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6:1~12 | 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은 바울의 다섯 번째 자기변명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22:1~21의 말씀으로 안토니 성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유대인 군중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며, 두 번째는 행 23:1~6로 공회 앞에서 세 번째는 행 24:10~21의 벨릭스 앞에서, 네 번째는 행 25:6~12의 베스도 앞에서, 다섯 번째는 행 26:1~30 오늘 본문의 가이사랴에서의 마지막 변명인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변명에 나오는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담은 본서에 세 번째로 기록된 것으로 다시없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는지 벌써 2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다섯 번째 지금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또 자기변명을 해야 합니다. 1절의“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어디 말해보라 이것입니다. 재판정은 원고가 있고, 재판장이 있는데, 원고가 고소하면 될 것을 피고에게“네가 네 죄를 말하라”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 변명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릴 것도 이 긴 변명의 계속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침착하고, 온유하게, 인내로, 똑같은 모습으로 자기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인내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손님을 잘 접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사라가 어디가고 없고 아브라함 혼자 있는데, 나이 100세도 넘는 웬 노인 하나가 왔습니다. 그가 먼 길을 온 것을 알고, 아브라함은 혼자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서, 자기 나름의 손님 접대하는 특유의 인간성을 발휘해서 노인을 앉혀놓고, 음식을 만들어 올 테니 좀 기다리라 하고 딴에는 모처럼 좋은 일 한번 해 볼 마음으로 정성껏 음식을 잘 마련해 놓았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아브라함은 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이런 귀한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손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하오며…‧” 그런데, 감사기도를 드리는 사이에 노인이 벌써 음식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은 안 믿어도 얻어먹는 주제에 기도하는 중에는 참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당장 누구 없느냐?”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종이“예”하고 달려옵니다. “이 놈을 끌어내라. 이 녀석은 하나님도 모를뿐더러, 기도하는 동안에 성급히 음식을 먹었다. 예의도 없고 체면도 없고 신앙도 없는 이런 나쁜 놈은 대접할 가치가 없다. 냉큼 내 쫓아라!” 그래서 그 노인이 끌려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아브라함아” “예” “너 무슨 짓을 하느냐?” “저놈이 나쁜 놈이라서 내가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예절도 모르는 이런 사람 같지도 않는 놈을 내가 왜 대접합니까?” “이놈아, 나는 저 사람 회개하기를 100년이나 기다렸다.” “아차”하고 아브라함은 황급히“죄송합니다.”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내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어요. 100년이든 1000년이든 더구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원수라도 좋고 미운 사람이든 고운 사람이든 상관없어요. 좌우간 내 말을 듣겠다는 사람은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봉사치고 밑천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봉사가 이것입니다. 들어주세요. 귀 담아 들으세요.
지금 많은 사람 중에서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라고 기회를 줍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바울은 전도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사명적 입장에서 본다면 전도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구구한 감정이 달리 있을 수 있습니까? 말하라면 해야지“왜 또 같은 말을 하느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이것을 새로운 기회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써 주어지는 또 하나의 선교적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다시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어떤 점을 유념해야 합니까? 바울을 보고 그 지혜를 얻습니다. 실은 바울의 예리한 판단력으로 생각한다면 지금은 몹시 기분 나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베스도라고도 하는 총독도 그렇고, 아그립바 왕이라고 하는 형편없는 사람도 그렇고, 특별히 버니게라는 그의 아내도 그렇습니다. 이 세 사람은 높은 보좌에 앉아 있고, 그리고 재판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쭉 있으니, 생각하면 굉장히 기분 나쁜 상황입니다. 우선 도덕적으로도 마땅치 않아요. 분위기가 마땅치 않아요. 성급한 사람으로 말하면 정의감이 용납지 않아요. 이들이 차원 높은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이런 분위기 속에 세례요한이 있었더라면 눈을 부릅뜨고 사자 소리를 토해 냈을 것입니다. 있는 대로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 바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 정직할 뿐입니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 된 자기 페이스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분하고 억울하고 돼먹지 않았고 모순되고 … 이런 것을 생각하는 순간에 내 위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상관없어요. 제가 어떤 사람이든 개의치 않아요.
