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3-7 ㅣ 김남수 목사]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설교전문
어떤 어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는데 알아듣기는 한데 말을 못합니다. 병원에 가 상담을 했더니 진찰 후 발성기관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데 아이가 말 못하는 것은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스트레스는 캐나다 생리학자 셀티에 박사가 물리학의 개념을 신체반응에 도입한 말로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이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는 간단히 말씀 드리면, 우리 몸에 가해진 외부의 압력이나 자극이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압력이나 자극이 어떤 것은 유쾌하고 어떤 것은 불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쪽은 행복이 되고 한쪽은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셀티에 박사가 이론을 내놓으면서 연구한 것을 500쪽에 달하는 큰 책 하나를 썼습니다.
출판사에 갔다 주었더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너무 분량이 많다 좀 줄여달라고 해서 30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랬는데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며 더 줄일 수 없겠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셀티에 박사는 “그러면 아예 책을 내지 말고 한마디로 하죠” 그리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개를 적으로 보느냐 친구로 보느냐에 달린 겁니다”개는 어디까지나 개입니다.
저 개를 적으로 보느냐 친구로 보느냐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개를 만났을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에 생화학적인 반응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고,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스트레스는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몸부림칩니다. 보통 4가지 방법을 취하는데 권력, 명예, 소유, 행동주의입니다. 무기력에 맞서 싸우면서 권력을 얻으려고 합니다. 권력만 있으면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인데 아닌 것입니다. 권력만 있으면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인데 아닌 것입니다. 권력을 가하면 불안합니다. 권력이 힘든 것입니다. 절대 평안이 없습니다.
또한 굴욕감과 맞서 싸우면서 명예를 추구합니다. 공부도 하고 뭣도 하고 명예만 얻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입니다. 어느 사이엔가 명예에 취해서 정신이 없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빈곤과 싸우며 빈곤을 이겨 많은 돈을 벌고 넉넉한 소유를 얻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려고 증권도 했다가 땅도 샀다가 집도 샀다가 몸부림 쳐 보지만 돈 없는 사람이 편합니다. 그것이 위로가 되지를 못합니다. 위로가 될 수 없는 권력과 명예와 소유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를 받을 수 없다 그 말입니다.
또 하나가 행동주의라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마음을 치료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노래방”이라는 데 가보지를 못했지만 이따금 TV를 보면 잠깐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점잖은 사람도 거기만 가면 발광을 하더군요. 한바탕 발광을 하고 나면 뭐가 될 줄 알지만 됩니까? 위로가 정말 됩니까?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그런 것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위로”란 말을 생각해 봅시다
본문에 “위로”란 말이 10번 나옵니다. “파라”는 “곁으로”라는 뜻이고, “칼레오”는 “부른다”는 뜻입니다. 누구를 위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내 곁으로 부른다는 즉, 가까이 오도록 부른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어린 아이가 잘못해서 꾸중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지금 울고 있습니다. 그럴 때 아이를 끌여 당겨 안아주고 가까이 오게 해서 얼싸안아 줍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곁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보내신 성령이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 보혜사”란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곁에 부름 받고 와서 변호하고, 도와주고, 보호해주시는 “위로자”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님은 위로자가 되십니다.
오는 본문을 통해 위로에 관해서 몇 가지 요점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3절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위로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위로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멀어졌는데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의로 우리를 덮으신 것입니다. 용서하시고 눈물과 고통과 저주를 그가 받으시고, 곁으로 부르셔서, 위로하고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힘이 나도록 북돋아 주십니다.하나님만이 위로의 능력이 있으시고 지혜가 있으시고 사람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받고 넘어지고 약해 쓰러져 있을 때 하나님께 치료받고 힘을 얻어서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입니다.
