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16-34 ㅣ김남수목사]
아덴은 헬라의 수도이며 헬라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이 문화의 수도에서 바울의 선교활동은 특기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아덴 전도는 바울의 계획적 전도 같지는 않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도시에 우상이 많을 것을 보고 즉흥적으로 전도한 것 같습니다. 둘째 아덴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는 철학적 전도 강연이었고, 그 효과도 별로 신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에 충격을 받아 다음 도시인 고린도에서는 십자가의 도리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셋째 그러나 아덴 전도는 역사적인 사실과 잘 부합합니다. 에비구레이고와 스토이고, 아굴라, 아레오바고 등은 모두 헬라 역사 또는 세계 철학사에 친숙한 이름들입니다. 아덴 전도의 내용은
I. 유대인과 헬라인을 상대로 한 전도(16-21)
II. 아레오바고의 강연(22-31)
III. 그 결과 일부는 조롱하고 일부는 믿게 됨(32-34)등입니다.
I. 유대인과 헬라인을 상대로 한 전도(행 17:16-21)
16절에“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의분이 막심했습니다. 바울이 어째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고 분했느냐 이것입니다. 철학의 본산지에 와 본즉슨, 모조리 우상을 숭배하고 있어요.“지성인들이 왜 이 모양으로 되었느냐, 철학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지,우주의 이치를 논하고 철학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우매한 우상을 섬기다니 말도 안 돼.” 철학을 아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난 것입니다. 도시에 우상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잘 산다고 하는 일본에 얼마나 우상이 많은지 놀라워요. 신이 800 만개나 되니, 신상이 얼마나 많은지 골목골목 집집마다 신상이 가득합니다. 철학을 알고, 돈이 많고, 권력을 쌓아도 종교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뿐입니까? 우리나라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금 여야 국회의원들이 하는 짓을 좀 보세요. 국회의 한 회의실에서 역술인, 무당을 불러 가지고, 굿판을 벌여가면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하는 짓이에요.
참 분통이 터질 일입니다. 나라가 망할 짓이에요. 하나님께 이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바울이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통을 터뜨려 화가 난 것입니다.
17절에“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은 아덴이 우상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복음이 필요한 것을 직시하여, 실라와 디모데가 올 때 까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을 했습니다. 장터는 일용품을 파는 시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 방법이 실책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 철학적 방법으로 변론한 것입니다. 훗날에 뉘우치면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바울은 “변론하지 말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다. 내가 다 해 보았는데 별거 아니더라.”라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18절에“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토이고 철학자들도”라고 말씀합니다. “에비구레오”철학학파는 에피큐로스가 창설한 학파로 무신론적으로 내세는 상관이 없다.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중요시 여기며, 현실적, 물질적,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철학사상으로 저들의 지상목표는 행복이고 향락에 있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에비구레오 학파와 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스토이고 철학”이라는 것은 스토아 철학인데 자연신을 믿습니다. “신은 자연이요 자연은 신이다”라고 히는 범신론을 폅니다. 저들은 에비구레오 향락주의를 배격하고, 도덕주의를 강조하며“자연을 따라 살라”는 것이 생의 모토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영생을 전합니다. 믿고 구원 얻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영생과 부활이 전해지겠습니까?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그런고로 변론을 벌인 것입니다. 계속 변론을 벌인 순간, 저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말쟁이”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9절-20절에“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그들은 바울을 데리고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화성의 언덕입니다. 운동장 같은 암반이 있는 법정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덴의 법정으로 종교 도덕상의 문제와 , 바울과 같은 방문자들에게 대한 재판권을 행사했습니다. 에비구레오와 스토이고 철학자들이 바울을 이 법정에 세운 것은 평의원들, 즉 그 도시의 지도자들 앞에서 바울이 전하려는 내용에 관한 설명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앞으로 이 도시에서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느냐, 아니면 전도하지 못하게 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 도시의 지도자들은 아덴의 명성이 지적인 열의와 서로 대립하는 철학자들의 철학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무를 신중하게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니,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귀에 이상하게 들리는 바울의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고대 세계의 지적인 중심지인 이 아덴의 사람들과 외국인 거주자들은 최근의 종교사상에 대해 논쟁하기를 즐겼습니다. 이 개방성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II. 아레오바고의 강연(22-31)
22-23절에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종교성이 많도다”하고 어느 정도 그들을 인정하여 주면서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친 제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의 주의를 모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이름을 쓴 신상이 있습니다. 다른 신들은 다 별 신, 달 신, 물 신, 나무 신 …….수없이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상에게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이 알지 못하는 신이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잡신이거나 우상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의 의미를 설명 드리면 이렇습니다. 신을 섬기면서 빼 놓은 신이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자기를 빼 놓으면 그 신이 진노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아덴 사람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이 미련해서 이름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제대로 목 붙였더라고 그저 용서하시고, 여기서 제물을 받아 잡수시고 진노하지 말아 주세요.” 그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앞에 서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을 내가 알게 하겠다”고 하였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렇게 말하고, 방향을 돌려 복음으로 말을 끌고 가려 했지만 끌려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논리를 뒤덮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바울은 오직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다고 증거했습니다.
