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러 서울역에 갈 때면 종종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혼자서 외치는 사람도 있고, 마이크를 통해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메시지를 전하는 팀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면 이렇게 할까?” 싶어서 감탄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전도해서는 열매가 없을 텐데…”라는 안타까움도 따릅니다.
전도는 특권입니다. 모든 특권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그 대가는 희생입니다. 희생 없는 전도에 열매 없습니다. 노방 전도를 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내어 무관심한 사람들을 향하여 거리에 나와서 외치는 것 자체가 희생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소음이나 무례함으로 느낍니다. 노방 전도는 전도자의 보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열매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초대교회가 기독교로 로마제국을 뒤엎을 정도로 성장했던 것은, 길거리에서 외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경제적인, 사회적인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전염병이 돌아서 주민들이 타지로 피신할 때에, 기독교인들은 마을에 남아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회복이 안 되고 죽으면 시신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이런 희생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급성장했던 것도 선교사들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고국에서는 엘리트로서 잘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이름 없는 먼 땅에 와서, 낯선 백성들과 같이 살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이러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노방 전도가 효과적이었던 때가 있었고, 오늘날도 열매 맺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방 전도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기에, 잠정적으로 사용하신 비상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전도의 방법은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 3:15].” 상당히 소극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본받을만한 삶이 있었기에 비신자들이 복음에 관심을 가졌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진정한 전도는 비신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필요를 채워줄 때 일어납니다. 가정교회에서 영혼 구원이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비신자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주고 그 후에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최영기 목사(前국제가정사역원장)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