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27-36ㅣ김남수 목사]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례를 행한 후 곧 바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로마 군인에게 인계되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체포하고 죽이려 할 때, 로마 군인들이 그를 구출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의 죄악성이 도 한 번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메시야를 죽인 유대인들은 이제, 또 그 메시야의 전도자를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죄성, 거룩한 성시 예루살렘의 모순성을 본문에서 봅니다.
본문 27절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사도 바울의 체포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가 체포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바울을 죽여야 됩니까? 저가 죽어야 내가 편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없어져야 편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것이 역사의 최대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의인이 세상에 있다고 안 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의인이 핍박을 받습니다. 왜 사람들이 의인을 그대로 두고 지낼 수 없는가? 그들과 공존할 수 없는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또한 이를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일이 순리대로 편안하게, 무사하게, 그렇게 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성전 밖으로 쫓겨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성전 출입이 됩니다. 그는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예루살렘에 돌아오면 반드시 유대 사람으로써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지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로 지금, 예배드리는 현장에서 잡혀 끌려 나옵니다.
30절에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하나님의 종이 성전에서 끌려나오고 그 큰 성전 문이 쾅하고 닫힌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이요, 세상사입니다. 사도바울이나, 감독인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모두 바울이 무사하기를, 체포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여기 있는 동안에는 무사하기를, 다시는 피 흘림 같은 것이 없었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여론이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오기만 하면 무슨 음모와 무슨 계책을 꾸며서라도, 저를 없애겠다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야고보가 미리 손을 쓴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지금 많은 오해를 받고 있으니,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 주고, 제사를 드리고, 며칠 동안 성전에서 회개하고, 이방에 돌아다니면서 이방사람들과 같이 지내던 중에 실수하고, 율법에 어긋난 것이 있다고 저들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으로 치고, 결례를 행하자 -그래서 바울이 편하고 무사하도록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울은 결례가 끝남과 함께 체포되었으니까요. 아무튼 사도들은 바울이 무사하기를, 그래서 이방에 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고, 힘쓰고,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결국은 예상했던 대로 바울은 체포됩니다. 그것이 오늘이 본문 내용입니다.
분명히 로마 사람들에게 체포되어서 로마까지 압송되는데, 그 과정이 모순적입니다. 한 마디로, 로마 군인이 바울을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까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로마 군인들이 부득불 체포했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증거하고 있는 본문의 사건 내용입니다.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7절에서 보는 대로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소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곳마다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핍박했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렇게까지 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강의하면서 사도바울이 핍박받았던 상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로마사람들 때문에 바울이 핍박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은 거의가 유대인들로부터 받았습니다. 유대의 장로들이 핍박을 했고, 회당장들이 핍박을 했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핍박을 했습니다. 왜 핍박을 했느냐? 그 문제는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마는 사도행전 끝 부분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바로 시기와 질투 때문인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 신앙이고 뭐고 보이는 것이 없어요. 아주 꽉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 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을 죽여야한다. 참 무섭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이와 정 반대입니다. 남을 살려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아내가 기뻐해야 나도 기쁘고, 남편이 기뻐해야 나도 기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대의 기를 죽여 놓아야 자기가 사는 줄로 압니다. 못된 성미이지요. 이런 사람은 교회를 나와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남을 꺾고, 무슨 말이나 농담을 해도 핀잔을 줘서 남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 놓고 저는 좋아 합니다. 남을 낮춰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 압니다. 이런 사람은 중생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비뚤어졌습니다.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매 일반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살겠다’ 하는 못된 마음보가 있어요. 지금까지는 자기네가 거침없이 마음대로 지배해 왔어요. 교회에서 존경도 받고, 회당장도 되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외치니까 백성들이 다 그리로 갑니다. 그러니 자기네들은 뭐가 됩니까? 그래서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시기 질투가 작용하는가 싶으면 그 뒤에 사단이 있는 것으로 아세요. 예수 믿는 사람을 시험하는 데에는 이 시기 질투가 마지막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바울을 꼭 죽여야 된다. 바울을 죽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시기 질투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을 없애야 자기네가 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의 죄목은
첫째, 반 유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못할 짓을 했다. 유대 사람이 왜 이방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느냐-이것이 저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입니다.
