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1-22ㅣ김남수 목사]
베드로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과 능력 있는 설교를 통해 많은 회심자를 얻고, 예루살렘교회가 급속히 성장하자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시기하고 긴장하여, 사도들을 잡아 심문하므로 초대교회와 유대주의자들의 충돌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어나 그 복음을 계승하고 활발히 전하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또한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충돌로 복음은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계로 전파시키려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였으며, 예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습니다(막13:9-10). 오늘 본문은 사도들의 잡힘과(1-4절), 제 1차(5-12절), 제 2차(13-22절)의 심문을 전하여 줍니다.
I. 유대주의자들의 박해가 시작됨(행4:1-4)
1절에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은”
한마디로 다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2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전함을 싫어하여 .....”라고 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전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 부활의 도로 말미암아 제사장 및 사두개인에게는 큰 손해가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으나 그러나,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은 믿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사두개인들)은 사상적으로 이렇게 서로 차이가 있어 대립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리새인들은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이에 반하여 제사장(사두개인)들은 진보적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나,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기에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하나가 되어 연합을 했습니다마는, 저들은 이렇듯 만나면 서로 싸우는 대립관계에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만, 내심 부활 전함은 좋아합니다. 자기편이니까요.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에게 “봐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들이 지금껏 주장한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다.” 부활이 있다. 천사도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때문에 제사장(사두개인) 입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바리새인들 때문에 제사장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의 도전함을 싫어했던 것입니다.
3, 4절에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드디어 초대교회에 박해가 시작됩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사도들을 옥에 가둔 것은 유대인의 법에는 밤중에 재판을 하지 않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리 사두개인들이 말씀전파를 방해했을지라도 복음은 이미 전파되어 믿는 사람의 수가 남자만 5000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믿는 사람들의 수는 더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II. 첫 번째 심문(행4:5-12)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공회 앞에 세우고 첫 번째 심문을 합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가 메시아시오, 그 외에 다른 구주가 없는 것을 명백히 입증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잡혀가 대제사장들과 그 문중들에 둘러싸여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 곳에는 베드로와 요한 외에 병 고침 받은 앉은뱅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두고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7절에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
이런 기적을 행하는 것은 배후에 권세를 준 어떤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8절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이 충만 이라는 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령의 일반적인 은혜는 중생과 성화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하게도 되고, 그리스도를 닮아 성장되어 갑니다. 봉사하고, 섬기는 등, 힘 있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사명완수의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은혜의 선물 즉 은사입니다. 이 충만은 헬라어로 “플레로”인데 생활 충만을 말합니다. 성령 충만을 정신이 몽롱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먼저, 죄를 회개하여 심령이 깨끗해지고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영적으로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이제는 고난이 있다 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습니다. 모든 환란과 핍박, 고통에 전혀 개의치 않는 신령한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 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신령한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마10:17-20 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입을 엽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곧 신령한 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요, 신령한 지식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자를,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복음적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신령한 지혜입니다. 실제로 예수 잘 믿는 사람은 평소에는 별로 말 수가 적지만, 신앙적으로 핍박을 받게 되면 말을 똑똑하고 조리 있게 아주 잘 합니다.
9, 10절에 베드로가 파격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10절에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것이 복음의 골자입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이 앉아 있습니다. 가야바가 지금 베드로 앞에 있습니다. 다른 대제사장들과 문중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소, 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셨소, 그 분은 절대로 죽을 분이 아니요, 그런데 당신들이 죽였소.”- 이 얼마나 직설적이고 담대한 선언입니까?
나아가 베드로가 그 사건을 설명하는데,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일 밖에 없소, 그런데 그 거룩한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을 나타내어 이 사람이 당신들 앞에서 걷게 된 것이요”하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제 그들은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그랬듯이 베드로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듯 무서운 심판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이 지금 여기에 역사하고 계시다”하는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죽인 이 사람이 이제 만왕의 왕이 되시고, 메시아가 되시고, 재림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12절에 가서 결론을 내립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복음의 절대성을 말씀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독선적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이니까요. 예수님 이름 외에 다른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기도교인처럼 고집 센 사람이 없겠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이 진리를 절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담대히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합니다.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이렇듯 복음이 절대화할 때에 힘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화하므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는 순교 역사다”라고도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름은 오직 하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III. 13-22절은 두 번째 심문입니다.
사실인 즉 일방적 명령이요 억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이, 위협하여 놓아 보낸 것입니다.
13절에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학문이 없다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은 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이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요한도 글을 알았고,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보여주듯 그리 무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베드로 서신은 오히려 진리가 참 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사는 유식한 사람들이 볼 때에는, 베드로와 요한은 촌사람 어부들 글을 모르는 그런 무식한 사람들인데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니 그야말로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공회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바로 그 공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공회에 나와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야말로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용기요, 성령 충만한 보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용기는 인간적인 용기가 아닙니다.
또한 베드로는 변론에 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낱 갈릴리 어부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에는 베드로가 얼마나 말을 잘 하는지 모릅니다.
