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22-33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그리스도인 가정의 신성성을 고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할 때, 본문을 신혼부부에게 꼭 읽어주는 말씀으로 30년 동안 신랑신부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독교인의 가정윤리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됩니다. 이 말씀이야 말로 근본적인 것이고 원리적인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정창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우주만물과 지구의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끝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 맨 마지막에 가정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직접 주례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가정은 창조의 원리인 동시에 축복의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정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고, 또 이 원리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창조의 원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였습니다(창2:18). 혼자 생활하면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집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고독합니다. 그 다음에 허무합니다. 그 다음에 방종합니다. 이 세 가지 함정이 그 앞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윤리학자들은 고독으로부터의 자유, 허무로 부터의 자유, 방종으로 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주 성서적인 깊은 의미를 함축해서 이렇게 간단하게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이 명하기를 만일 결혼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너는 어찌하여 창조주 명령을 거역하느뇨? 하며 강제라도 꼭 결혼하게 합니다. 결혼 안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정은 두 사람이 모인 사회의 최소 기본단위인 공동체이므로, 각각 자기의 의무를 깨닫고 그 의무를 다 할 때,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아내와 남편의 의무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Ⅰ. 아내의 의무(엡5:22-24)
하와가 먼저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성경은 아내의 의무를 먼저 말씀합니다.
엡5:22에“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하나님 말씀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합니다. 아내의 의무는 한 마디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거 인권문제 아니냐? 가부장적이라니, 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인가. 이러고 대들 일이 아닙니다. 잘 읽어 보십시오. 충분히 복종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요 “주께 하듯 하라” 했습니다. 주님을 기준으로 신앙적으로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라. 하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주님께.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 하였습니다. 복종하라 - 참으로 높고 엄숙한 명령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갈3:28). 본 절은 남존여비 사상에 근거하여 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 동등합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므로 여자가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가정의 아내와 남편 사이의 질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내는 자기 남편의 한사람에게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부간에 지켜야 할 생활윤리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기 남편에게만 복종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남편에게 복종하되 주님의 사랑과 법도 안에서 복종해야 합니다.
남편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의 도리에 합당한 일에 대해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아내의 의무이며, 그 가정에 화평과 기쁨이 오게 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엡5:23에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본 절의 말씀은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까닭을 밝힌 말씀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모든 주권을 가지신 것처럼 남편도 또한 가정의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온 몸의 신체조직에서 머리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머리가 모든 사고의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체는 머리를 따라서 움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남편이 능동적이 되어야 하고, 아내는 수동적이 되어 남편을 받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하나의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시며 또한 친히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주는 교회를 구원하고 건지시는 분입니다. 어찌하든지 교회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저주와 질병과 가난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건져내어 구원하신 것처럼, 남편도 아내의 약한 점과 미약한 부분을 보완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모든 죄와 허물을 십자가에서 걸머지시고 희생하신 것과 같이, 남편은 희생과 사랑으로 아내를 인도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구원하는 머리가 되어야지, 아내를 파괴하는 폭군의 머리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엡5:24“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한 교회의 순종을 비유함으로서 아내의 복종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경우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여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사랑에 감사하여,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이러므로 이와 같은 순종은 결코 노예로서 비굴함이나 맹종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아내도 남편과 인격 대 인격으로서 동등한 위치에서 남편의 사랑과 이해를 감사함으로 받으며, 이제 보답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아내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순종하되 범사에 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 어긋나지 않는 모든 일에 대해 남편이 권위를 행사하며, 아내는 그 인도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Ⅱ. 남편의 의무(엡 5:25-30)
다음에 이어지는 남편의 의무에 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위하여, 그 분을 위해 복종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순종합니다. 이 깊은 면을 생각해야지, 복종만 생각하면 안 되지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심같이 그렇게 희생적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받는 여자가 그 남편을 위해서 복종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요? 그 길이 힘든 길인가요? 복종이 행복한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은 그런 희생을 남편이 해 준다면, 내가 그 남편을 위해서 밥 좀 한다고 불평하시겠습니까? 무엇이 불평이겠습니까? 무슨 고생을 하던 그것이 그리 어려운 짐이 되겠습니까? 성경은 이 관계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남편들아 아내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런 두 사람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세계에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으나 사실은 가정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점점 더 심각해 갑니다. 가정이 다 깨져 나가니까요. 비혼 상태, 파혼 상태, 이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집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톰 브라우닝>이라고 하는 시카고 대학 교수가 이 문제를 가지고 강연을 했는데, 그는 세계적으로 복잡한 문제들을 죽 말하고 나서, 결국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 딱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입니다.