둘째로 4절에 “환난”중에 있을 때, 위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중에 있을 때 위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평안한 가운데 위로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살고, 잘되고, 성공하고, 출세해야 위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과 역경과 실패, 고난 중에 있을 때 위로가 가능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나를 강하게도 하시고, 신실하게도 하시고, 믿음이 있게 하신다는 것을 알면 내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위로 받게 됩니다.하나님께서 매를 치시는 저주가 아니라, 이것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 때 위로 받게 됩니다.우리 인간적 위로도 그렇습니다.여러분! 언제? 남편이, 아내가 위로가 됩니까? 가장 어려웠을 때 병들었을 때 미인은 아니지만 이 아내가 최고인 것입니다. 왜요? 그때 위로가 되거든요.그러니 가끔 아파도 보고, 병원에도 가야 됩니다. 병원에 가서 막 누우면 아내가, 남편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고난 중에 위로하고 위로 받고, 역사가 거기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셋째, 환난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로써, 환란 중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위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부터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환난 중에 참으로 위로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그 소중한 경험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제가 중풍 등 여러 가지 질병으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습니다. 저도 치료받고 17년이나 덤으로 살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환자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만이 위로할 수 있습니다. 간섭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위로 받고 치유 받는 사람이 위로함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도 아파 보지 않는 사람이 병든 사람을 찾아가서 이러 쿵 저러 쿵 걱정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도 건강하면 그런 소리할 수 있습니다”합니다. 위로가 안됩니다.남달리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소중히 쓰시고자 하십니다. 위로 자로 쓰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고난 당할 때 내게 위로자가 있습니다. 내가 위로 받았으면 이제는 남을 위로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환난 주에서 위로 받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큰 위로가 있으면, 그 소중한 경험이 소재를 하나님께서 이제 쓰실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또 한번 당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위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크리스천이 고난 당하는 것은 고난이 넘칠 때 위로도 함께 넘친다는 것입니다.
5절에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당하는 일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위로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종합할 때,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위로도 넘치게 주십시오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일 때, 위로가 넘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5:41절을 보십시오“사도들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베드로 요한 등 사도들은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나올 때 “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나니라”고 합니다.베드로의 입장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창피한 일을 당했는데.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매를 좀 맞았으니 괜찮다. 오늘 같은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이런 생각을 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위로를 받았습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 당할 때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당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뿐 아니라, 현재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위로가 있습니다. 큰 기쁨, 힘이 솟아나는 그런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위로의 궁극적 효과는 견디는 것입니다. 6절 끝에 보면 “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며 우리가 받은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합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위로 받고 위로하고 또 위로 받고 위로하게 되면 앞에 당하는 고난을 넉넉히 견딜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 “견딘다”는 “휴퍼모네”라는 말은 단순히 참는다는 뜻이 아니고, “승리한다” “승리케 한다”는 뜻입니다.내가 위로하고 위로 받는 것으로 하여 앞에 오는 어떤 고난도,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위로란 이런 의미에서 생명력이요 생산적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다시 종합해 보면, 위로 받고 위로 받음으로써 능히 견디게 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 위로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받는 위로가 있어야 하고 또 환난 중에도 위로 받는 비결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환난 중에도 예수님께로부터 넉넉히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환난 중에도 예수님께로부터 넉넉히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비결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사람이 남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바실레이야 슈링크라고 하는 유명한 신교 수도원 원장이 있습니다. 그 분이 책을 많이 썼는데, “사랑의 승리”라는 글 속에 중국문화혁명 때 핍박이 심할 때, 기독교인들이 고생한 이야기를 정보를 통해 듣고 그 책에서 간증하는 이야기의 제목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지하 교회에서 활동하다가 끌려가서 매를 맞았습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 풀려나 교인들 앞에서 간증한 간증문이 그 분속에 들어와 그것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옥에 끌려가 240대의 매를 계속 맞았다고 합니다. 매일같이 쉬었다가 또 맞고 내리 240대를 맞으면서 스데반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스테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얼굴이 천사와 같았고 스테반 집사님 앞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그 장면을 생각했더니 자기에게도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데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오셔서 자기를 그 품에 안으시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안으시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는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합니다. 아무리 때려도 안 아프더라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매를 맞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고 합니다. 감사하고, 행복하고,……바로 이것이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위로 받는 사람만이 남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남을 위로할 수 있는 이런 사람은 남달리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그러할 진대 오늘 내가 당하는 이런 저런 어려움, 고난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사양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위로자의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준비시키고 계시는 겁입니다. “모든 고난을 견디느니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위로를 받습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
위로로써 충만한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