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1-21 ㅣ김남수목사]
예루살렘 총회는 바울 사도의 제1차와 제2차 세계전도 여행의 중간에 삽화적인 내용입니다. 복음이 정비되면서 마침내 기독교가 세계적인 교회로 문을 열고 발전하게 되는 비약이 이 총회로부터 이루어지는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본래의 발단은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의 성공에 자극되어, 유대인 신자가 이방인 신자까지도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있습니다. 이 총회의 결정에 따라“오직 믿음으로 (sola fide)”구원을 받는, 기독교의 중요한 기본교리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대회의 제1회가 된 셈입니다. 이 대회는 사도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는 그 사이에 열린 것으로, 1차 전도여행 때 생긴 문제를 예루살렘 본 교회에 돌아와 사도들과 함께 의논하여 대책을 세워 가지고, 다시 제2차 전도여행에 오른 것입니다. 예루살렘 총회의 내용을 다룬 15장의 내용은 I. 문제의 제기(1-5절) II.회의(6-29절) 1. 베드로의 발언(6-11절) 2. 바울의 선교보고(12절) 3. 야고보의 발언(13-21절) 4. 결의(22-29절) III. 전달(30-35절) IV. 바울과 바나바의 이별(36-41절) 등 입니다.
I. 문제의 제기(1-5절)
1, 2절에“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 하니라.”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여행의 성공에 자극되어 유대인들은 반발을 일으켰는데, 이방인도 구원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될 때, 순수한 복음이 전파되지마는 맨 처음 복음이 전파될 때 히브리적 헬라적 문화형태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인지라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부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 보니 틀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히브리적 문화권 속에서 생각했는데, 이제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보니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는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의 종교문화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독교의 본질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는 것을 당연한 줄로 알았는데, 다른 나라의 할례 안 받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에 그들도 모두 마땅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도 할례 받고 예수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유대종교로 남아 있느냐, 아니면 세계종교가 될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의 풍속과 문화 속에 그대로 매이게 되면, 기독교가 유대종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을 타파하여 개혁하고 나오면,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독교는 세계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총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비약하게 됩니다.
3절에“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다 하니 듣는 사람마다 다 좋아하는데, 바리새인적인 율법주의자들만 싫어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복음을 전하고 현장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믿고 구원 받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잘 났든 못 났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감격스러운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대 바리새인들은 할례 안 받는 이방인이 구원 받았다 하니 이를 아주 싫어합니다. 자기문화를 고집하므로 장벽을 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복음의 문이 제대로 열릴 것입니다. 문화나 생활양식에 대해서는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에야 복음의 문이 제댈고 열릴 것입니다.
II. 회의(6-29절)
1. 베드로의 발언(6-11절)
세계 기독교 총회가 드디어 모였습니다. 회원은 온 교인이었고, 의장은 야고보였으며, 토론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였습니다. 베드로가 첫 발언자로 일어섰습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중심인물이었으며, 그의 발언은 권위가 있었고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할례자의 사도인 그가 바리새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바울의 의견을 두둔함으로 오히려 결정적 권위를 주었던 것입니다.
6절에“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같은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 많은 토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말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주제를 토론할 때, 모두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한다면 하나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요, 진리요, 하지마는 속은 그게 아닙니다. 속이 달라요. 서로 기득권을 보존하겠다는 뜻이요, 자기 명예와 지위를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더 나쁜 것은 시기 질투가 속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악이 숨어 있기 때문에 하나가 못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가 못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문화적인 요소를 추월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고 전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없는 토론이 벌어집니다. 마침내 베드로가 일어나 저들 앞에서 아주 담대하게 사도적 권위로 체험적 신앙을 간증하게 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베드로의 말씀은 딱 두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그 하나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에 대한 베드로 자신의 경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았고, 확실하게 경험했다고 밝힙니다. 그 둘은, 하나님께서는 앞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모르고, 할례를 안 받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 믿고, 벌써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딴 소리냐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서 이미 그렇게 역사하셨다.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고 있을 뿐 입니다.
베드로는 사마리아에도 가고, 고넬료의 집에도 가고, 욥바도 가고, 하는 사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긴긴 시간 피부적으로 체험하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부를 논해서는 안 된다. 이방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이방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할례와 관계없이 구원하시는데, 누가 이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라고 베드로는 자신의 입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불학무식한 나를 택하사 성령 충만하여 설교할 때, 3000명이 주께로 돌아와 구원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마리아에도 가서 기도하니 성령 받고, 고넬료 집에 가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니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나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성령을 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에“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성령이 아니고는 말씀을 들을 사람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말씀을 듣고, 마음 문을 열고 구원받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고, 믿게 하셨다고, 체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좀 더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9절에“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합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그랬고, 가이사랴에서도 그랬고, 안디옥에서도 그랬고, 하나님께서 차별을 아니 하시는 데 누가 차별할 것이냐 11절에“동일하게”곧 같은 식으로 할례 받은 사람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할례 안 받는 사람에게도, 같은 식으로 역사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거늘 이제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사랑 안에서 구원 받을 뿐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하지 말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역사하시고 계신 것을 내가 현장에서 보았다.
