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1-16ㅣ김남수 목사]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길게 당부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과 이별한 후에,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여정을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① 1~6절은 밀레도에서 두로까지 ② 7~14절은 두로에서 가이샤랴까지 ③ 15~16절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경로를 밝히면서, 두로에서 제자들의 만류와 가이사랴에서 아가보의 예언 등 바울이 수난을 받을 것에 대한 예고가 특기할만합니다.
바울은 지금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13절에“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였노라”고 합니다. 그만큼 굳게 결심하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행할 때에 적어도 이만한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목숨이 하나뿐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확신이 없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정이 있고 난 다음에,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의 행위가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런 결정이 없이 그저 형편 되는 대로 가면서 당하는 대로 버리고, 그래 그저 살아가는 것은 끌려가는 인간답지도 못하고 인격답지도 못합니다. 더욱이 신앙의 길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결심하고, 온 정성과 전력, 전 생명을 다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실패란 무엇입니까? 결국 이렇게 마칠만한 가치가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을 하다가 이제 세월 다 지나간 다음에 와서 잘못 살았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 인생 되돌려 달라 할 수도 없고… 그게 바로 실패요,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순간순간 어느 때에든지, 젊었을 때에든지, 늙었을 때에든지, 어떤 사건에 접했든지 간에 할 만한 가치가 있는‘이것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하는 확신을 가지고 전력투구하는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점에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 이 사건을 놓고 바울은‘확실히 이것은 신앙의 길이다’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믿음,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이 길이 바른 길이라는 것, 또 복음전파 사명에 있어서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하는 것, 자기가 복음 전파하는 이것이 자기 목적이라는 것, 그는 갈 1장에서 자기가 복음전파를 위해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자기 존재 목적이요,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사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내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일이라 합니다. 이것이 합당한 길이라 바울은 믿고 있습니다. 행 20:24을 보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달려갈 길, 주 예수께서 맡은 사명, 이것을 감당함에 있어서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 것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일생을 두고 생각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있는 이 사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이 사건을 놓고,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에 합당하냐,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데 있어서 동일선상에 있는 사건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부딪힙니다.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 흔들리기 쉽습니다. 충성이란 말도 좋아요, 진실도 좋아요, 믿음도 좋아요, 그런데 그것의 현실적 의미를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라든가 하나님의 의라든가 하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생각하려고 할 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사람은 자기가 처한 처지 이대로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고민하신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자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 내일 아침 이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것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기도 후 받은 응답이 무엇입니까? 내일 아침 빌라도 법정에 나가서 재판을 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는 것이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아버지께서 십자가라는 잔을 오늘 내게 주신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실히 믿고, 그 응답을 받고 돌아와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기에 신앙의 구체적 현실성이 있습니다. 이제, 바울이 굳게 결심을 하고 떠납니다. 오늘 본문에 두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하나가 16절까지의 두로에서, 하나가 7-14절까지의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1~6절까지 보면, 3,4절에“두로에서 상륙하니 …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3, 4절)”라고 합니다. 물도 실어야 하고, 식량도 실어야 하고, 짐도 내리기도 하기 때문에 배가 가끔 항구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두로에 잠깐 머무는 동안, 바울은 본문에서 보는 대로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거기에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을 알아보아요. 그래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잠간 하루 이틀 머무는 동안에도 전도하면서 믿음생활 잘하라고 권면합니다. 밀레도에서도 밤늦게 설교하다가 다락에서 떨어진 유두고가 있었잖아요? 바울은 이렇게 기회 있는 대로 말씀을 전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우리도 이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행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기회만 있으면’, 사람만 만나면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가 생활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중의 이야기가 잠간 나옵니다. 다 같은 맥락입니다. 4절이나 12절에“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성령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 고 했다면 가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행 20:22~23절에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 여기서 해석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 하여금 결심을 굳게 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가지 말라 고 한 것은 아니에요. 저들이 핍박이 있으니 가지 말라 고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응용하느냐 해석하느냐 입니다. 사람들은 점쟁이에게 점을 해서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파기 위해서 굿을 하고 액막이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점하는 것과 같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누구보다도 성령이 충만합니다. 성령에 매임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핍박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 인줄 알고,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순종해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고 늘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 실제화 –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데, 이것을 현실적으로 이렇게 적용하고 현실화하느냐? 여기에 인간적인 불신앙이나, 인간적인 욕망이나 해석이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고 유념해야 합니다.
