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21-28 ㅣ 김남수 목사]
현대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On-Line 세계의 출현입니다.
동녘에 해 뜨면 학교에 가거나 출근하고, 일몰 후에는 휴식하던 우리의 10진법 아날로그 일상에 이진법의 가상 공간이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이 아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몸 집을 불리더니 지금은 거대한 생태계가 되어 Off-Line 세상을 잠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성공적인 잠식의 이유 중의 하나는 편리성입니다.
손가락 만으로 은행 업무와 쇼핑을 할 수 있고 국제 회의와 의료 진료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시공간의 법칙에 메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촌스러운 Off-Line세계와 현대인들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 두 세계의 차이점을 보안시스템으로 예로 들면, Off line세계는 문에 자물통을 채우지만 On-Line세계는 암호를 심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암호를 풀고 들어오는 도둑을 Thief 라 하지 않고 해커라고 하지요.
20세기의 Off-Line 세계에는 없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On-Line 세계의 정치적 위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재작년 튀지니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이 좋은 예 입니다.
아랍의 봄은 아랍 세계의 민주화 열망을 대표하는 말인데 그 열기가 지금 이집트와 리비아의 독재자의 머리를 밟고 이제 시리아와 터키의 운명을 쥐어 흔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예전에는 당사자들 외에는 모르던 사건 현장, 혹은 외신 기자가 갈 수 없는 시위 현장에 시위자들 스스로가 기자가 되어 유혈의 현장을 스마트 폰 카메라로 찍고 실시간에 Facebook/YouTube에 올리기 때문입니다.
그 생생한 현장 르포가 정의와 인권이라는 이슈를 전세계 시청자의 심장에 아프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시선을 돌려 성경을 보면, 이런 21세기의On-Line과Off-Line의 세계를 종말로 이끄시는 분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놀랍게도 이 하나님의 세계 경영의 기본 운영체제는 변함없이 은혜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교회는 믿음으로 화답하며 오대양육대주를 운영하는 것. 그렇지요?
먼저 교회의 지체인 우리 각자가 구원을 얻을 때 그랬지요. 에베소서 2:8절“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구원 이후도 마찬가지 입니다.
히브리서 11:6절“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지니라.”은혜와 신앙의 권세 있는 세계 경영으로On-Line과Off-Line세계를 종처럼 부리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 복음에는 세 사람의 신앙이 예수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백부장과 베드로,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
우선 8:5절의 백부장,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러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16:16절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그래서 우리가 다 알듯이 주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며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칭찬을 넘어 주님을 감탄 시킨 신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감탄을 자아낸 이 희귀한 신앙은 사회 경력이나 집안 배경이 밑바닥인 이방 여인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본문 15:27절에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탄을 쏟으십니다. 우리나라 번역에서는 살려주지 않았지만 원문에는15: 28절에 감탄사가 있습니다. “오~ 여자여(KJV, RSV),” 주님이 감탄하신 신앙, 명품 신앙, 정품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출신 배경에 대해 마가 복음 7:26절은 이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 이라 했고, 오늘 22절은 ‘가나안 여자’로 소개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가나안 혈통에 수로보니게 출신으로 헬라어를 일상어로 쓰는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적 사항 자체가 1세기 당시도 상당히 세계화가 진행되었다는 반증입니다. 한편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는 로마서 10:17절 말씀을 생각할 때 이 여인의 믿음의 근거가 된 것은 기원전 2세기경 번역된 70인 경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히브리 정경과 그 히브리 정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 밖에 없었거든요. 따라서 이 여인 만큼 번역된 성경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없습니다.
