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7-15 | 김남수 목사]
스데반 집사는 순교자의 첫 면류관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자는 집사 중에서 스데반의 활동과 순교를 특히 중요시하려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내분이 해결되고 교회가 더욱 부흥되었을 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스데반 집사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는 구제하는 일을 넘어서 사도들처럼 말씀을 전파하고 이적을 행하며 크게 유력하게 역사하다가 공회 앞에 잡혀 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 전파가 왕성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저들이 전하는 그 도에 모든 사람이 심지어 제사장까지도 복종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피스데이”라고 합니다. 피스데이는 “그 믿음”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이 도”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힘 있게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두고, 하나님 말씀이 왕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 도에 복종하였다 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본문은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제자의 수가 많아지고”여기 “제자”란 말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사복음서에서는 말하기를 제자는 예수님의 12제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제자는 일반교인들을 의미하고 12제자는 사도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제자는 일반교인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서 점 점 그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고 말씀합니다. 심지어는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장본인들, 그 무리들 가운데 허다한 수가 이제는 교회로 나오더라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은 물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제사장의 수가 8000 명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8절에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본문은 스데반을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충만”하다라는 말은 넘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인격에, 그 마음에, 그 영혼에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충만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에게 무엇이 충만했는지 본문은 다섯 가지로 말씀합니다. 먼저 8절에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절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다고 합니다. 또한 5절에 믿음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 성령과 지혜, 믿음이 충만한 그런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참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전도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더불어 변론을 하고, 힘 있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그냥 앉아 있을 수 있는 인격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활활 불이 붙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8절의 “은혜”와 “권능”을 한 번 자세히 비교해 봅시다.
은혜란 말은 영어로 Grace입니다. 이것을 현대어로 바꾸면 Sweetness "사랑스러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권능은 영어로 “Powerfulness”가 됩니다. Sweetness와 Powerfulness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사랑스러운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강하고 담대합니다. 은혜스러운가 하면,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가 하면, 사랑스럽습니다. 펄 펄 끓어오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모습은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그 온유함과 겸손함 속에 엄청난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불굴의 용기가 있습니다.
“스데반”이란 이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스데반이란 “스테파노스”에서 온 말로 스테파노스는 “왕관”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crown 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 부모가 이름을 지어 주었을 터인데, 그 이름을 지을 때 앞으로 어떤 왕관을 쓸지 미리 알고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왕관을 썼습니다. 첫 순교자의 왕관을 썼습니다. 그런 면류관을 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첫 순교자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 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승리자의 이름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9절을 봅시다.
9절에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 새 ”
여기 나오는 회당은 히브리인들의 회당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입니다. 예수님 당시, 교회사학자 요세푸스는 무려 480 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회당은 좀 특수한 회당입니다. 히브리인들이 해외에 나가서 살면서 히브리말을 다 잊어버리고 헬라 말을 하고, 헬라 풍속을 따르고, 생각도 상당히 헬라적 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본문의 회당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입니다. 여기 본문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문제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헬라파 유대인들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에 나타난 고유 명사 가운데 두 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리버디노”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리버디노는 로마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다가 자유민이 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개혁 개정 성경에는 리버디노가 자유민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3 종류 신분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민과 노예와 자유민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각기 1/3 정도 씩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에 끌려가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자유(Liberty)를 얻어서 “리베르티누스”가 된 것입니다. 이제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민이 된 그들이 귀찮습니다. 그래서 추방을 해 버렸던 것입니다. 추방을 당해 갈 곳이 없는 저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본문에 나타난 자유민 리버디노입니다.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흥미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9절 하반 절에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 새” “설교할 새”하지 않고, “변론할 새”라고 합니다. “강론”하지 않고, “변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헬라식 전도는 변론적 전도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말싸움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스데반이 변론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했다는 말씀입니다. 