둘째, 반 율법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는 가하면, 할례문제에서도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통과 규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반 율법적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그가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이 들어 갈 수 없는 성전에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으니, 성전을 더럽혔다고, 그러니까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들 합니다. 상전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서 바울 같은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디가지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는 사실 시기, 질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29, 30절에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저들이 오해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한 일이 없어요. 이방 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이방사람과 같이 시내에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 간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가 왜 문제가 됩니까?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을 때에는 오해가 있더라도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그치겠지만, 악의에 찬 사람이 뒤에서 정말로 사건을 만들고 있으면 이렇게 일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는 대로 뭇사람이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소동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여론에 의해 재판하고, 군중심리에 의해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기네가 죽인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죽인 것처럼 일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대개 독재하는 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뜻인데도 백성의 뜻이라고 둘러대고,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공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을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생각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31-34절에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자, 이대로 두면 바울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스데반처럼 돌로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고, 로마 백부장과 천부장을 보내어 보호하십니다. 백부장과 천부장이 오니까 흥분한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다가 멈추었습니다. 왜 멈추었느냐? - 만일 천부장이 보는데서 돌로 쳐 죽였다면, 그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돌을 든 사람이나 처형을 한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법이 행사되는 곳이므로 저들을 죽이려는 행동을 멈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됩니다. 하지만 로마 군인들이, 백부장과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하려고 체포한 것이 아니예요. 그냥 놓아두면 바울이 맞아 죽으니까 살인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소위 인명과 질서를 위해서,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체포합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2년 동안 재판도 없이 가이사랴에 가두어 둡니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갑니다. 바울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로마에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긴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는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체포될 때에 왜 체포되었는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왜 그렇게 갇혀 있어야 됐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갑니다.
그곳에서 얼마를 지내고 나서야 바울은 중요한 말씀을 한 마디 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빌 1:12)” “나의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갇혀 지내는 그 파란을 겪으면서 로마까지 왔고,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당한 일, 이 많은 고통과 긴긴 기간, 이것은 잘못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유익했다. 이것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유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고, 제사장의 군사에 의해 체포되시고, 그리고 빌라도 법정을 거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 사람의 시기 질투 때문에 부득불 죽을 수밖에 없었다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악이요, 그리고 흑암의 권세의 시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침묵이 있습니다.
흔히들 이럴 때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십니까?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합니까?― 이것이 인간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엄청난 역사를 경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제 끝났다, 속수무책이다, 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새로운 기회를 만드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십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도 목회하면서 편안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느 때인가 참으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해서 굉장히 낙심하고 있었는데, 한 교인의 부탁으로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집은 농가집인데 마당에 울타리가 있고, 담장이 있고, 소가 몇 마리 있습니다. 보아하니, 소가 담장에 갇혀 가지고 고개를 번쩍 쳐들고, 저 멀리 있는 초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곳에 가서 풀을 뜯어 먹고 싶지만 담장에 갇혀 있으니까 가지는 못하고, 그저 고개를 쳐 든 채 마냥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소가 왜 저렇게 고개를 쳐들고 있소?” 그는 대답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담장을 뚫을 수도 없고, 넘어갈 수도 없으니, 그저 바라보기만 하다가, 언젠가 주인이 문을 열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펄전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나는 여기에 갇혀 있지만 지금은 고개를 들고 저 푸른 초원, 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기다림입니다.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내 뜻대로만 안 되고, 모순과 부조리 투성이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만은 항상 저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오늘 내가 당한 일에 체포되든지 감옥에 갇히든지, 혹은 죽든지 살든지 간에 더 이상 불만을 터뜨려서는 안 됩니다. 그야말로 찬송가 가사 대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면 살게 하시고,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죽게 해 주세요. 상관없습니다. 해야 할 것입니다. 부득불 이러한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행동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묵묵히 기다리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기다리는 일 밖에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러할 때에 낙심하지 말 것이고,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믿고, 조용히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깨달으면 깨닫는 대로 감사하고, 깨달음이 없으면 그대로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 알 수도 있지만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다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저 잘 될 줄로 믿고 얼마까지라도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통해 들려주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통해 홍해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옵니다. 죄. 우에는 절벽입니다. 이제는 갈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들로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입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행동할 것이니, 너희는 조용히 기다리라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바로 그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기다림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모순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당했던 이 귀한 진리를 상고해 보세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이것이 절대로 버려진 현실이다.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에 하나님의 또 다른 창조적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