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16-26ㅣ김남수 목사]
그리스도인이란? 여러분은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지난주에 말씀 드렸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중생한 사람,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신 사람이며, 성령을 모시고 성령께서 주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육체가 주도한 사람이나 이성이 주도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도한 사람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6절에“성령을 좇아 행하라”의 헬라어는“페리파테오(peripatevw)”인데, 어떤 표본을 따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25절에“성령으로 행할지니”는“스토이케오(stoicevw) ”라고 되어 있는데, 군사적인 용어로 일사분란하게 명령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께 굴복하여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이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과 육체는 서로 대적한다고 합니다.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양자택일 해야지 둘 다는 불가능 합니다. 문제는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편에 이끌리어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19절에“육체의 일은 현저하니”라고 하며, 일상적으로 수치를 모르고 뻔뻔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제시함으로 나의 나됨을 판단하는 바로미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기울이고 있으며, 무엇에 빠지고 있는가? 육체는 땅으로 향하는 마음, 세속에 끌리는 마음, 이것을 총칭하여 육체라고 합니다. 반면 성령은 하늘로 지향하는 마음,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마음, 은혜 안에 살며,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마음입니다. 이 육체와 성령은 대립 상태에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 속했든지 마귀에게 속했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육체와 성령의 힘의 대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소극적인 면에서는 육체의 일을 죽이고 즉 육체의 일을 따르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첫째는 육체를 이기는 법, 둘째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방법, 셋째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말씀드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육체의 일을 이기는 법입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어떻게 육체의 일을 이길까요? 육체의 일을 이기는 길은 다음과 같습니다. D. L. 무디의 설교에 나오는 말인데, "컵이 책상위에 있습니다. 이 컵에는 더러운 공기가 있습니다. 이것을 빼 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이 컵에 맑은 물을 부으면 됩니다. 맑은 물을 가득 채우면 더러운 공기는 밀려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채우지는 않고 무리하게 공기만을 빼내고자 진공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유리컵은 깨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려고 애써 본 적이 있습니까? 정욕을 이기고 죄를 이기려고 몸부림쳐 본 적이 있습니까? 쓸데없는 일입니다. 육체를 이기는 길은 육체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는데 있습니다. 증오 미움을 이기는 길은 사랑으로 채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채움에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이기는 길은 감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채울 때 자신도, 죄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채울 때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실체를 인정하십시다. 사실과 진실을 인정하십시다. 육체의 욕심을 스스로 이길 수 있다고 자처합니까? 인간은 스스로 자기 육체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성자 사도바울도 육체를 이길 수 없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절규했습니다.
본문 24절에는“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내 옛 사람도 함께 죽었으니 죽은 것으로 여기고, 이제 내가 죽은 옛 사람을 따르지 말고, 옛 사람의 욕구를 굶겨 죽여야 합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길 외에 이길 길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에“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성령 충만하여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악덕을 바울이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로써 나의 나 됨을 알고, 내가 처한 현주소를 알아 내 현 상태를 진단하겠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19-21에 육체의 일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바울은 15가지를 열거한 다음, 21절에“경계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악덕이 여전히 머물러 있고 거기에 끌려가면 그 순간부터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21절)”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정말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 성령의 열매가 맺혀 있다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15가지 악덕들이 늘 좋아지고, 마음이 그 쪽으로 기울어져 관심이 가면 근본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옛 사람을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 있던 이러한 것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마저도 없어지게 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적극적인 면에서 성령의 열매를 어떻게 하면 맺을 수 있습니까?
둘째,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방법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열매는 살아있는 나무, 생명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이 그 안에 게시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성령의 주도하에 내 인격과 마음을 성령이 완전히 다스리게 하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다음의 3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먼저, 씨앗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성령이 내 안에 계셔야 합니다. 마귀나 육체의 욕망이나 세상 것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성령이 씨앗이 되어 내 마음에 뿌려져야 합니다.
둘째, 씨앗의 문제입니다. 생명이 내게 들어왔는데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제 아무리 귀한 말씀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수용이 문제입니다.
