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7-47, 11-24:26, 13:1-3ㅣ김남수 목사]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르고 높은 이상을 품고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앙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이상적인 교회 상, 이상적인 교인 상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라야 이상적 교회라 할 수 있으며, 어떤 교인이라야 이상적 교인이라 이상적 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교회 상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초대교인들-예수님의 살아계심을 피부로 느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고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야말로 이상적인 교회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두 개의 참 모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교회요, 하나는 안디옥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체교회 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 따라 유대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한편 안디옥교회는 그와 반대적으로 당시 로마의 3대 도시의 하나인 이방 안디옥에 세워진 이방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나 흩어진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스에게 “다가오는 미래에 가장 큰 위험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중생 없는 용서를 말하는 철학적 기독교,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이요, 성령이 없는 종교, 지옥이 없는 천국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스의 말대로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참 교회의 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세계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여주신 두 모델교회인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로 돌아가서 교회의 참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이 두 교회의 특징들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그 교회의 특징들은 오늘 우리가 이상적인 교회를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건물은 “예배당” 이라는 이름이 더 바른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건물만을 교회라 할 수 없듯이 “사람이 모이는 곳이 교회다”라는 생각도 착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종교단체로서의 조직체, 이러한 행정기구나 구조를 가리켜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혹은 “사람들이 서로 친교하고 구제하고 사랑하고 봉사하면 이것이 교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 교회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참 교회의 모습
교회의 근본은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교회입니다. 목장교회도 몸의 세포와 같이 적은 수가 모인 모임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들 중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목장교회도 적은 수가 모였지만 그리스도께서 모임 가운데 임재 하여 계신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란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인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DNA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으면 교회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고 하는데, 교회가 교회된다는 게 무슨 의미 입니까?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해 계실 때 교회가 교회됩니다.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셔서 역사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지금 신약교회 시대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강림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속에 계십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느냐?-그 존재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성령입니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성령이 위로 자가 되시고 해석자가 되십니다. 성령의 다른 명칭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계셔서 증거 하시고, 현존하실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내가 만남의 관계를 이루고, 신비로운 생명의 관계를 이룰 때, 바로 거기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중생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거기에 중생의 신비로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역사, 즉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역사가 나타날 때, 거기에 교회가 존재 합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는 ?부스?의 말처럼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많습니다. 중생이 없는 교회의 행사들도 많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말씀의 역사가 있는 바로 그 현장에 교회됨의 의미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여 집사님의 신앙 간증을 들은 것이 기억납니다. 그 분 간증이 교회 나온 지 15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나오기 시작 할 때에 가장 어려운 것은 졸음이었다고 합니다. 예배시간에 왜 그렇게 졸리는지, 졸지 않으려고 무던 애를 썼다고 합니다. 둘째로 어려운 것은 어쩌다 목사남의 말씀을 들어도 이 말씀은 남편이 들어야 하는 데, 이 말씀은 시어머니한테 꼭 맞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잘 들었다가 아이들한테 해 줘야지-이런 생각만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 집사님이 중생을 체험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말씀마다 모두 내게 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내가 잘못했고, 내가 회개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토록 나를 정확히 아실까, 어쩌면 이렇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실까 하고 모든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드리다 보니, 이제 졸리지도 않고 지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새롭게 믿게 되고,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게 되었다고 즐거운 간증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 중생한 사람들의 모임이 참 교회입니다.
Ⅱ. 이상적인 모체 예루살렘 교회
모체인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강림으로 탄생했습니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던 일을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행2:43에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기사는 헬라어로 “테라스(tevra")”이고, 표적은 “세매이온(shmei'on)”인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사”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사건이며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고, “표적”이라는 것은 신령한 진리, 신령한 어떤 내용이 오늘의 현실로 나타났다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기사와 표적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육체적인 기사인데 앉은뱅이가 걷고, 장님이 눈을 뜨고, 병자들이 안수 받고 나았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기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 장성 집사님 아버지께서 82세인데, 장기다발성부전과 뇌출혈로 삼성병원 주치의가 아주 어렵다고 절망적인 말을 했는데, 김대중 대통령도 이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천집사님 아버지께서 이제 패혈증의 진균도 더 이상 검출되지 않고, 인지능력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회복되고 있고, 따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언어능력도 회복되고 있으며, 오른쪽 마비도 어느 정도 풀려 움직이는 치유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은, 육체의 치유보다 큰 기적은 사람의 내면적 생명 속에 나타난 중생의 기적입니다. 여러분! 육신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가 낫는 것, 이것도 큰 기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기적은 속사람의 내면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 이것 또한 큰 기적인 것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사람하나 바로 되기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이적 중에서도 가장 큰 이적은 중생이라는 이적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것이 이적 중의 이적이라는 말입니다.
