을 얻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 주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본문 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위로하십니다. 보통 평안한 가운데 위로하시고, 잘 살고 잘 되고 성공해야 위로가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경과 가난과 실패와 고난 중에 있을 때 위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위로를 수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위로하십니다. 내가 핍박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위로하십니다. 고난의 뜻을 알도록 인도하실 때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면 우리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위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지만 이것이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을 알 때 위로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녀를 교육할 때 때리기도 하고 책망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하는 마음에서 해야 된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함께 하시고 그 환난이 더 높은 사랑의 표적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심으로써 위로를 받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고난 당할 때 그 고난을 결코 율법적인 관계에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요, 오직 사랑이요, 오직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음을 알 때, 환난 중에서도 우리는 비로소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받은 위로로서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은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참으로 위로 받은 사람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중앙의료원 병원 원목으로 계신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중앙의료원에서 10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수술을 하고 또 하고 12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잘못되어서 죽으셨습니다. 시신을 안치해야 되겠는데, 시체실이 만원이 되어 그날은 목사님 시신을 넣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시체실에 넣으려고 가보니까 시신이 꿈틀꿈틀 합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저녁에 냉장고에 넣었더라면 얼어 죽을 뻔했습니다. 목사님은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병원에서 원목으로서 환자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환자가 ‘내가 지금 수술 받는데 걱정이 됩니다.’고 말하면 목사님은 ‘저는요, 시체실까지 갔다 왔습니다.’라고 합니다. ‘일 이년 투병 생활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는 10년이요.’ ‘10년’라고 위로합니다.그는 모든 환자를 위로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92년부터 지금까지 집에서 기도원으로 병원으로 돌아다니면서 약 21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형편을 몸소 체험을 해서 너무도 잘 압니다. 제가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많은 위로를 그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의 고통 중에 있는 저를 통하여 6,000여명의 목사님에게 전인치유 사역훈련을 하게 하셨으며, 한국교회 보수진영에 예수님의 3대 사역중의 하나인 치유사역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95년 7월에 중풍 등 여러 가지 질병으로 쓰러졌으나, 다시 치유해 주셔서, 그 후 미국 리전트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수석으로 받게 하셨고, 예봄교회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려고 할 때 기도하신 많은 분들이 건강한 분들도 예배당 건축이 어려운데, 그런 몸으로 어떻게 건축을 하겠느냐고 하면서 말렸으나, 질병중에도 믿음으로 시작하여 여러 교우들과 함께 아름다운 예봄교회당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뒤돌아 볼 때, 질고 중에도 함께 일하시며, 위로를 주신 우리 하나님아버지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참 어러운 일입니다. 한번도 아파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병든 사람을 찾아가서 이러쿵저러쿵 걱정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 도와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나도 건강하면 그런 소리 할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께 내가 받은 위로,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으로 남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위로 받는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남달리 당신은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소중히 쓰시고자 하십니다. 믿습니까? 위로자로 쓰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과 나 사이에 큰 위로가 있으면 그 소중한 경험, 그 소재를 하나님께서 이제 쓰실 것입니다. 이 말은 목사인 나의 말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당한 경험이 있는 위로자를 통하여 환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아멘!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난이 넘칠 때 위로도 함께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당하는 일이 없이는 그리스도께 받는 위로도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형제 간에도, 친구간에도 그렇습니다. 함께 고난 당하는 자만이 서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일 때 위로가 넘친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2:19~21절을 보면 고난에 대해 세가지를 말합니다. 애매한 고난,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는데, 이 고난만이 위로가 있다고 합니다.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고난 자체에는 위로가 없으나, 회개할 때 죄 사함에 대한 기쁨과 위로는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 즉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그런 고난일 때 하나님의 위로가 넘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위로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 6절 끝에 있습니다.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은 것 같은 고난도 너희로 견디게 하느니라.’ 위로의 궁극적 효과는 바로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위로 받고 위로하고 또 위로 받고 위로하다 보면, 이제 앞에 당하는 모든 고난을 넉넉히 견디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견딘다는 것은 단순히 참는다는 뜻이 아니고, 승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로서 고난을 승리하는 것입니다. 위로란 이런 의미에서 크고 놀라운 생명력이요, 생산적인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종합해보면 위로 받고 위로 받음으로 능히 견디게 되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위로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위로 받은 경험을 통하여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떤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그러함으로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위로의 사람으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로의 사람으로 쓰십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 위로 받고 위로 하고 이렇게 함으로 구원을 이루고, 더 큰 능력을 이루게 되어 위로가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