세번째는 성장케 해야 합니다. 생명이 내 안에서 자라도록 알맞은 여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들은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수록 점점 더 충만해집니다. 커다란 탐스런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셋째,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본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9가지 열매를 3가지씩 묶어서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 셋째는 자신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만약 열매가 없다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돌이켜서 근본적으로 다시 회개하고, 성령을 내 안에서 활활 불타도록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이제 성령의 열매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아가페(ajgavph)”입니다. 아가페는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이거나, 친구간의 사랑 이거나,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유의 사랑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인도함을 받을 때, 비로소 미워하는 사람도 이제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부인이 성령을 받고 보니 남편이 예쁘게 보이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잠잘 때에 눈을 감고 자도록 만들었을까? 눈을 뜨고 자게 만들었으면 사랑하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잘 수 있을 텐데.... 이 정도로 마음에 사랑이 넘칩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해 보셨습니까? 아직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 왔는데도 보기 싫어서 속으로“이 원수”하고 마지못해 이제 왔수? 라고 한마디 합니다.똑바로 쳐다보지 않습니다. 딴 데를 보면서 인사말을 합니다. 많이 뭔가 잘못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예뻐집니다. 또한 성령을 받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회개하고 성령 충만 받으면 미운 사람도 곱게 보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둘째 열매는 희락입니다.
영어로는 JOY입니다. 단순한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써 기쁨입니다. 이런 때는 기쁘고, 저런 때는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내게 잘해주고, 못해주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기쁨은 소유나 지식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세상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기쁨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깨달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기쁩니다. 누가 이유를 묻는다면 정확히 꼬집어는 말할 수 없는데, 그냥 좋아 죽겠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맺게 하는 열매는 내 모든 감정을 사로잡는 기쁨입니다.
세번째 열매는 화평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마음이 평안할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이루어진 평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 와의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평안입니다. 저는 환자를 위해서 이러한 내용의 기도를 하곤 합니다. “건강할 때 얻지 못했던 신비로운 평안을 오히려 병든 가운데서 얻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습니다. 오히려 병들었을 때에, 어려울 때에, 신비로운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 걱정도 미련도 없는 순수한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사람과 화평하게 합니다.
가정이 화평하고 싶습니까? 간단합니다. 날마다 3번씩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자녀들 에게도“나는 너희들 때문에 행복하다. 너희들을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러면 피스 메이커(peace-maker)가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고 모든 관계 안에 평안을 주십니다.
네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잠간 참는 것은 쉽습니다. 오래 참음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소되어 버려서,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게 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미워하고 다시 참고 다시 고통을 느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내를 성령이 주십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스소톰은“인내”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복수할 힘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원수 갚을 수 있는 데 갚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는데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힘을 주셔서 평안하고 쉽게 참아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내,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섯번째 열매는 자비입니다.
자비,“크레스토테스(crhstovth")”라는 헬라어는 친절함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친절해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자연스럽게 친해집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누구나 만나든지 반가와 하고 친절함이 자연스럽게 유발됩니다.
여섯번째 열매는 양선입니다.
양선,“아가쏘수네(ajgaqwsuvnh)”라는 말은 자비에 비해 훨씬 능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라이트 푸트」라는 학자는“자비는 잠재적인 양선이요 양선은 현실적으로 힘을 내는 자비이다”라고 했습니다. 양선은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비를 의미합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선입니다.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베푸는 선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양선하신 분이십니다.
일곱째 열매는 충성입니다.
충성은 헬라어로“피스티스(pivsti")”입니다. 믿음이라고도 번역되는 데, 충성 신실 믿음은 헬라어로 다 똑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으로 충만 할 때에 신실성이 생기고, 성령으로 충만 할 때에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충성된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덟번째는 온유입니다.
온유,“프라우테스(prau?th")”는 길들여진 말을 의미합니다. 뻣뻣하고 거친 말이 아닙니다. 유들유들하고 잘 길들여진 온유한 말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매사에 너무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성령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그 고집이 꺾여 져야 합니다. 온유함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에 온유함이 실현되어 있습니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온유함입니다. 내 뜻이 엄연히 있지만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즐거움으로 따라가십니다. 이것이 온유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아홉번째는 절제입니다.
영어로는“셀프 컨트롤(Self-control)입니다. 자기 절제, 자기를 다스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내 욕심, 내 성격, 내 게으름, 내 명예심, 내 교만, - 나를 다스리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잠16:32 절에 보면“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자기 절제를 가능케 합니다.
지금까지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열매가 내 이격에 내 성품에 자연스럽게 맺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9가지 중에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습니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보이는 것이 없으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재충전해야 합니다. 새어나간 성령을 다시 채워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 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열 때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성령이 충만해 집니다. 성령이 완전히 나를 지배하시게 될 때에 나는 비로소 사랑의 사람, 희락의 사람, 화평의 사람, 오래 참음의 사람, 자비의 사람, 양선의 사람, 충성의 사람, 온유의 사람, 절제의 사람이 됩니다. 아무쪼록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본디 내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성령 이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하나,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 뿐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그 열매를 볼 것이다. 죄를 이실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고, 승리하게 될 것이다.“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