철학을 강론하는 것 같은 방법으로 토론을 하면서, 말싸움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변론할 새”- 이 변론은 서로 언쟁을 하는 토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공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분명히 스데반이 토론에서는 이겼습니다. 10절에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는 본문의 말씀대로 분명히 말싸움에는 이겼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던가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싸움에 이긴 자는 비록 이겼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진 사람은 진 사람대로 기분이 나쁩니다. 점 점 더 마음이 굳어집니다, 말싸움에 졌으니 이긴 저 사람을 우러러봐야겠다. 이렇게 신사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옳다고 받아 주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더욱 굳어질 뿐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일찍 경험했습니다. 그도 헬라파 유대인으로 변론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아데네에서 전도할 때에, 결국은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디모데전서에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딤전 6:20에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라고 유언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변론을 피하라-여러 번 같은 말로 훈계했습니다. 변론하지 말라, 말짱 헛것이다. 이겨도 소용이 없고, 져도 소용이 없다. 변론하는 방법으로 전도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당부합니다. 결국 전도는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슴의 문제입니다. 기분 나쁘면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 문 닫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마음 문 열도록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말싸움하지 말 것입니다. 말싸움하면 다른 방향으로 그 말을 중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싸움이 끝까지 가면 결국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아주 상당한 경험을 쌓은 뒤에 변론하지 말라고 권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했다고 합니다. 과연 무엇을 변론했겠습니까? 본문 14절을 보면, 성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변론한 것 같습니다. 14절에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아마도 스데반은 참 성전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건물이 아니라, 참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하늘에 있는 것이요, 성령께서 계신 곳이요, 말씀이 역사하는 곳이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을 기분 나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 자기들이 가지는 전통적인 해석을 소중히 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것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변론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이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런 해석은 결국 저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합니다. 저들을 기분 나쁘게 만든 것입니다. 비록 바른 말을 했다 해도 이것이 결국은 저들을 더욱 극악하게 만든 것입니다. 성전을 모독했다고, 율법을 모독했다고, 하면서 스데반에게 죽이겠다고 대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전 모독죄요, 율법 모독죄요, 사형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다. 10절에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은 변론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능히 당치 못했다면, 스스로 굴복하여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반발해서 마침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게 됩니다. 로마법을 어기면서까지 로마법에 의뢰하지 않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다. 이만큼 극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법을 어기면서까지 스데반을 죽여야 했을까요? 왜냐하면 이것은 지성인의 싸움이기 때문입니 다. 스데반이 지성인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도무지 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갈릴리 무식한 어부 같았으면 “이 무식한 것들”하고 내버려 둘 수도 있습니다. 상대할 것이 못 된다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경우가 다릅니다. 그는 확실한 지성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도 보면 논리적으로 전합니다. 스데반의 신앙은 한 마디로 체험적 신앙이요, 논리화된 신앙이요, 확실한 지식으로 정리된 신앙입니다. 그래 누구도 당할 수가 없지요. 당할 수 없으니, 죽일 수밖에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아닌 스데반을 제일 먼저 죽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 당시 제일의 사도가 아닙니까? 저들의 원흉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일 먼저 죽인 것은 베드로가 아닌 스데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지성적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예수를 감정적으로 믿고 강하게 믿는 것 같지만, 사실 체계화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리화하고 신학화하지 않습니다. 그 신앙은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확실한 체험 위에 지성적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신앙입니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으로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저들은 스데반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결론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지금 저들은 스데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를 갈면서 돌을 던집니다. 그러데 정작 죽음을 눈앞에 둔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평온하기만 합니다. 이것이 참 평안입니다. 모두가 죽이겠다고 아무리 떠들고 야단을 해도 그 마음은 고요합니다. 조금도 거침이 없습니다. 그는 평안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자기를 향하여 욕하는 저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깁니다. 스데반은 그 마음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에 부활의 약속과 함께 하기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굴로 나타난 것입니다. 모름지기 예수 믿는 사람은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썩어가지고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천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말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평화로운 것이요, 행복한 것이요,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실로 어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이를 갈면서 자신에게 원수처럼 대드는 저들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동료들입니다. 이런 저들이 이제는 스데반을 죽이겠다고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런 참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은혜 충만한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