두 번째, 바울은 상대방의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상관하지 않아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비난도 비방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이것 하나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입니까? 그가 누구든 어떤 분위기든 어떻습니까? 상관없어요. 내 신앙 내 본분만 하면 되는 거예요. 대개 보면 다른 사람 잘못하는 것 꾸짖다가 어느 사이에 자기 본분도 다 잊어버려요.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그는 환경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지냈으니 “아그립바 왕이여 정상을 참작하소서.”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어디에 이런 정치가 있고 이런 재판이 있단 말입니까?” …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분위기에 대해서도 자기가 받은 처우에 대해서도 전혀 감정도 유감도 말도 없습니다. 다만 전도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대부분 여기에서 빗나가는 거예요. 바울은 지금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포착한 것입니다. 뒷날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씀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하나님 앞에서 네 본분을 다하라” 정말 자격이 있는 충고입니다. “사람이 어떻던 환경이 어떻던 그것을 묻지 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는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 된 네 직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바울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언제나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금 자기변명을 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전도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누가 누구에게 전하는 전도가 효과적입니까? 지금 재판정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판장이 있고, 원고가 있고, 피고가 있습니다. 누가 전도할 좋은 기회에 있는 것입니까? 재판장이 피고에게 전도하면 들어 먹힐 것 같습니까? 원고가 피고에게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이없게도 가장 가능한 사람은 피고입니다. 가장 억울하고 억눌림을 당한 그 사람이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만이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 실패한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실패해서 많은 사람의 동정을 받고 성공한 사람이 바로 그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파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 몸이 아픈 환자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피고입니다. 죄가 없는데 죄인의 모습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담대하게 저기 앉아 있는 재판장과 그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때가 유일하게 가능한 선교적 기회라는 것입니다. 아주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거기에는 대단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피고만이 선교가 유효하다는 그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보면 2절에 “아그립바 왕이여…”하고 시작을 합니다. 아그립바 왕을 칭찬합니다. 그게 선교 전략의 하나입니다. 보십시오. “유대인의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옵니다.” 내가 당신들 앞에서 말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고 분합니다가 아닙니다. 이것 모순입니다 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전도가 안 됩니다. 그러면 문이 막히고 맙니다. 바울은“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라고 긍정적으로 보고 가능한 면을 보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이 문제를 이 처지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행한 것’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사실을 잘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당신은 동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아그립바 왕이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결론을 보게 되겠습니다.
오늘 바울이 얘기한 변명의 요점을 살펴봅시다. 바울이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먼저, 6절에“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말씀의“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나와 당신의 조상, 곧 아그립바 왕과 나는 동족이라는 것입니다. 동질성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동질성을 기회로 변명하고 있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9절에“나도”라고 합니다. 이것도 동질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당신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당신과 똑같은 생각일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나도”-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나는 당신과 다릅니다.”이렇게 말하면 얘기가 다릅니다. 오늘 본분을 보세요. 나는 당신과 같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다, 내 전통이나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오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보다도 더 극렬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광신적인 박해자였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을 뿐더러 나는 다른 나라까지 가서 도망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아예 다 끌어다가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그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도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부터는 아닙니다. 그런고로 내가 아는 대로 당신도 알고, 내가 믿는 대로 당신도 믿고, 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도 역사하신다면, 당시도 나와 같아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귀중한 신학적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요 부활의 문제입니다. 8절에“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을 왜 못 믿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예수부활, 이 한 가지만 믿게 되면 당신도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니까. 예수 부활, 이것 한 가지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7절에“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이 말씀에 나오는“소망”에 대한 문제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소망이라고 하는 게 무엇입니까? 베스도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식해서 모릅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압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다윗 왕, 그리고 시편과 모든 선지자들의 기록에 여러모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앞으로 메시아가 오리라”하십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사람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에 대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은 똑같은데,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달라요. 뭐냐 하면, 유대 사람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신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유대 왕으로 세속적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욕망을 채워준다는 바로 그러한 협소한 민족주의적 소망입니다. 저들은 그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바울이 말씀하는 이 소망의 해석이 다릅니다. 예수 나심과 예수 사역과 예수 십자가와 예수 부활 - 예수 사건 안에서 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이 바로 소망의 성취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요.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같은데, 소망의 질이 달라요. 예수님께서도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하신 다음까지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6절에“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 끈질기게 물어보지 않습니까? 그들의 메시야관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7, 8절에“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인즉 이미 메시아가 왔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우주적 메시아로 그리고 종말적 메시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망은 약속을 벌써 성취됐어요. 성취 안됐다고 믿는 사람하고 됐다고 믿는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서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의 신앙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 때문에 바울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 부활입니다. 나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못 믿을 것으로 생각합니까?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런고로 이 소망의 문제는 예수 부활 사건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 같은 극악한 사람이 이렇게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고 핍박을 받아도 나는 여전히 복음을 끝까지 전할 것입니다. 여기에 숨어있는 바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를 보십시오. 내가 달라진 것을 보세요. 그러면 내가 왜 고난당하는가를 알고 복음이 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담대하고 온유하게 오늘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의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이렇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형편이든지 바울 같은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기회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가르쳐 줍니다.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그리고 나를 보세요. 주님께서 역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을 당신도 믿으면 나와 같아질 것입니다 하고 26장 끝 부분 29절에“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바울은 참 대단하지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나 같은 믿음 나 같은 은혜 나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 증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