오늘의 놀라운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북쪽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실 때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7:24절 아무도 모르게……) 그러니까 공적인 사역보다는 스승과 제자간의 MT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소풍을 이방 여자 하나가 나타나 흐려 놓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어떤 사람이 귀신들렸다는 것은 소위 하나님의 형상이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짐승이나 귀신으로 추락하는 아주 심각한 경우입니다. 사실 누가 귀신 들리면 그 가족도 일상에서 격리되고, 그 집은 사람이 살아도 흉가가 됩니다. 아, 이 여인의 삶이 얼마나 황폐했을까요? 이 괴물을 내다 버리려니 딸이고 함께 살려니 지옥이고……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이런 형편을 1분간 한번 느껴볼 것: 우울증 환자, 치매 환자)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은 예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바다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실 뿐만 아니라, 귀신까지 내어 쫓으신다는 것을. (마태복음 8:28절~ 가다라 지방무덤, 12:22절 귀신들린 장님/벙어리) 그래서 그 분이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 오신다는 소식에 학수고대했고 멀리서 보자 말자 볼륨을 높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그런데 오늘 말씀은 특이하게도 “거절하는 예수님’을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5: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 사실 예수님의 무반응은 백 마디 거절보다 큰 거절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안 그러셨거든요. 그렇지만 여자도 끈질깁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X 2. 그래서 견디다 못한 제자들이 소리지르는 저 여자를 어서 해결하시고 우리들만의 시간을 갖자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동문서답처럼 하시는 말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다시 거절입니다.
예, 성경은 이 여인이 가나안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면 자비의 하나님이 어느 특정 민족을 혹독하게 전멸시키는 대상은 가나안 족속이 유일합니다. 유황불에 타버린 소돔과 고모라도 가나안 지역의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의 시대에 메시야의 구원 대상은 이스라엘에 국한 되었고 가나안 땅은 구원보다는 저주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원문의 15:22절은 ‘보라, 이 가나안 여인을’하면서 가나안은 아직 은혜의 대상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 여자 편에게는 야속 천만한 거절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정당했습니다. 그렇게 왕 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주님 앞에 온 몸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자 주님께서 엎드린 이 여인에게 결정타를 날리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겠느냐?” 이 말씀에 나오는 개는 들개이며 한국식으로는 똥개 입니다. 천국의 축복은 이스라엘의 것이지 이방인 똥개인 너는 해당 사항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똥개들’이라---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을 인종차별에다 똥개 취급으로 왕 따 시키시는 주님 말씀이 좀 지나치지 않은가요? 이렇게 하늘 무너지고 가슴 깨지는 상황이 나에게 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할 수 있겠지요: 침묵 결단형(NZ)과 정면 대응형(AU). 그렇지만 이 여인은 그런 식의 삼천포 신앙으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로 강력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여인의 이 말이 ‘주여, 내 딸만 나을 수 있다면 저는 개라도 좋고 개밥의 도토리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지요. 지금 주님은 이 여인의 모성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예, 눈이 밝으신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당찬 모성이 아니라 위대한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의 이러한 평가를 중심에 두고 여인의 언행을 다시 살펴보면 가나안 여인이며 귀신들린 딸의 어미라는 편견 때문에 우리가 간과한 놀라운 믿음의 내용이 있습니다.그것은 이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 즉 메시아 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리라는 예언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 여인은 이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는 약속들 뒤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이방 구원의 내용을 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메시아께서 오시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 구원의 축복을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베푸시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선민인 유대인들은 해당 사항 없지만 이방인에게는 이 약속이야 말로 똥개가 사람으로 갱생하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더구나 딸까지 귀신들린 상황으로 내 몰린 가나안 여자로서는 마지막 가능성이었겠지요. 따라서 이 여인은 온 몸과 마음이 수 백 개의 눈이 되어 오실 메시아가 누구인지 구약 성경을 읽고 또 읽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사도행전 1:8절인, 이사야 49장 6절- “또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아~ 그 메시야가 오시면 그 은혜와 진리의 빛을 땅의 모든 족속에게, 이 똥개같이 아니 개똥같이 버려진 나 같은 인생에게도 환하게 비추시리라는 약속을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15:27절을 쉽게 번역하자면, “예수님, 당신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일 뿐 아니라 저의 메시야 이시며 따라서 내 딸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정도로 의역할 수 있겠지요. 목사님, 저 신천지 이단 아니지요?
