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17-26ㅣ김남수 목사]
드디어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교회는 그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바울이 율법을 각처에서 폐기하였다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세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권하여 구약의 율법대로 결례를 행하여 준행하게 하였으며, 바울은 권유대로 타협하여 이행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제 5차 예루살렘 방문이요, 그의 최후 방문이었습니다.
17절에“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형제들이 와서 저들을 기쁘게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지칭이 첫째가‘그리스도인’이요, 둘째가‘제자’요, 셋째가‘형제’입니다. 이런 상식을 가지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또‘제자’란 예수님을 배워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금 많은 훈련을 받고 있다는‘제자도’라는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형제’입니다. 이 말은 초대교회에서 상당기간 쓰입니다. 오늘날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형제입니다. 특별히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은 형제라고 부르는 데는 보다 더 높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 다 같이 예수님을 섬긴다는 입장에서 똑같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같은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 있고, 다른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능적으로 볼 때에는 집사요, 장로요, 목사요, 이렇게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다 똑같습니다. 같은 것을 극대화하고 다른 것을 극소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부 즉 남녀가 삽니다. 남녀가 다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육체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마음도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작은 것이고, 같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같은 영입니다. 같은 것은 극대화하고, 다른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사람은 같은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다른 것만 내세웁니다. 나는 남자다 너는 여자다, 자꾸 이렇게 차별을 합니다. 다르다 다르다. 합니다. 사실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몇 가지만 다른 것이 있어요. 그러나 같은 것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이고 큰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저들이 바울을 부를 때에‘형제여’라고 부릅니다. 그리니까 형제라는 입장에서 똑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이나, 유대인을 전도하는 사람이나, 이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말하면 베드로나, 바울이나, 야고보나, 요한이나, 다 형제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 바울이 먼저‘야고보’를 만났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1대 감독이었고 예수님과 동생이며 30년 동안 감독으로 일하다가 마지막에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맨 먼저 만난 사람이 야고보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요 제1 교회이기에 저를 만나게 됩니다. 사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세계를 다니면서 설교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적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 가서도 보고를 합니다마는 특별히 맨 처음 교회되는 예루살렘 교회에 와서도 교회의 감독되는 야고보에게 와서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이요 공동체 의식을 바로 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역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이 점에서 바울이 위대합니다. 이와 같이 사실은 교회의 공동체성, 교회의 유기성, 혹은 거룩한 교회, 하나됨의 교회를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교회가 있고 바울의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 그리스도의 교회요 하나의 교회입니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은“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내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 몇 사람이 믿고, 내가 몇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내가 어느 교회를 세우고, … ”이렇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습니다. 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는 없어요. 하나님께서 몸소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 하나님께서 놀랍게 이루신 일, 이것들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되어 진 사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하나님이 하신 일’을 야고보에게 낱낱이 고했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보고 내용은‘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입니다. 나를 통하여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봉사생활 나의 수고 나의 봉사를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알 것은 즉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나의 입을 통하여 나의 설교를 통하여, 그리고 내 지혜를 통하여 내가 뿌린 눈물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내가 당한 많은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것뿐입니다. 그 시작도 그 과정도 그 결과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요, 나는 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봉사하는 것은 별것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만이 큰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의 봉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을에 농사를 다 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곡식을 주셨다고 우리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쌀가마를 떨어뜨려 주신 것은 아니에요. 분명히 우리가 수고했어요. 씨를 뿌리고 땀을 흘렸고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고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해 주셔서 우리가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내가 하는 수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해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많은 고생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봉사와 수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일을 이루셨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봉사와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눈물과 내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 내 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께 내 노력이 필요하고 하나님께 내 희생이 필요하고 하나님께 내 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즐거이 바치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이것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못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렇게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보니, 바울이 이방가운데서 역사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이방 사람을 일단 유대 사람으로 개종해 가지고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은 이방 사람대로 나름의 문화권에서 그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요나서라든가 룻기라든가 혹은 창세기 12장 등 여러 곳에 특별히 선지서에 이방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이방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예수 믿고 그리스도께 돌아왔다 하는 보고를 듣고“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20절)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의 편견으로 볼 때는 별로 달갑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예수인데 쓸데없이 이방사람이 많이 믿어가지고 이 야단인가, 꼭 돌아다니면서 전도해야 되는가? -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방 사람들이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 받는 것 중요해요. 