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14-26ㅣ김남수 목사]
믿음과 행위는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서 대다수의 교회가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은혜의 중간에서 혼란에 빠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노예처럼 묶여 살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무엇을 뜻합니까? “믿음”은 우리가 믿는 바이고, 행위는 우리가 행하는 바입니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대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행위에 기초를 두지 않고, 행위는 믿는 것의 결과의 소산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에 기초를 두지 않고, 우리가 행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것의 산물입니다.
I. 믿음
1.믿음은 소망과 구별이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두 가지 분명한 특성이 있습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기원하고 있으며, 다음은, 믿음은 항상 하나님 말씀에 직접 관여됩니다.
로마서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또한 성경은 히11:1절에서 믿음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성경적인 정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구절은 믿음의 소망과 다른 두 가지 점이 있음을 말합니다.
첫째는 소망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으나, 믿음은 현재입니다. 즉. 소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기대하는 태도이고, 믿음은 현재 여기서 소유하고 있는 어떤 실상에 대한 내면적인 명확한 확신입니다.
둘째 차이는 소망은 정신(Mind)영역에 머리에 닻을 내리고 있으며, 믿음은 심령(heart) 가슴에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믿음은 사랑과 가슴에서 나온 것이고, 소망은 머리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살전 5:8) 믿음은 현재이며, 언제나 변화를 낳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6:47절에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는 미래에 영생을 가질 것이 아니고, 이미 영생을 현재에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은 지금 여기서 믿는 자 안에 영생을 낳습니다. 요한복음1:12절에도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성경은 믿는 자가 미래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순간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합니다.
2.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합니다.
히브리서 11:1에 믿음의 정의를 다시 돌아보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 또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확신입니다. 믿음의 정의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신체 감각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진리와 실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과 감각의 대상 사이의 대비를 고린도후서5: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대화에서도 이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11:39,40절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먼저 믿고, 그 다음에 보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육적으로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은 그 순서를 뒤집습니다. 그들은 “나는 볼 수 있는 것만 믿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다면, 그것을 위해 우리가 믿음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몸 안에 신체적 질병이 있는 것을 보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합니다. 여기에 감각과 믿음은 갈등이 생깁니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에게 병이 있다고 하고, 성경은 우리가 나았다고 합니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가지 반응은, 감각의 증언을 받아들이며, 질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육적인 노예가 되고 맙니다. 또 다른 반응은, 우리가 나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런 반응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과 일치되어 우리는 치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치유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낳는 믿음은 머리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심령, 가슴으로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3. 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시종일관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완벽하게 다 이루었다” 이 이상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통을 당하시므로 죄 값을 다 치루고 인류를 구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이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 구원을 받은 것과 또 구원 받았음을 아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 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7.28) 우리는 행위와 선물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행위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 곧 삯을 받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위를 되돌아 볼 때, 죄 투성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고 해 드리지 못하므로 우리가 받을 삯은 사망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믿음으로 받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얻는 영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우리가 구원을 갈망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를 바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얻게 되는 것입니다.
II. 행함
1. 산 믿음 對 죽은 믿음
구원이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면 기독교 신자의 삶에 있어서 행위가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 이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본문 야고보서2:14~26에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몇 가지 예를 듭니다.
①배고프고 헐벗은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음식이나 옷을 주지 않고 공허한 말로 위로하고 보내는 어떤 그리스도인의 예를 들며, ②귀신들도 진정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인 줄 믿지만, 그들의 믿음에는 위안이 없고, 두려움만 있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③자기 아들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④여호수아가 보낸 사자들을 접대하고 보호한 여리고성 기생 라합을 예로 듭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26절에서 육신과 영혼간의 관계를 예로 들며, 믿음과 행위 사이 가르침을 요약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람이 살아 있는 한. 그 영은 그 사람의 몸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 몸 안에 있는 영이 바깥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영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의 존재와 특성은 그 사람 몸의 행위와 활동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믿는 자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그 사람의 모든 본성, 그 사람의 생각 말과 행위를 주장합니다. 믿는 자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믿는 자 안에 들어와 그를 주장하기 이전에는 할 수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던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새로운 행동이라고 부른 그의 삶의 방식은, 그 마음속 믿음의 증거요 표현 방식입니다. 그러나 만약 믿는 자가 고백하는 믿음에 상응하는 행위가 그 삶에서 행함으로 나타나지 아니하면, 그 안에 살아있는 진정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상응하는 행위로 표현되는 이 살아있는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그의 고백은 영이 떠나 죽은 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제시하는 예들이 이 원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굶주린 것을 보고도, 옷도 음식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을 예로 듭니다.
그 그리스도인의 이 말을 진실한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그가 만일 형제와 자매가 정말 따듯하고 배부른 것을 원했다면 옷과 음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의 말은 공허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에 따라 행하지 않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진실성이 없고, 무가치하며,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둘째, 야고보는 한 분이신 진정한 하나님을 믿고 떠는 귀신을 예로 듭니다.
이 귀신들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귀신들은 또 자기들이 하나님의 회개하지 않은 적으로써,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즉, 귀신들의 믿음은 그들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고 오직 두려움만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순종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완악하고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죽은 믿음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그 이후로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지속적인 순종하는 삶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가지 순종행위를 할 때마다 그의 믿음이 자라고 튼튼해지면서 그로 하여금 그 다음 행위를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마지막 시험은 그의 아들이삭을 번제로 바치도록 요구할 때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그동안 계속해서 순종을 행사해 온 아브라함의 믿음은 꾸준히 자라고 튼튼해져 이 때 쯤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정말 믿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슴속의 믿음은 기꺼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 표현되었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어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이는 일을 막으셨습니다. 야고보는 이에 대하여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넷째,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사이의 관계를 라합을 예로 듭니다.
라합의 믿음은 두 가지 행위로 표현되었습니다.
첫째는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내었을 때에 라합은 그 두 사람을 자기 집에 유숙시키며 숨겨두었다가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라합은 자기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라합은 나중에 자기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얻기 위해,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아 자기 집을 다른 집과 구별하였습니다.
라합의 이 두 가지 행위로 말미암아 나중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 라합과 그의 가족은 목숨을 구했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단지 마음속으로만 몰래 믿기만 하고, 두 가지 행동을 단호히 취하지 않았더라면 라합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믿음은 여리고성에 닥친 심판으로부터 라합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간의 관계를 요약하면서 다시 바울이 쓴 글을 살펴봅시다. 빌립보서2:12~13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믿음과 행위간의 관계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을 두고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것을 우리의 행위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믿음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행위입니다. 먼저 믿음으로 구원 얻은 다음, 우리는 행위로 삶에서 그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은 다음 구원을 실천하지기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고백한 믿음이 단지 죽은 믿음이요. 우리에게는 진정한 경험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행위는 그 믿음이 진실한지 아닌지 가려주는 시금석이요,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주는 수단입니다. 오직 살아있는 믿음만이 살아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빚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행위로 실천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알곡과 같은 신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