19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어디서 이렇게 담대한 용기,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14절에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병 나은 사람이 중요합니다. 40 세가 넘도록 앉은뱅이였던 그를,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던 그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켰습니다. 그가 지금 제사장 앞에 건강한 몸으로 서 있습니다. 그가 서 있으므로 모든 박해자들이 할 말을 잃게 됩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나아서 눈앞에 버젓이 서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한편, 돌려서 생각해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또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으켜 세워져서 지금 눈앞에 서 있습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예수님의 생명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러한 역사가 이루어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용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고 믿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순간에 감격하고 용기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지레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것 같지 않아, 내가 나를 봐도 쓸모없으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쓸모없을 꺼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용기는 우러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예수님의 생명이 지금 내 안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는 참으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 없이 성실하게 봉사합니다. 헌금 하는 데에, 봉사 하는 데에, 용기가 있고 담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하는데 열심히 있습니까? 앞으로 열심히 있을 줄로 믿습니다.
지금 병 나은 사람이 눈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용기의 근원이 되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베드로의 용기는 근본적으로 그의 진실한 경건에 있습니다.
19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의식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베드로는 지난 날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사람 앞에 있었기 때문에 비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눈총이 무서웠고, 사람의 핍박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날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머리를 굴리고, 임시방편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진실한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있다는 확실한 자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박해를 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로 순교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이 불과 수 일 전입니다. 베드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기독교가 33번 이상이나 박해에 부딪친 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핍박은 언제나 있습니다. 복음은 핍박과 함께 전해집니다. 교회의 생명력도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 편하기만 하면 교회는 약해집니다. 핍박 가운데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의 특징입니다. 지금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터키 등에서는 기독교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모슬렘 지역에서는 예수 믿다가 온 가족이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지금 IS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무참히 참수합니다. 기독교와 모슬렘이 종교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인이 참수를 당하고 있습니다. 정 철화 선교사님한테서 며칠 전에 카톡으로 기도부탁이 왔는데, 기독교인이 집단으로 IS에게 45 명이 잡혀가 지금 생사도 행방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20 절을 눈 여겨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므로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은,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나가서 전도합니다. 선한 일에 몸 바쳐 봉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갈1:8에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렇습니다. 일 년이 다 가도록 누구한테 전도 한 번 안하고도 편안하다면, 영적으로 깊이 잠든 것입니다. 죽은 영혼입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예수님 전하다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슬렘 같은 교도들은 죽음으로 테러하는 것을 순교라 생각하고 지금 폭탄 테러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천지 같은 이단도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잠잠하며 조용합니다. 전도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지만, 지금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볼 때, 특히 지금은 무장해서 열심히 전도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교회에서 전도 폭발 훈련, 매주 주일 오후에는 앞으로 다리예화 개인전도 훈련을 할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밤 2, 3시까지 다리예화 개인 전도방법을 계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다 참여하여 훈련받아 이해하고 숙지하여 전도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제 오후에도 많은 분들이 노방전도에 나와서 전도했습니다. 앞으로 계속 참여하여 전도하면 교회가 부흥되어 갈 것입니다. 4월 5일 부활주일에는 VIP초청 전도 집회가 있습니다. 아를 위해 3월 23일부터- 3월 28일까지 새벽 5:30에 총동원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모두 참여하여 영혼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전교인 작정 새벽기도 때에는 직장생활하신 분들을 위해 간단한 아침 식사도 준비되어 있어, 기도를 맞힌 후 곧 그 자리에서 출근할 수 있습니다.
초청전도 집회 시 초청할 분을 세 사람 이상 정하여,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어 관계를 맺으므로 먼저, 마음을 얻어 초대하여 그분들이 구원받아 천국 가도록 하십시다. 이렇게 전도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구경꾼이 되지 말고, 잠에서 깨어나 능동적으로 전도훈련을 열심히 받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전도하여 전도를 생활화 합시다. 초대교인들은 잡아 가두고, 매질하고, 고문하고, 죽였지만,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전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심령에 전도의 불이 활화산처럼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전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보고 듣고 체험한 예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영혼구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역사를 우리에게 많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를 전하지는 않고, 또 다른 역사를 베풀어 달라고 구하고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한 역사를 감사하며 전하면, 또 다른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지 않으면 은혜도 끝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전도에 무관심 하지 마십시오.
금년 우리교회의 목표들을 아시고, 이 목표 달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나라 일에 무관심하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에게 무관심하실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축복만 구하지 마십시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십시다. 이제 우리 모두 다 일어나 기도하고, 전도하고, 하나님을 섬기십시다. 딤후2:9 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핍박 가운데도 줄기차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많은 사람이 핍박으로 순교하고,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복음은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여기서 옳은가 라는 말은 옳으냐 그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옳으냐의 헬라어 “디카이오스”는 의냐, 불의냐, 어느 쪽이 의로우냐를 묻는 말입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옳으냐를 묻는 말입니다. 사람을 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현재를 볼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의로운 일입니다.
지금 공회의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21절에 “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
지금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줄 알면서도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핍박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려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회개하면 자기들의 지위가 무너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고 베드로를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저들이 진정 예수님을 믿었다면, 더욱 존경 받는 귀한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워집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의 신령한 용기를 바로 깨닫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하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다물어서도 안 되고, 행동을 중단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처지, 형편, 지위, 지식, 모든 것을 동원하시어 오늘도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자 하십니다. 그 역사적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다시없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용기 있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