7~14절까지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면, 좀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빌립의 집에 들어가 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가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가가”(10절) 아가보는 선지자입니다. 오늘 보니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하나의 역할극으로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때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리라(11)”고 실제적으로 말씀합니다. 결론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12)”입니다. 권면,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기다린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고 “올라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 인정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이 올라가지 말라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사건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눅 9:51에 보면, “예수께서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굳게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 어떤 결심이냐 … 이번에 올라가서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그런 각오입니다. 또 지금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셔서 십자가가 앞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고, 그리고 결심을 굳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핍박 저런 핍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르고 간 것이 아닙니다. 알고 갔고, 알고 당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고난의 의미인 것입니다. 어쩌다 죽을 수 있고, 어쩌다 순교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런 것은 진정한 순교라고 볼 수 없어요. 이렇게 미리 다 알고 결심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고,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예수님은 나약하다’, 하고‘이해할 수 없다, 능력이 없는가 보다’ 라고 할 수 있어요.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서 진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응하겠느냐, 나는 십자가를 지노라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얼마나 바보 스럽습니까? 얼마나 믿음도 없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이 오해를 다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 받아들이므로 감수하신 십자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마 16: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예고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말씀하신 후에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핍박을 받고 죽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한 마디 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하고 만류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 고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마 16:23) 베드로가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하시며 사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따로 없어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단입니다. 베드로가 갑자기 사단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도 인정하고, 메시야 됨도 인정하지만, 십자가를 부정하고 있어요. 그런고로 그는 사단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곧 이어 예수님께서 해석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십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내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벗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 한마디 안하고 있으면 바보가 되는데 내가 바보가 안 되려고 하는 순간에 사단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바보가 되어도 좋고, 무능한 사람이 되어도 좋고, 어리석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의를 위하여, 자기 명예를 위하여, 자기 자존심을 위하여 십자가를 벗어버리려고 하는 순간 사단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나 자신의 일만 생각하는 순간에 그렇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사단이 유혹을 합니다.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사단이 유혹합니다. 유혹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조금 비껴가면 되지 않느냐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로마로 바로 가면 되지 않느냐. 구제금은 디모데 손에 예루살렘에 보내주고, 너는 로마로 가라. 왜 위험한 일을 네가 맡으려고 하느냐, 비껴가라, 피하라 - 어떻습니까? 위험한 일은 내가 당해야지, 남에게 당하게 할 수 있어요? 위험한 일이라면 내가 당해야 해요. 위험한 일일수록 내가 하고,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지요. 위험한 일이 있다면 내가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비껴가고 피하겠다. 안 될 말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 없는 믿음을 향해서 베드로를 향해서 사단이라고 엄하게 꾸짖으셨는데, 이에 비하면 바울은 그래도 유순한 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아주 얌전하게 말씀합니다. 13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물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사단아 물러가라, 하는 것 보다 훨씬 부드럽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 왜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느냐는 것 이지요. 이미 바울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요. 여러분, 감상적인 눈물,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 고 하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지 말라 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바울은 여기서‘사단아 물러가라’ 할 수 있지마는 다만 어찌하여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쓸데없는 눈물 흘리지 말라 할 정도하고 맙니다. 그 같은 감상적인 눈물이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13절에 “...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예루살렘에 가서 죽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은 로마로 가서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못가도 좋다, 예루살렘에서 죽어도 좋다, 그래도 가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로마에 못 가도 좋고, 더 큰 일 못해도 괜찮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포부와 생각은 많지만 그것 다 못해도 괜찮다. 오늘 내게 맡겨진 내 몫의 십자가, 예루살렘에 가는 일, 거기서 끝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앞으로 더 큰일을 하겠다며 현재의 일은 등한시 합니다. 하나님의 일 굉장한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내게 맡겨진 내 몫의 십자가를 피하려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꼭 그렇게 해야 될 큰 일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하였노라”- 눈물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참 좋습니다. 바울이 자기네들의 권면을 받지 아니하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까? 이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쳤습니다. 더 이상 권면하면 안 돼요. 더 이상 권면하면 바울이‘사단아 물러가라’했을지도 몰라요. 또 그래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굳은 결심을 보고 저들은 더 이상 권면을 하지 않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뜻대로”- 이것이 결론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이 불굴의 결심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어진 현실 사명에 헌신하고, 또 내 앞에 있는 이 사건, 이 작은 일 앞에 충성을 다 하는데 생명을 거는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같은 생이 우리에게도 이어져야 할 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