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5:13-22 | 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은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를 예방하기 위해 그의 누이 버니게와 함께 가이사랴에 오고,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에 관한 말을 보고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먼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그립바 왕에 대해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혹은 역사가들이 증명한 대로 중요한 몇 가지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원래 아그립바 왕은 행12:20-22절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름을 지을 때 이름 하나를 지어놓고 그의 아들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첫 번째 사람은 I세이고, 아들은 II세이고, 손자도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되면 III세입니다. 그런데 아무튼 아그립바 I세가 성경에 나타나는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은 그의 아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그립바는 그의 아들, 아그립바 II세입니다. 역사학적으로 정확한 이름을 붙인다면 헤롯 아그립바 II세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 2세는 주후 48-70년까지 꽤 오랫동안 로마황제의 비호로 이스라엘의 보좌에 있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자기능력으로가 아닙니다. 비록 허수아비 같은 왕이지만 왕은 왕입니다. 로마인들은 지배하는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기 위해 왕 제도를 두고 총독을 두었습니다. 총독이 실권을 가지지 않고, 왕은 그저 형식적인 권한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사람은 로마에 대해서 충성을 잘 했던 것 같습니다. 저들과 관계가 무난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렇게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2세, 그는 황제의 비호로 비교적 넓은 국토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총독이 새로 부임해 왔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해임되고, 베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새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렇다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이 아그립바 2세가 당연히 신임총독을 예방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베스도를 예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그를 따라 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이들이 꼭 붙어 다닙니다. 버니게에 관해서는 다른 역사적 사료에 의해서 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록에 보면 왕후인양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왕과 그를 수행하는 부인,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좀 아리송합니다. 왜냐하면 이 버니게는 좀 특별한 인물이니까요. 버니게는 헤롯 아그립바 I세의 큰 딸입니다. 그러니까 아그립바 II세하고는 사실상 남매 지간입니다. 본래 남매가 아닙니다마는, 버니게는 벨릭스의 아내였던 드루실라의 언니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그립바 II세와는 남매관계입니다. 버니게는 마루쿠소라는 사람과 결혼했다가 그가 죽자마자 바로 재혼을 하게 딥니다. 그러데 이 두 번째 남편도 죽었습니다. 팔자가 조금 기구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서 지금은 혼자 아그립바 II세 궁전에 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나가 동생 집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보통 관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버니게의 나이가 20세입니다. 그런데 벌써 두 번 과부가 됐으니, 팔자가 기구하다고 할 수 밖에요. 문제가 있지요. 이렇게 남매가 같이 살고 있는 것은 근친상관에 속한다고 해서 온 유대 사람이 이를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나와 산다고 하는 바로 이 관계 때문에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고, 특별히 버니게는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히게 되고, 비난을 받게 됩니다. 아무튼 그들은 궁전에서 같이 거하게 됩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었으나 요새말로는 동거한 것이지요. 그리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혼자 지내는 동생과 함께 버니게는 여왕 행세를 하며 나타납니다. 그래 오늘 베스도를 예방하는 시간에도 의젓하게 여왕처럼 동행해서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의 일을 살펴보면,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못마땅해서 형식적으로, 또 다른 남자와 결혼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자기 남동생과 같이 지냅니다. 그 다음에 그는 로마황제의 정부가 되는 등 많은 추문을 얻습니다. 로마의 황후가 되려고 까지 했습니다. 정치적 욕망이 많은 여자예요. 그러나 로마 사람들이 유대 여자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역사가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여기 나타난 이 여자는 부도덕한 여자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욕망이 많은 여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그립바 II세와 버니게는 사실은 남매이지만 오늘은 부부간입니다. 그들이 지금 베스도를 예방하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전임자인 벨릭스가 체포해 놓고 2년 동안이나 보류해 놓은 바울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유대 지도자들과 관계가 좋은 아그립바 2세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이래서 베스도는 바울의 문제를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인데, 오늘은 왜 이러하냐? 입니다. 자기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그리고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유대 왕에게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을 보십시오.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나의 짐작하던 악행, 그게 뭡니까? 곧 짐작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요, 로마를 위협하는 사건이요,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요, …….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짐작했던 것과 같은 악행, 혹은 사람을 죽였다던가 하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금 2년 동안이나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 베스도가 하는 말을 가만히 보세요. 19절에서 그는“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그러니까 오직 문제되는 것은 “자기들의 종교문제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종교,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곧 자기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저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 사람 자기네의 문제인지, 우리의 종교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이 아니던가요? 총독이라 해서 죽지않던가요? 어찌해서 종교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하게 대하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생각하면 어이없습니다.
