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1:12-20 ㅣ 김남수 목사]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히므로 복음 전파에 진보가 된 것을 강조한 후, 오늘 본문에서는 그는 복음이 전파되어 가는 중에 두 가지 일군이 있는 것을 밝힙니다.
하나는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참된 일군으로 바울에게 선의를 가지고 대하고, 또 하나는 투기와 분쟁 등 불순한 동기로 전도하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I. 첫째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12절-14절까지 말씀은 좋은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이들은 바울이 옥에 갇히자 바울 선생님이 저렇게 옥에 갇혔으니 우리라도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자고 나선 것입니다.
‘수천 명 앞에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저렇게 갇혀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우리가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대신 전도하자’ 고 열심을 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나 혼자라면 전도해 보았자 몇 명에게나 했겠나, 온 교인이 이렇게 합심하니 더 많이 전해지는구나.’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은 돌보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나 공산치하 때, 목사님들이 신사참배나 공산당 문제로 감옥에 갇혔지만, 주일 날 교회가 터질 정도로 많은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목사님 대신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이 설교하는데도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새벽기도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운 겨울이나 여름에 냉난방도 없고, 설교도 없지만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목사님도 안 계신데 우리가 편히 쉴 수 없다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기 때문에 목사님이 계실 때 보다 더 교회가 부흥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당한 고난이, 즉 감옥에 갇힘이 어떤 효과가 있었습니까?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을 잠깐 복습하면,하나는 복음 밖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3절에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황제나 대신들과 집정관은 내가 죄인으로서 고난을 받지 않고, 선한 양심을 가진 정직한 사람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며, 어떤 비행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고난이 궁전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는데, 아마 다른 방법으로는 알려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이 알려진 이 일이, 시위대 중 몇 명은 그가 위하여 고난 받는 이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대신들, 정치인들, 군 장성들이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외에의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복음을 들어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감옥에 갇힘이 궁전 안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에 이일은 모든 곳에 까지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즉 궁전의 일은 모든 지방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의 매임이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습니다.
그 원수들은 그 매임으로 놀랐으나, 그 친한 친구들은 그의 고난에 의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14절에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하게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을 가지므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사람들을 낙심시키고 실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투옥된 바울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대해 좌절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담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기꺼이 바울의 동반자로서 고난 받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이들은 “두려움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습니다.그들의 확신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리고 그들의 용기는 그들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었습니다.
바울이 시위대에 갇히므로 바울이 시위대 안에 복음을 전했고, 밖에서는 형제들이 바울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매임이 복음 전파에 진보를 가져온 것입니다.
II. 둘째는,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질투를 전하는 부류입니다.
15절-17절에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7절의 ‘다툼’ 이란, 헬라어로 에리데이아스(ἐριθείας)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라이벌 의식, 시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대가를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는 것은 복음 전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달리 바라는 것이 있어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달리 복음 전함은 무슨 뜻인가?
사도바울은 당시 명성 높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복음 해석의 최대 권위자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바울이 로마에 온다고 합니다.
로마에 교회를 세우고 큰 역사를 이룬다는 소문이 들립니다.오기는 왔는데 죄수의 몸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을 시샘하던 자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이름을 로마에서 형편없이 만들어 주고, 그리고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해 복음을 전하자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의 전도는 질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플러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플러스가 되었는가?복음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바울을 시샘하는 자들이 전도함으로 복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복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바울의 매임이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밖에서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바울의 매임이 이렇게 복음 전파에 진보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슨 방도로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합니다.여기서 ‘무슨 방도’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요, 그의 인격이 격하되든 추락되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기만 하면 기쁘다는 뜻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특히 믿는 자에게는 마귀의 시험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질투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극복하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노라’ 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기뻐할 수 있었던 근본 치유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질투를 극복한 사람은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이긴 사람은 질투가 없습니다.좀 언짢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유명한 이스라엘의 국방상「모세 다얀」이 이혼하고 딴 사람과 재혼했습니다.
기자들이 이혼당한 그 부인에게 얼마나 괴로우냐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내 남편을 위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위해 크게 일하는 분인데 나 말고 딴 사람이 잘 위로해서 큰일을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대담의 말이 타임지에 크게 실린 적이 있습니다.인권 문제라든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질투가 없는 깨끗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슬퍼지는 것,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질투입니다.
바울은 자기 문제를 깨끗이 잊은 질투 없는 사람이기에 오해를 받든 무시를 받든, 오직 그 결과만 보면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II.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바울이 얼마나 기뻐하였는가를 보는 것은 매우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본문 18-20절에서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므로 사람들 가운데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비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전파는 많은 사람들의 선행에 기여하므로, 비록 그것이 외모로 행하여지고, 실제로 행하여지지 않는다하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기뻐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는 복음을 전파할 자유를 가진 사람들을 시기하기는커녕 기뻐하였고, 누구나 외모로 하고, 참으로 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일 까지도 그는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그것이 많은 약점과 약간의 실수가 수반된다 하더라고 복음전파를 진심으로 하는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더욱 기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복음이 전파되므로 사도가 기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복음전파가 인간의 영혼 구원에 기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19절에 “나는 이것이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아는 고로”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사역자들이 자기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사역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사역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툼과 시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신시한 사역자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는 자들이 무슨 상을 다 기대할 수 있겠는가?또한 외모로 전파하고 참으로 전파하지 않는 자가 무슨 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럴지라도 그들의 전파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기뻐한 것은 시기에 의한 복음전파자가 그들의 구원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에 대한 전파가 우리에게 손해를 주고, 우리의 명성에 손실을 준다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이로써 구원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시기에 찬 저들의 전파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19절에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과 조력에 의해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목회자들에게 성령의 공급원이 되게 하며,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데도 그들에게 힘이 됩니다.
또 하나는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섬김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헌신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큰 소망은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으셔서 그의 이름이 위대하게 되고, 그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좌절됨이 없이 마음에 자유와 해방을 가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담대하게 봉사하고,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단한 영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노라”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함은 그리스도의 영예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을 누림으로 이루어지든, 혹은 죽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문제 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들의 수고와 고난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살아서 그를 위하여 일하면서 그의 영예를 추구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든, 또는 죽어서 그를 위해 고난을 받으므로 그를 위해 영예롭게 하므로 이루어지든. 어느 것이든 개의치 않고 하고자 합니다.
바울에게는 복음전파가 생의 전부였습니다.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고 부흥이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멸시받고 고난 받는 것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작은 일들은 다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이것이 복음 전도자 바울의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