선교현장에서 확실히 경험했다고, 베드로는 현장에서 일어 난 사실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에“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하나님께서 이미 이방사람들을 구원하셨다면, 여기에 왜 이의를 제기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왜 반기를 드느냐,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그리고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는 멍에(율법)로 속박하려느냐. 율법을 통해서 바르게 진실하게 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죽이는 법이다 라고 하며, 율법을 통해서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완전해져서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서 힘써 주의 뜻을 이뤄나가되, 구원문제에 관한 한 절대로 내 의로 내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아예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메지 못하는 멍에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메지 못하는 멍에를 어찌하여 믿는 이방 제자들에게 요구하느냐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 받으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 입니다.
2.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보고(12절)
베드로와 야고보의 발언 중간에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보고가 주어졌습니다.
회의의 결정에 있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실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2절에“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원래 문제의 발단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에 복종하여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러한 사실에 반대하여 선교현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간증함으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 없이 순수한 복음만을 설교한 것을 인정하여, 이방인들 사이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영광스러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므로 복음의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한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비난하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구원받도록 하셨으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방인들을 율법 아래 억압하려 하느냐 합니다.
회의의 참석자들이“온 무리가 조용히 하여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들었습니다.”
자연과학이나 의학에서 실험이 제일 신빙성이 있듯이,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서 가장 은혜롭게 여겨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사실 간증인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간증함으로 베드로가 한 말을 보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오직 믿음에 의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병을 고치시며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은사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3. 야고보의 발언(13-21절)
베드로의 발언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보고에 이어, 마지막 발언자는 야고보였습니다. 이 총회 의장으로 보이는 그의 발언은 종합적이면서 결론적이었습니다.
13절에“말을 마치매”, 베드로와 바울의 말을 자세히 잘 듣고, 그들이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말을 합니다. 14절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가 관심 있게 들은 말은 이것입니다.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지지를 받으려고 정치인들처럼 이벤트 식으로 한다면 참 지도자가 아닙니다. 참 지도자인 야고보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를 깊이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고, 이 역사가 성경의 어느 대목과 합한 것인가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야고보는 아모스 9:11, 12절을 생각합니다. 본문 16절에“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구약에 주어진 말씀이 오늘 여기에 응했다는 확증을 얻은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객관적인 진리가 확증해 주지 않으면, 나의 주관적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확증을 얻고 나서 야고보는 19절에“그러므로 내 의견에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 성경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내 생각입니다. 야고보는 아주 지혜롭습니다. 신앙문제와 문화문제를 구별합니다. 신앙문제와 구원문제는 절대적입니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불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문화문제, 생활양식의 문제는 양보할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문제에 대해서는 확고부동한 바울의 편을 들고, 문화 문제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편을 많이 들어 주어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좀 풀어주려 한 것 같습니다. 곧 중용을 취하게 되어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무엇을 금했나요? 20절에“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첫 번째는, 우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하라 했습니다. 우상이 제물을 먹습니까?
한 점도 못 먹어요. 제물은 사람이 먹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우상에게 제물을 바쳐 놓고는 그걸 시장에 갖다 팔기도 하고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장바닥에는 온통 우상제물 투성인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인 줄 알면서 먹으면, 마음이 꺼림칙하고, 소화도 잘 안되고, 안 믿는 사람이 보면 우상을 섬긴다고 손가락질 받기도 합니다. 그럼으로 우상제물을 먹는 것을 그만 하는 게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음행을 삼가라 합니다. 여기서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이니크」라고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우상숭배의 의식 중에 간음이 있습니다. 특별히 다이아나 신전 같은 데는 3000 명의 창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의 제사지내는 종교의식이 창녀들과 관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므로 종교의식과 음행이라고 하는 말이 직결된 말입니다.
세 번째는, 목매어 죽인 짐승을 먹지 말라. 레위기 17:13-14절이나 신12:16-23에 보면, 목매어 죽인 짐승을 먹어서는 안 된다 합니다. 이유는 목매어 죽이면 피가 빠지지 않았어요. 피는 생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피가 빠지지 않는 짐승을 먹는 것은 금기인 것입니다. 또한, 이방 사람들은 제사의식 중에 소나 양을 죽인 피를 마셨습니다. 그런고로 피는 종교문화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를 21절에“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여기서 암시된 것은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이나 이스라엘의 풍속을 상당 부분 배워가지고“이런 것은 나쁜 것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고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우상적인 종교의식 행위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9절에“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우냐, 그런고로 이런 저런 제약으로 피곤하게 만들거나, 장애물을 놓지 말라.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교회의 문턱을 높이거나 장애물로 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이치는 간단합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하다. 생활은 차차 고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니 괴롭게 하지 마라. 그런고로 신앙문제와 문화문제는 구별해야 되고,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신앙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