신체에 나타난 이적, 내면적인 중생의 이적, 다음으로 세 번째 이적은 사회에 나타난 이적입니다. 중생의 역사가 사회적으로 나타나 실현되면서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인간관계, 이상적 사회, 이상적 교회 상을 이루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 43절을 보십시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신령하고 경건한 두려움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두려움은 그리스도의 임재의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 살아계시다”라고 하는 회개하는 심령의 자기고백 입니다.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역사 앞에 저들은 두려움으로 대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기적이 많았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사람이 깨끗해졌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다가 그 앞에서 벙어리가 된 사람도 있었고, 장님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땅을 팔고 보니 돈이 너무 아까웠던 모양입니다. 아나니아가 반을 감추고 반만 가져다가 바칩니다. 이를 보고 베드로가 “어찌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느냐”라고 한마디 하자 그대로 죽어버렸습니다. 또 삽비라가 들어오는 데 남편한테 일어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땅 판값이 이것뿐이냐?” “예 이뿐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함께 꾀하며 주의 영을 시험하려 했느냐?” 베드로가 이 말을 하자 삽비라도 죽어버렸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함부로 거짓말하고, 함부로 권모술수를 쓰고,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이러한 영적분위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 교회가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가니까 하나님의 눈을 상징한다고 하는 커다란 둥근 등을 만들어 예배 실 정면 천장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눈앞에 앉아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보고 계신다. 이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예배드리자 해서 그런 상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보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의 생각,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임재를 가까이 느끼며 신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건이란 원래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은 죄 때문도 아니요 심판 때문도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임재의식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얻어지는 두려움입니다.
또한 초대교인들은 성령의 은혜가운데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었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했지만, 다시 갈릴리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찾아 가셔서 원인을 분석해 말씀을 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랑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생산성이 제로입니다. 비생산적입니다. 사랑으로서만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도 성령이 아니면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마음이 열리고 이기심이 사라지고 벽이 무너집니다. 이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가를 알게 되고, 필요한 바를 줄 수 있는 힘, 그 용기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Ⅲ.핍박 속에 세워진 이상적인 안디옥교회
안디옥교회는 환란과 핍박 속에 세워졌으니 만큼 시작부터 순수한 복음, 순수한 진리, 깨끗한 신앙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에 대하여 기억해야 될 점은 이 교회가 성령에 의하여 주도되는 교회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행11:24이나 13:2절 등 곳곳에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를 섬겨(13:2)”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헬라어 원문은 “예배”라는 뜻입니다. 금식하며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말씀하시고, 성령이 예언하시고, 성령이 충만한 삶으로 해서 이 교회가 교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강습소 같은 곳이거나 봉사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이 계셔서 교회입니다. 흔히들 교회를 사람들이 모여서 친교 하는 곳으로 착각하지만,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므로 우리는 사람을 마나는 것 같아도 결국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람의 음성을 듣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힘입어 믿음을 받고, 성령에 힘입어 밝은 성경적 지식을 받아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이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교회가 교회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인간이나, 어떤 철학이나, 교리가 교회를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교회를 세웁니다. 여러분은 영의 역사를 얼마나 체험하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 느끼고 있습니까? 초대교인들은 우리를 위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제 천군천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 그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영으로 오셔서 역사하시는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나와 함께 계셔서 말씀하시고 깨우치시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실천하게 하시며 범사에 나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영-이것이 바로 성령임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저들은 알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같은 말로 통합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저들은 교제하며 봉사하며 섬기며 예배하며 교회를 이루어 갔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안디옥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일군을 소중히 여기는 일군을 영접하는 교회였습니다. 이것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된 일입니다. 어디에나 지도자가 필요하고 일군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가령 어는 목장에 극성스러운 교인 하나만 있으면 그 목장 전체가 부흥됩니다. 그런 반면 지도자 한사람이 없으면 그 목장 전체가 희미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고하는 일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일군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의 본래 이름이 사울입니다. 이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이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헤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울을 먼데까지 찾아가서 데려온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마침내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 사울을 세웁니다. 지난날은 핍박 자였으나 지금은 회개한 사울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사울의 중심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인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특히 이 사람을 택하여 쓰신다고 하는 사실과, 그 계시 성을 믿었습니다. 사울에 대한 그와 같은 신뢰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안디옥교회로 하여금 사울을 지도자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바나바는 지도자가 지도자 되게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되는 것입니다. 높이고 등용해 주지 않으면 인재가 인재 될 수 없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잠간동안만 성경에 나타나지만 이와 같이 덕 있는 사람이 있음으로써 사울이 사도바울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안디옥교회가 저를 믿어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종으로 영접하였기에 비로소 바울의 활동무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일군을 키웠고 일군을 존경했고 소중히 여겼으며 또한 일군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듯이 그리스도가 저를 택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줬습니다. 이런 교회가 안디옥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가 또 하나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있으니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은 교회가 이 안디옥교회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사를 초월한 사람, 전적으로 예수님께 예속된 사람, 예수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해서 처음에는 예수쟁이라는 욕으로 불린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갔으므로 안디옥교회의 특징에 관해, 제목과 특징의 요점만 두어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안디옥교회는 구제하는 교회였고, 이방 땅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 꼭 필요한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었지만 성령께서 그들을 이방선교를 위해 보내라고 말씀하시자, 순종하여 너무도 아깝고 중요한 일꾼들이지만 보냈습니다. 이방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기독교 역사상 안디옥교회가 처음입니다.
여러분 알곡 같은 참 그리스도인 입니까?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까? 어떤 교회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목적이냐가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이 함께하고, 성령님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목적이 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는 교회가 됩니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중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감격과 찬양으로 유지 됩니다. 그리고 사랑과 전도와 증거로 인하여 나날이 확장됩니다. 교회가 교회될 때 성령께서 살아 역사하시도록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참 교인이 되고, 그로써 참 교회가 되고, 그로써 주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로 새롭게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