스스로 희생할 마음이 없습니다. 봉사할 마음이 없습니다. 남편을 위해서도 그렇고, 아내를 위해서도 그렇고, 자식을 위해서도 희생이 싫습니다. 이기주의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 어머니들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았습니다. “왜 젖을 먹여? 우유 먹이면 되지, 젖 물리면 몸매가 상하는데...”하였습니다. 몸매 그것, 어차피 구겨질 몸매를 아끼느라 젖을 물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래 봤더니 결정적으로 유방암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젖을 아끼던 사람들에게요. 그 다음에는 아이들에게도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신적으로요. 심지어 요새 와서 보면 우유만 먹는 아이들에게 비대증이 많습니다. 모유를 5개월까지 먹은 아이들은 비대한 것도 없고, 유행성 질병에도 별로 걸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 모유 먹이자 해 가지고 요새 더더구나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까지 새삼스럽게 모유를 많이 먹인다고 합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이기심 탓입니다. 극단적인 이기심 - 희생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가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그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희생을 통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모든 참 기쁨이라는 것은 희생과 수고에서 오는 것이거든요. 이기주의는 근본적으로 고독하고, 이기주의는 언제나 불행하고, 이기주의는 쓸쓸한 것입니다. 마침내는 절망으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기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희생을 통해서 그 속에 행복과 기쁨이 있다는 진리를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성 자체의 상실이 오고 마는 것입니다. 기쁨은 희생에 있는 것입니다. 봉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복종과 사랑, 복종과 희생, 사랑에 진정한 가정의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한 희생적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에 제가 설교 중에 예를 든 기억이 나는데, <데이빗 아우스버그>라고 하는 박사님이 “사랑의 대결”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속에서 부부싸움의 세 가지 유형을 말하고 있는데, 부부싸움을 한참 하고나서 결론을 어떻게 맺어지느냐를 봅니다. “내가 이기고 네가 졌다”이렇게 결론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겼다, 너는 졌다, 사과 받고,,, 이렇게 되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잠깐 휴전 된 것 같으나, 이내 또 연장전이 벌어집니다. 그때부터 두고 보자 합니다. 연장전의 선포입니다. 반대로, “당신이 이겼고, 나는 포기 했다. 이제 더는 안 싸울 거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나는 포기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증오가 시작 됩니다. 두고 보자 이것입니다. 두 경우 다 실패한 경우입니다. 이겨도 소용없고, 져도 소용없습니다. 이기고 난 즉은 연장전이 시작되고, 졌다고 선언하는 순간, 다음에 증오가 싹트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소용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이분은 도어맷트(doormat)를 이야기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들어가니까 door앞에 신발의 흙을 떠는 mat를 깔아 놓습니다. 우리교회도 현관문 들어오면 doormat, 신발 흙 털 개가 있습니다. 이분은 doormat식 부부싸움이 가장 바로된 것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나를 밟고 가라, 진흙까지 집안에 들여 놓지는 말라. 이것입니다. 나를 밝고 가라, 나를 희생할 것이다. 그러나 가정은 소중한 것이다. 우리의 가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나는 doormat같이 밟혀도 좋다. 그러나 가정과 사랑의 고귀함은 지켜다오. 바로 이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이 마음이라면 부부 싸움할 집이 없습니다. 나는 신발 흙 털 개요. 밟고 지나가시오. 이 사람이 싸울 사람입니까? 이 길 밖에는 참으로 사랑의 길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사랑은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만 순수성을 지켜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싸움을 한 날에도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예배드리는 가운데 마음이 깨끗해지고, 뭐 내가 잘 했느냐, 네가 잘못했느냐, 하는 것도 없어집니다. 또 다시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말씀이 계속 공급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은혜가 계속 공급될 때, 그 사랑은 생명력을 지켜 갈수 있는 것이고, 더욱 발전하게 되는 것이고, 사랑의 높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또 본문 27절에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거룩하고 흠이 없게, 깨끗하게,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렇게 지금 순수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합니다.