이 여인은 사도행전 10장에나 있을 일을 앞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서 이처럼 깊고 대단한 신앙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오, 여자여. 자네 믿음이 크도다”하시며 감탄 감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애타게 기다리던 선물,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렐루야! 지지리도 팔자 센 여인의 풀 뿌리 명품신앙이 세상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은혜의 본능을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주받은 가나안뿐만 아니라 은둔과 회충의 나라로 저주받은 조선 땅도, 이 여인의 딸 뿐만 아니라 차세대들이 모두 다 예수 왕국 안으로 받아들인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며 물꼬를 튼 것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신앙-눈물과 회개와 감격)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우리 주님은 가끔 우리를 거칠게 다루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주님의 거절의 전략은 반드시 내 신앙을 향상(Upgrade)시킬 목적으로 제한적으로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경우, 주님은 기초적인 신앙 고백을 천지 개벽의 신앙 고백으로 까지 크고 깊게 이끌어 주었습니다. 22절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25절 “주여 나를 도우소서.” (행동의 신앙 고백) 그리고 27절 “주여 옳소 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의 고백까지. 주님은 이 여인의 첫 고백을 듣고 마지막 고백까지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 주님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12:2절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런 주님이십니다. 이 놀라운 주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둘째, 주님의 거절하는 태도, 냉정한 말씀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교육적/목회적 배려 입니다.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주님의 가슴에는 공생애3년간 늘 떠나지 않았던 기도 제목 두 가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12제자들. 그런데 12 제자들은 그 때까지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이 여인을 어떻게든 쫓아 내려는 잔인한 노력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이토록 갈 길이 먼 12 제자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이 똥개나 걸레로 여기는 이방 여인의 명품 신앙을 들춰 내십니다. 말씀에 확실한 뿌리를 내린 신앙, 그것을 공개하시면서 제자들의 신앙을 도전하십니다. 사실 오늘 사건에서 가장 충격을 먹었을 사람은 아마도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이러다가 수석 제자 자리를 이 가나안 여인에게 빼앗길 수도 있겠다…… 그래서 분발했는지 드디어 한 장 뒤인 16:16 절에 “주는 그리스도 시요……”의 고백이 나옵니다. 무슨 말이지요? “주여,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은 이런 류의 신앙고백과 간증을 통해 내가 섬기는 신앙 공동체에 본을 보이길 원하십니다.
셋째, 여인이 딸의 문제에 실족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응답되지 않은 기도들로 실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떻게 명품 신앙을 가진 여인에게 귀신들린 딸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지 참 어렵고도 신비하지요? 그런 신학적인 난제는 나중에 천국 가서 주님께 직접 여쭤볼 문제고,더 현실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아직 응답 받지 못한 기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오늘 말씀은 그 기도 응답 보류가 신앙 강화제라는 것..? (저의 경우 PNG(파프아 뉴기니)에서 사과/포도주 응답보다는 두 아들의 학업과 장래를 책임져 주심)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 <이런 믿음>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을 볼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떠들썩하게 훈련 받고 유명세를 떨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담그신 장독에서 조용히 익어가는 발효 식품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는 힘겹고 지옥 같은 삶의 한 가운데서도 끈질기게 성경을 열고 기도하며 주님의 때와 은혜를 구한 케이스입니다.그리고 때가 되어 잘 발효된 장의 빛깔과 향기와 맛이 장독 주인을 감탄시켰습니다. 내 거친 형체와 약한 형질이 무너져 녹고 새로운 빛깔과 향기와 맛으로 탄생하는 명품. 여러분, 장독의 모양, 크기, 색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우리 믿음의 장독에서 모두 명품 된장, 간장, 고추장이 되어 나와야 합니다.(선택 사항)
우리가 이러한 명품 신앙에 이를 때에야 비로소 21세기가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1세기 때 명품 신앙 때문에 한 여인의 저주가 풀리고 2세기가 귀신에서 풀려났다면 21세기의 명품 신앙의 효과는 세계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웰빙, 웰리빙, 웰다잉 귀신 들리고, 인문주의와 상업 자본주의에 중독된 이 대한민국 땅에 귀신이 쫓겨나고 은혜의 치유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온갖 훈련과 간증만 무성하고 경건과 사랑의 능력은 미약한 우리의 영성을, 대한민국에서의 일상을, 학창생활을, 자녀 교육을, 비지니스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다시 본질로, 밑바닥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광스런 창조주 주님 앞에 벌레처럼 낮아져서 똥개처럼 엎드리는 담대하고 간절한 믿음. 그래야 주님도 당신의 은혜를 원 없이 쏟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그런데 주님의 때에 각자 장독의 뚜껑이 열리는 날, 우리의 믿음은 어떨까요? 그러나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누가 복음 18: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