25절에“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가 부족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호흡의 근원이시며, 그 밖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 만물을 주셨으며, 인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같은 조상을 가진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6절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한 혈통이요, 한 사람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연령과 연한을 정해 놓으시고, 그 예정하신 한계대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각 민족들이 거하는 영토와 국가들의 국경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그대로 각 민족이 자기 땅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비록 피부색깔이 다 다르지만 혈통만은 하나입니다.
27절에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물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하나님을 찾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눈이 어두워 만물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주의 성령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여러분과 나를 한 사람씩 쓰다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피하여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28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말합니다.
길리아 출신 「아라투스」가 인간을 “신의 소생”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제우스」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라투스」의 시를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밝혔습니다.
29절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피조된 사람이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든 신상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섬기면 되겠습니까? 우리들은 사람들이 만든 신상을 섬기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졸렬하고 사소한 조각품에 제한하여 섬기기에는 너무나도 광대하시고, 지존하시며, 전지전능 하신 분입니다.
예화, 아브라함의 우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이 얘기는 성경에 없는 전설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았는데, 그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많이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어린 아이인 아브라함이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우상에게 바치겠다며 고기를 가지고 왔어요. 보나마나 우상은 그것을 안 먹을 것 아닙니까? 그 때에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큰 우상 앞에다 고기를 놓고, 그 다음에 작은 우상들을 모조리 도끼로 때려 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도끼를 큰 우상의 손에 떡하니 들려 놓았습니다. 그래놓고는 시치미를 떼고, 척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돌아 와서 보니 큰일 났습니다. 힘껏 만들어 놓은 우상들이 다 목이 부러지고 망가졌습니다. 누가 그랬느냐고 야단을 피웁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그랬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저는 안했습니다. 누가 제물을 바친다기에 갖다 놓았는데, 글쎄 이놈들끼리 서로 먼저 먹겠다고 싸우다가 큰 놈이 작은 놈들을 다 죽여 버려서 그만 저렇게 되었습니다.” 데라가 되묻습니다. “우상이 무슨 생명이 있다고 저희들 끼리 죽이고 말고 하느냐?” 그 때에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버지! 그렇게 제물 하나도 받아먹지 못하고, 회도 내지 못하는 그런 신을 왜 섬긴다고 그러세요?” 이에 아버지는 그에게 매우 진노하였고,
결국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이 일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30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는 예수께서 오시기 전, 곧 이방족속이 구속의 도리를 알지 못하던 시대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유보하신 채 오래 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이 이방에게까지 전파된 은혜의 시대요, 복음이 편만한 시대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께서 종을 각처에 보내어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정하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이 모든 사실에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실 것임을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인터넷, 또는 문서를 통해서 세계 도처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으로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마지막 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윤리 도덕, 이상 기후, 천재지변 등을 보면 마지막 시대의 징조들이 오늘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주님 오실 날이 눈앞에 가까운 이때에, 전도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한 자를 분리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서서 이상과 같은 요지의 구원의 말씀을 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III. 바울의 전도의 결과는, 일부는 조롱하고 일부는 믿게 됨(행 17:32-34)
32-34절에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의 전도로 몇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바울은 논리 정연하게 복음을 전하였으나 결과는 비방하고 조롱하는 사람과, 다시 한 번 더 듣겠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다른 몇 사람뿐이었습니다. 바울의 아덴 전도는 거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지혜 있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보이고, 숨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나 베뢰아에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덴에서 철학자들과 더불어 논쟁한다고 하며 철학적 논리적 신학적으로 설교를 하니 몇 사람 밖에는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만 전하면, 성령이 역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보혈만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나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구원과 치유와 승리와 축복이 강물처럼 넘쳐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아덴 전도를 통해 전도의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지식이나 논리나 언변을 자랑하려로 하면은 안 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는 하면서, 자기가 가진 철학을 가지고 한 번 대결해 보고자 변론을 했습니다. 이것이 큰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지식이 있다고 해서 지식을 말하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변론을 벌이려 든다면, 절대로 복음 전파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설사 말싸움에서 이겼다고 합시다. 상대는 지고 돌아가면서 “두고 보자” 할 것입니다. 기분 나빠하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마음 문을 더욱 굳게 닫아 버릴는지도 모릅니다. 전도는 순수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