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1:21-26 ㅣ 김남수 목사]
우리는 지난 주일에 바울 사도가 좋은 뜻과 다툼으로 전도하는 두 종류의 전도자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복음이 전파되므로 기뻐하는 관대한 바울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과 사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그것을 초월하여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겠다는 고백을 사도바울은 합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모두 다 그리스도 중심인 그의 강한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21-22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삶과 죽음의 선택을 말씀합니다.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기본적인 본능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로는 이 두 가지가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본능인데, 하나는 살고 싶은 본능이요, 또 하나는 죽고 싶은 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본능은 하나로 다 연결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본능은 우리의 언어 습관에도 쉽게 나타나는데, ‘슬퍼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 죽는다는 소리가 일상 언어에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버릇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 모든 사람에게도 ‘죽는다.’ 는 소리가 일상 언어에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걱정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걱정을 심리학적으로 깊이 추적해 올라가 보면 그 종류가 많은 것 같으나 실은 딱 두 가지라고 합니다.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또 하나는 죄로 말미암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둘은 하나로 합쳐진다고 합니다.죄가 없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인이 믿건 안 믿건 ‘만일 지옥이 있다면 틀림없이 내가 거기 갈 것’이라고 느끼는데서 연유된다고 합니다.
무신론자인 볼테르(Voltaire)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내 생명이 6개월만 연장된다면 나는 내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절반을 내 놓겠소. 나는 이제 그만 두렵고 떨리는 지옥으로 가게 되었소.당신도 가게 될는지 모르오.” 그리고 임종 때에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리스도여, 나를 도와주소서.”
평생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버림을 받고, 끝장에 이르러 시간이 없을 때에 이렇게 부르짖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가장 심각한 고민입니다.
죄가 문제되는 것도 죽음 때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밝혀졌듯이 인간 내면의 심층에서 죄가 지옥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과 죄로 인한 고민이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짓누르게 하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와 죄의 문제가 함께 엉켜서,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죄 문제를 고민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삶이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아니하였고 죽음도 그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는 것과 죽는 것, 이 둘 중에 그리스도께서 어느 길을 걷게 하실지, 바울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겸손하게 주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죽음과 죄, 이 두 가지를 해결하여 떼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정말로 깨끗하게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이것의 해결 없이는 어떤 것으로도 그에게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과연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권력을 잡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준다고 행복합니까?
그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죽음과 죄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도 이것 때문입니다.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 속 맨 밑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이 두 가지 걱정이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이 두 가지를 다 해결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 한 사람입니다.이런 자세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감리고 창시자 요한 웨슬리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내일 밤 12시에 죽는다고 한다면 무슨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요한 웨슬리는 대답합니다.
“글쎄, 따로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요? 날마다 준비하고 있는데 새삼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평상시 같이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지내니까, 밤 12시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 새벽에는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되겠지요.”
내일 죽든 오늘 죽든, 별다른 준비를 할 것이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매일 매시간 깨끗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로 그럴 것이 그 생의 출발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본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을 잡아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할 사람이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그의 참된 생은 다메섹에서 시작된 것이지 길리기아 다소에서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동행하여, 그의 제자로, 그의 전파자로, 그렇게 그리스도만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은 그렇게 사는 과정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오래 그리워하던 분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은 이런 마음이었습니다.바울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곧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는 순간입니다.
글래서 딤후 4:7절에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골인 점에 들어가는 순간 예수님이 “너 왔구나.” 하고 맞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골인 점에서 면류관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막 달려가 거기에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죽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괜찮습니다.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주님 앞에 가는 것으로 꽉 차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죽음을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살전 4:14절에서는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만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두 사이에서 고민한다고 했습니다.
23절에서 “두 사이에 끼었으니”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헬라어로 “쉬네코마이(συνέχομαι)”로 양쪽에 큰 장벽이 있는 골짜기를 지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두 사이, 두 절벽 골짜기 사이에 끼었다는 말입니다.끼어서 가고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죽고 사는 데에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원은 있습니다. 살라야겠다. 죽어야겠다는 소원은 있으나, 적어도 믿는 사람에게는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어느 시간에 죽느냐에 하는 것에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가든지 주님의 뜻대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런 모습으로 죽게 해 주세요” 라고 평생을 통해서 부지런히 기도해도 들어 주실지 말지 모르는데, 하물며 기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냥 알아서 그 방법을 정하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떤 권사님은 식사기도 때도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봄날에 데려가 주십시오”
장례식 하는 사람들 고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겨울에 가면 고생할 것 아닙니까?어머니의 기도를 듣고서 자녀들이 “어머니, 식사 때에 왜 그런 기도를 하십니까?”하면, “나는 이제 아무 소원도 없다. 너희들 예수 잘 믿고 다 잘되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냐?” 고 하시더니 정말 따뜻한 봄날에 가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것까지도 기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 선택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두 사이에 끼었습니다.그래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본문 23절 하반 절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라고 합니다.여기서 “떠나서” 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날뤼에인(ἀναλὐειν)”으로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천막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해변에 가서 캠프 생활을 하다가 끝나면 천막을 척 걷어서 둘러메고 차에 실은 다음 집으로 옵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집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죽음이요, 떠난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닻을 감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배가 정박할 때에는 닻을 내립니다.닻을 내리고 기다리다가 떠날 때가 되면 닻을 끌어 올립니다.
