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1-16 | 김남수 목사]
본문은 공회 앞에서 진술한 스데반 집사의 변증설교입니다.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제자의 설교 중에서 가장 긴 설교입니다. 설교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1-16 절까지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해설하는 것이고, 둘째 17-43 절은 모세의 율법을 해설하는 것으로 모세의 역사를 밝히는 것이고, 셋째 44-53 절까지는 결론으로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와 성전을 예로 들면서 주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형식주의에 빠져 메시야를 죽인 유대인의 죄를 공격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변증자의 조상이요, 어떤 의미에서 바울의 선구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 방법론이 바로 이 스데반의 설교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방법론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면서 전도하다 그 역시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1 절에 “이것이 사실이냐” 무서운 질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한 그는 여기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을 알면서도 그 원수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가 가진 성경 지식을 다 동원합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성경에 대한 이해요, 기독교에 대한 구약적해석입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부활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다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의 대하여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모습인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 지식으로 가득합니다. 확신에 차 있습니다.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공회 앞에서 설교한, 처음이자 마지막 설교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를 인용합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 당장에 돌을 던질 것입니다. 그 당장에서 예수를 믿으라 한다면 돌부터 던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하고 말문을 엽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아브라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저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자칭하고 있는 터이라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엄숙해 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그들이 처해 있는데서 자신의 간증으로 시작할 때 관심을 가지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예로 들어 영생을 얻고 나니, 이렇게 이렇게 해결되었다고 할 때, 듣는 분들이 관심을 갖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저들의 문화권에서 출발합니다. 저들이 알고 있는 종교적, 문화적, 전통적 문화를 스데반은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가정 방문을 갔을 때, 그에 관심사나 취미가 무엇인지 집안을 죽 한번, 살펴보고 그것을 주제로 대화를 시작할 때 대화가 거부가 없이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상대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전도는 상대방의 관심사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설득 방법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를 거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저들이 가장 우러르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고 입을 열자 당연하게 모든 사람은 조용하게 일제히 주목합니다. 왜 아브라함 얘기를 할까? 지금 스데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할 때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약속이 있고 명령이 있습니다. 약속, 명령, 순종 - 이렇게 해서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에 보면 복 그대로 현장에서 주시지 아니하고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어야지요. 미래적인 것이지만,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 입니까? 땅과 자식이었습니다. 땅을 주시겠다, 자식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선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우선 발붙일 만큼의 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일생을 나그네로 순례자의 길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먼저, 참 땅이 어디냐 이것입니다. 땅을 주신다는 데 어떤 땅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이 말씀을 믿고 지금도“이게 우리 땅이라며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습니다.”-그리하여 땅 문제는 오늘날 까지 숱한 말썽을 빚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또 하나는 자식의 문제인데, 자식을 주신다고 했으면 당장 주시지 아니하고 성경에 보면 25년이 지나서야 주십니다. 말이 25년이지 이것 기다리기가 쉽습니까? 그래서 현재와 약속이 성취되는 시각과 그 사이에 믿음이라는 것이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사건이 사건화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당장 주시지 않고 이렇듯 미래에 주시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준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키워야 하고, 의식고, 가치관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연후에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또 엄격히 말하면 우리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왜 빨리 내 병을 고쳐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가 나에게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약속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봅시다. 약속은 확실히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수직적인 약속입니다. 해약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것입니다. 가라, 주리라,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일방적이지요. 이 약속은 지키는 자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갑니다. 약속은 분명히 살아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이 약속으로 말미암는 축복은 무효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지키는 자에게만, 약속의 효력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살아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모든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도록 전해야 하고, 믿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언약이란 뜻이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브리트”입니다. 이 브리트를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약속, 언약을 말할 때에는“카라트 브리트”가 단연코 많이 쓰입니다. “카라트”는 자른다, 쪼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할 때에 짐승을 잡아 반을 쪼갠 다음에 그 사이로 약속을 한 사람이 지나갔다가 돌아오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이 약속을 어긴다면 짐승을 반으로 쪼갠 것처럼 무서운 저주가 그에게 임하여 둘로 쪼개버린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약속을 깨뜨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약속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하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십니다. 성경은 언약 약속서 입니다. 구약, 신약,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신뢰하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런데 약속에는 명령이 따릅니다. 이제 문제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이냐 그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일생 전부가 믿음 그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에 대한 수용적 자세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순종입니다. “떠나라고” 하면 떠나고 “가라”하면 갑니다. 다시 돌아오라 하면 “예”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렇듯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왜 입니까?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 순종에는 인내가 따릅니다. 오래 오래 기다립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소망적이요 미래적입니다. 당장 받는 것은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먼 미래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을 믿고, 고향을 떠나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사라가 단산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고 하셨기에 그것을 믿고 25년을 기다렸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자식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고 기다렸습니다. 아들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은 너무하셔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너의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아브라함은 “아멘” 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렇듯 그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절대로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히11장을 보십시오. 16절에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발붙일 만큼의 땅도 갖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땅을 찾아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약속의 땅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히브리서는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아브라함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에 그는 조금도 이 땅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안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후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믿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믿음 없는 후손들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종종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도 흉년이 들자 그 잠시를 못 참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6,7절에“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간 것은 잘못입니다. 애굽으로 갔다가 자기 목숨도 잃을 뻔하고, 아내 사라마저도 빼길 뻔하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무사히 돌아왔지만요, 어쨌든 땅에 대한 그 믿음이 한 번 휘청할 순간이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자식을 10년 동안 기다리다 지쳐서 하갈이란 여종을 첩으로 취하게 됩니다. 외도를 하게 됩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뒤에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시고 거듭 자식을 주겠노라 약속을 하십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하고 약속을 하십니다. 창 18장을 보십시오. 세 천사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10절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어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지가 오래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까? 오죽 기가 막혔으면 사라가 장막문에서 이 말씀을 듣고 웃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보다는 믿음이 부족해서 웃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람 웃기시는 구먼” 그래서 웃는 것입니다. “경수가 끊어진지가 언젠데 아이를 낳는다는 말인가?”하고 웃는 것입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13, 14절에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고 꾸짖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라는 두려워서 자신이 웃는 일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웃지 아니 하였나이다”하고 그 사실을 부인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 만은 그때 저 같았으면 “믿음이 부족한 여자야 왜 웃느냐 아들을 주리라고 약속한 것 취소하겠다.”하고 말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하실 뿐, 그 잘못을 눈감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약속하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것은 일방적인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마지막 말씀을 믿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롬 4:9절에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또 갈 3:6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이 들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참된 믿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십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논조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넘어가서 이것이 바울 신앙의 주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박국 2:4에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브라함의 믿음 그대로가 그리스도인의 신앙 모델이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지 궁금하거든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끝까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약속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