여러분이 잘 사는 것 중요해요. 여러분 자녀가 잘되는 것 중요해요. 그러나 여러분 마음속에 정말 기쁨이 되는 것은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그 누군가가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좋은 것이 없고 그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구원받은 것 못지않게 항상 소중히 여기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본문에 “그들이 듣고 ... 이르되”(20절)라고 나옵니다. ‘그들’은 야고보와 장로들이었고, ‘이르되’ 아마도 장로들의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20절)― 여기에 문제가 됩니다.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좀 더 설명을 하자면, 이 사람들은 아직 유대교에 매여 있습니다. 본문은 간단하게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20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치가 아픈 것예요. 야고보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 고집 때문에 예수 믿으나 아직도 유대교에 열성이 있어서 유대교에 매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할례를 소중히 여기고 안식일을 소중히 여기고 율법을 소중히 여깁니다. 극단적인 유대교에 집착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 오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대로 라면 기독교는 우대교의 한 분파에 그칠 뿐이에요. 세계적인 교회가, 종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바울이 만방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계적 종교가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바울의 역사는 그러한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적 이미지에서 기독교적, 좀 더 나아가 세계 종교적 이미지로 바꾸는 그 큰 역사를 바울이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수만 명의 유대교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는 꼭 받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오해가 있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21절) - 이것은 오해입니다. 유대 사람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이방 사람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바울은 분명히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가 어디선가 어떻게 잘못되어서 유대 사람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수만 명의 유대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이 나서서 이 수만 명의 고집스러운 유대인들을 설득시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지, 유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 이러 이러하다고 설득하고 가르쳐야겠는데 시간이 없어요. 언젠가는 오해가 다 밝혀지고 알아들을 때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해요. 편견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어요. 하지만 수만 명의 유대인들을 설득시키기에는 어렵고 해서, 일단 바울 한 사람을 설득시켜 타협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야고보와 예루살렘 장로들이 내 놓은 대책입니다. 여러분 한 번 오해 한 것을 푸는 것이 그렇게 쉽습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모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슨 말로 해결이 됩니까? 바울이 말한다고 됩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한 마디로 어디 됩니까? 더욱이 수만 명을 움직이는 데는 적지 않는 시간이 거립니다. 그런고로 당장은 바울 자신을 돌려놓으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수만 명의 마음의 오해를 푼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지금 당장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판인데, 이런 사람들을 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런고로‘바울, 당신이 양보하시오. 그렇게 안 해도 될 일이지만 참고 이렇게 해 주세요’하고 타협안을 내 놓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23, 24절)”- 나실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원한 사람이 몇 있는데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머리를 깎고 거기서 결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방에 다니면서 만일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고 율법에 어긋난 일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유대 사람이 되려고 할 때에는 회개의 뜻으로 결례의 기간을 가지는데, 최소한 성전에서 7일 동안 머무릅니다. 그리고 30일간은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동안에 잘 못한 것을 다 회개하고 씻어 버리고 그 다음부터 당당하게 같은 유대인들 속에 들어가서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속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더러 그 예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오해가 풀어질 것 같고, 당신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알 것 같소‘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잘못한 것 없으나 일단 잘못한 것으로 해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에게는 참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평화롭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은혜 될 것이라고 하기에 바울은 양보합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한 치 양보가 없는 바울입니다. 갈 1장에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할 만큼 그는 털끝만큼도 양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윤리 문제나 혹은 생활 문제나 의식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넓게 양보를 합니다. 내가 양보해서 내가 죄인이 되어서 내가 누명을 써서 전체가 평안할 수가 있다면 그렇게 하지요. 하는 마음입니다. 대단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양보합니다. 타협입니다.
그는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여기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 23)”-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참여한 자로서 이만한 누명을 쓴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옳다고 한다고 옳은 일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엄청난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협이라기보다는 양보입니다. 양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에 참예하는 충성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쪼록 몇 몇 사람을 구원하고, 아무쪼록 교회를 평화롭게 하고, 아무쪼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 때문에‘이 정도 양보해야 된다면 양보하시오’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양보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 타협을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오해를 푸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여러분 당장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차라리 누명을 쓰세요. 억울함을 당하세요. 그리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세요. 언젠가는 백일하에 공의가 진리가 바른 일이 높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삶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