알고 보면, 종교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생명을 구하는 복음이 바울에게 있고, 바울로부터 영생의 복음을 들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도 열려있는데,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그것은 자기들의 문제지, 우리 문제도 아니고, 내 문제도 아닙니다.”하는 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종교문제입니다.’라고 일축해 버립니다. 로마 사람들의 관심은 정치뿐입니다. 일반 사람들의 관심은 물질입니다. 그래서 종교문제를 생각하더라도 오늘날에도 보면, 이 종교를 믿어서 돈을 번다고 하면 열심이겠지요. 예수 믿으면 장사가 잘되고 한다면 열심히 믿겠지요. 관심이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복 받는다면 무슨 짓을 안 합니까? 돈 번다면 무슨 짓을 안 합니까?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마다 종교문제는 관심이 없어요.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가장 우선적인 문제인데, 절대적인 문제인데, 이 문제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면, 베스도는 19절에“자기들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나와 관계없는“자기들의 종교”헬라어의“이디아스 데이시다이모니아스” 라는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데이시다이모니아스”를 번역하면“귀신숭배”입니다. 이것은 얕잡아 하는 말입니다. “자기들의 종교”라는 말은 직역하면 “저들의 미신”이 됩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뭐라고 하는데, 그것은 저들의 미신입니다. 귀신 섬기는 노름입니다. 그 정도 문제 가지고 시끄럽게 지금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것은 남의 종교를 멸시하는 말입니다. 로마인들은 자기 나름의 종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제우스 신」입니다. 우리는 제우스 신,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로마의 신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서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저들의 신은 시원치 않아서 약소 민족이 되어서 오늘 이렇게 고생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할 때에는「제우스 신」이 가장 위에 있고, 여호와 하나님은 귀신노름이에요. 남의 종교일 뿐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참 종교란 우주적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국경이나 민족이나, 혹은 어떤 인종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민족주의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어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보다 백 년 전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본은 기독교인이 1%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25%다 30%다 합니다마는, 일본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주 적어요. 집집마다, 골목골목마다, 요상한 집신 상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논문도 쓰고 이렇다 저렇다 얘기합니다마는, 일본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잡신은 자기 종교이고, 기독교는 서양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변변치 않는 민족주의가 문제가 됩니다. 기독교는 서양종교이고, 우리는 우리 종교라고 생가하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것이 80%라고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3.1운동 같은 역사 덕분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민족을 건질 수 있는 길은 이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 기독교를 우리 종교로 받아들였고,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로 받아들였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쉽게 민족주의를 극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를 남의 종교라고 생각을 안했어요. 이것을 넘어섰어요. 대단히 중요한 은총적 계기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기독교는 너의 종교, 유대 사람들의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베스도가 바로 여기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우리 종교.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하나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서 부터 선교는 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에 오늘 본문을 보면 참 섭섭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19절에“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고 베스도가 말합니다. 그것뿐이다. ― 참 유감된 평가입니다. 아니 죽은 자가 산다는 문제인데, 보통 문제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예수를 죽었다고 전제해 놓고“예수는 죽었는데, 바울은 저를 살았다고 한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시끄럽습니다.”하는 얘기입니다. 그것뿐이에요. 그 이상은 관심이 없어요. 죽은 자가 살아났다 하는 문제,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어찌 이것을 그냥 넘길 문제겠습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어도 정신 차리고 생각을 해야 되겠는데, 문둥병자가 깨끗해졌다고 하는 것도 생각을 달리해야 되겠는데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았다 하는 얘기를 흘러 들을 수가 있습니까? 내 상식 밖의 얘기라고 해서‘그것은 믿어 볼만한 가치가 없어, 생각할 여지도 없다’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는 문제, 이런 엄청난 복음을 들으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그저 하나의 소문이나 루머로만 듣고 흘러 보내고 있습니다. “죽은 것을 살았다고 …. 송사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그것뿐입니까? 결국은 죽은 자가 산사건 때문에 오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온 세계의 역사가 달라진 것 아닙니까?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에,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어서 온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 하나하나도 이 부활의 복음 때문에 변화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부활의 복음을 듣고서 저렇게 흘러 보낼 수 있습니까? 베스도는 이런 면에서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22절에 말합니다.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에 대한 이야기는 당신을 통해서 들었고, 소문을 통해서도 들었소.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소. 나도 직접 이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소. 바울을 만나보고 싶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것은 호기심일 뿐입니다. 그 뒤에 나옵니다마는 아그립바 왕은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아마 속으로는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부분이 있었지 않았겠나? 싶습니다마는 유감스러운 것은 그 정치적인 위치 때문에 그는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주는 내 구주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늘 말씀하신바와 같이 나의 구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하나님이며, 내 구주십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을 위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요, 예수는 나의 구주이십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그리스도, 내 구주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항상 확실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