본문 28절에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리스도가 교회를 자기의 영광으로 세우며,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는 것 같이, 남편도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엡5:29-30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의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임이라”
본 절은 아내를 제 몸 같이 사랑해야 할 이유를 밝히고, 그것에 대해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육체, 곧 제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양육하고 보호합니다. 자신의 몸이 불완전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몸을 돌보며 사랑하고, 자기 몸의 유익한 것을 열심히 공급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도, 자기 몸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보호해야합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들이 어느 날 아인슈타인박사 댁을 방문하여 아인슈타인 사모님을 만나가지고, “사모님은 아인슈타인박사님의 상대성 원리를 늘 들으시니까 좀 이해하고 계시겠습니다!”하고 물었습니다. 부인이 이 질문을 받고 껄껄 웃으시면서 대답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는 것이라곤 오직 한가지예요. 내가 사랑에 불붙고 있을 때 남편도 사랑에 불붙고, 내가 사랑이 불 꺼지면 남편의 사랑도 불 꺼집니다. 이것이 상대성원리요“ 그러더랍니다. 나하기 나름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상대방 사랑도 움직이더라, 이것입니다. 내가 움직인 것만큼 움직입니다. 내가 뜨거워진 만큼 뜨거워집니다. 문제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Ⅲ. 남편과 아내의 공동적인 권면(엡5:31-33)
31-33절은 남편과 아내에게 공동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엡5:31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떠나”, “합하여”,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것을 안 지킵니다. 그래서 부모를 “떠나지 않고” 플러스 알파로 아내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복잡해집니다.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함께 있든 따로 있든, 정신적으로 일단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를 보면 자녀가 결혼한 다음에 “애들이 일 년 동안은 우리 집에 살게 합니다.” 가풍을 익혀주기 위해서 붙들어 둘랍니다. 뒀다가 아이생긴 다음에 내보낼 랍니다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충고합니다. 긴 설명 안 하겠습니다. “먼저 내 보내시오. 그게 성서적입니다. 성경에 내 보내라고 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경보고 눈치껏 알아야지요.” 성경에 눈치 볼 것이 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처음 결혼한 지 1년 동안은 군대도 내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기쁘게 하라. 하였습니다. 사실 1년 동안이라는 것이 아주 귀중한 시간이거든요 - 긴 결혼생활의 오리엔테이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싸워도 그때 싸우고, 터져도 그때 터져야 합니다. 서로 가까워지는데 일 년 걸립니다. 성경적으로 이래서 이 동안에는 아무도 거기에 끼면 안 됩니다. 뭐 시어머니 눈치보고, 시아버지 눈치 보고, 시누이눈치 보는 동안에, 벌써 생각이 딴 데로 가는 법입니다. 오로지 두 사람, 이렇게 만나서 싸우고, 싸우든 터지든, 여기서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이가 생기면 그때 들어와서 시집과 함께 살든지 말든지 하게 하십시오.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합니다.
시집을 갔으면 친정에 자주 전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들락날락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 장가를 가 놓고 신혼여행 가서까지 “엄마”하고 전화 거는 팔푼이, 칠뜨기, 마마보이... 이거 되겠습니까? 사내 녀석이 부부싸움 하다말고 전화 걸어 “엄마 나 어떻게 해”하고...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그래서 신부들이 이런 탄식도 한다고 합니다. 저런 걸 남편이랍시고, 데리고 살려니 한심하다. 존경심이 안 가지요. 존경이, 믿음이 안 가지요. 내가 저 인간한테 운명을 맡겼는데, 무슨 인간이 저래? 피차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본문 33절에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라 존경과 사랑이 함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32절에“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핵심은 동시에 아내와 남편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바울 사도는 사랑과 복종이라는 한 쌍의 말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끝맺음은 사랑과 존경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남편의 사랑은, 아내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의도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그를 위해 희생하며 봉사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아내에게 요청하는 복종과 존경은, 남편의 사랑에 대한 아내의 순응과 하나님께서 남편을 머리되게 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런 존재로 남편이 되어 지기를 바라는 아내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서로 사랑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자녀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웃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깊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