이 닻을 끌어 올린다는 것은 그 다음 목적지로 간다는 뜻입니다.
일이 끝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닻을 감아 올리면 이제는 출발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이것이 곧 죽음입니다.이 육신의 장막을 걷어 버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집으로 들어갑니다.
또 오랫동안 이 세상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 닻을 걷어버리고,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고 약속이 있는 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떠난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빨리 떠나 오래 기다리고 바라던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욕망을 고집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의 인간적 소원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삼층 천까지 보고 와서 말할 수 없는 천국환희를 알고 있었습니다(고후 12:1-4).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떠나서”란 장막을 허문 다는 뜻입니다.
현세의 삶을 장막으로 비유하여 그것을 허물고 그리스도에게로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꼭 이루실 것이 아닙니까?일단 죽는 것은 이쯤해서 두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좀 더 살아야 하는데,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우익하다”는 헬라어 단어는 “아낭카이오테론(ἀναγκαιὀτερον)”으로 “필요하다”는 의미도 있는데, 이것이 본문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유익하다는 말 보다 필요하다는 말도 생각해보겠습니다.
실제로 선택할 때는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골라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든지 보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선택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소명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복음의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성도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청지기로써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먼저 구했던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예를 들어 간증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와 저에게 주신 사명이 성령사역과 전인치유 사역을 한국 보수진영교회들이 받아들여 성도들을 건강케 하고, 주님께서 위임해 주신 3 대 사역 중에 하나인 치유사역을 보편화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를 사용하여 전인치유사역을 보편화시키시고 계시며, 이 일을 하면서 어려움도 있었고 죽을 고비도 제가 두 번이나 넘겼지만, 뒤로 물러서거나,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또한, 그간 많은 치유의 은혜들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체험했습니다.
지금 저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이제 좀 쉬고 싶지만, 아직도 완전히 치유사역이 회복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제가 살아 있는 동안 한국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은퇴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3월 6일부터 5월 29일까지 매주 월요일마다 13회에 걸쳐, 제23기 세미나를 열기 위해 지금 장로님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준비가 참 원활하게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조 장로님, 최 장로님, 장로님들께서 여러 가지 준비로 수고들 많이 하고 계십니다.
그간 우리 교회 여러분도 참 수고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모드들 서로에게 감사드립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세미나를 마지막으로 아시고, 세미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시고 협력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는 선한 사역인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 10: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하셨고, 눅 10:17-21절에는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 이다.” 를 보면, 성령사역과 치유사역을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는 선한 사역인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는 말씀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전인 치유사역을 사단은 보고 싫어하지만, 주님께서는 보시고 기뻐하시며 영광 받으시는 사역입니다.
본문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좋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세상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돈을 번다 거나 잘 산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령한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자신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 주고, 다른 사람의 믿음의 성장에 이바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의 믿음을 더 온전케 하는 유익한 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25절의 말씀은 지금까지의 주님을 위해 살아온 삶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의 자신의 삶이, 빌립보 교인들의 신앙에 유익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산다고 하였습니다.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사람의 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는 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진보와 기쁨은 매우 중요합니다.믿음은 단편적이거나 죽는 것이 아니고, 입체적이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장, 진보해야합니다.성경에는 분명히 어린아이의 믿음과 장성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란 믿음을 말합니다.
장성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삶의 어떠한 환경과 조건 아래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믿음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26절에서 놀라운 말씀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바울이 출옥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 되어 빌립보를 방문할 때 그들의 자랑이 클 것이라고 말합니다.여기의 자랑은 기쁨과 함께하는 자랑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평소에 바울을 기뻐하고 또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옥에서 놓여나 자유로운 몸으로 그들을 만나면 더욱 기뻐하고 자랑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육체를 따른 인간적인 자랑이 아니요, 외모에 따른 의식적인 자랑도 아닙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는 일이 되며,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기쁨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충성할 때만이 온전한 기쁨이 되며 온전한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생의 의미와 생의 문제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풀이해 놓고,목적이 분명한 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살 때에 하루하루 사는 것이 천국이요,매일 매일 사는 것이 큰 보람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도바울의 높은 생의 철학이 또한 우리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