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11-16ㅣ김남수 목사님]
바울은 지금까지 엡 4장에서 교회의 일치에 관해 말해왔으나 11-16절까지 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역의 선물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본 절은 직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직분이 있는데, 본문에는 중요한 다섯 가지 직분 즉 오중사역을 말합니다.
먼저, “사도”입니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지상에 계실 때 열두제자를 택하셨습니다. 사도란 말도 간간히 쓰이지만, 공간복음에서는 사도란 말 대신에 제자란 말을 씁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제자란 말을 씁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제자란 말을 일반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모든 교인들을 두고 다 예수의 제자라고 말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의 별명이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공간복음에 나타난 12제자는 어떻게 됩니까? 사도란 말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불러 세우셨던 제자들, 뒤에는 가롯 유다가 빠지고 사도 바울이 의미상으로 그 위치에 들어갑니다마는 이 몇 분만이 사도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사도란 11제자와 사도 바울, 거기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의 뒤를 잇는 제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에서는 속 사도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감독입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란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고, 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해서 사도됨을 증거 해줌으로 기적과 표적이 함께 합니다. 그런 분들이 사도입니다. 이런 사도는 그 당시로 사도 요한까지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본문에 “선지자”라 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라 하면, 꼭 멀리 있는 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예언자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원래의 뜻은 “담대하게 말한다,”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을 선지자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사람에게 말하도록 지명한 사람, 그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선지자는 성령으로 불러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복음 전하는 자”입니다. “유앙겔리스타스”입니다. 이 말은 조금 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뜨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직접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일곱 집사중의 하나인 빌립은 나중에 전도자라 불렀습니다. 이를 보면 열심히 복음을 위해 봉사하여 열매가 나타나면,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더 높은 봉사자(직분자)로 등극시켜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교회가 정착되면서 교회구조가 다 설립이 될 때, 그때 가서 생긴 것이 “목사와 교사”입니다. 목사란 원래 목자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지상명령으로 돌아가 마 28:19에 보면,“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다니며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 하십니다. 세례를 주고 성례에 대한 명령을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목사입니다. 그 다음 20절에는 “네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하십니다.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 - 이것이 바로 교사 선생입니다.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이 교사의 몫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목사는 두 가지 일을 겸하는 것입니다. 성례를 집행하는 책임이 있고, 동시에 가르치는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이 오중 사역자를 그리스도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 교사는 하나님의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원한다고 자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선지자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계속 이어져 복음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교회 안에 이런 여러 중요한 직분들을 세우시고, 오중사역자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은 그 직분들이 주께서 주신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12절에 “이는 성도들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오중 사역자를 세우셔서 일하게 하시는데, 이는 즉 그 목적을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 교회(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중 사역자의 기능을 12절은 말씀하고 있는데, 목적은 먼저, “성도를 온전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씀은 간단히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머리가 주신 직분의 기능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합니다. 온전케 하는 것 - 이것이 바로 오중 사역의 기능의 본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직분 자를 세우는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려 함이다 입니다. 이래서 많은 직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오늘 날에 와서는 지금 교회에 교사도 있고, 찬양 인도자도 있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목자 등 직분 자들이 있습니다. 의미상으로 보면 모두가 다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자 세우신 것입니다. 이 직분의 어느 누구도 영광을 받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직 머리되신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합이라.” 합니다. 서로 봉사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모든 지체는 다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분은 그리스도, 머리뿐입니다. 머리만이 섬김을 받고, 모두는 다 섬기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높임을 받는 분은 그리스도뿐이요, 우리는 모두 섬기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일이라도 사양치 않고, 다 같이 봉사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본 절에 보면,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몸을 세운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손, 발, 눈, 코, 입 할 것 없이 전부가 다 몸을 세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 손이 자기 발을 해하지 못합니다. 또 발이 손에 손해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가 자기 몸을 자해하고 있다면, 그 머리가 고장 난 사람입니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들린 자가 자기 몸을 해한 것처럼, 귀신에게 잡혀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머리와 몸 사이에 교통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몸의 지체가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몸을 세우려고 합니다. 건강하게, 온전하게 서로 세워가는 것, 특별히 머리, 그리스도를 높이 세워나가는 것이 몸의 기능입니다.
지체된 우리는 항상 교회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협조적인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사이에 교회를 세우는 것인지, 허는 것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들썩거리고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 말이나 듣고,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세우는 것이냐, 허무는 것이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본자세를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본 절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른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목회하는 목적을 말하는 것이고, 목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뒤를 따라 그의 분량에까지 가까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 감히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쳐다볼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높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해서 지레 포기합니다마는 그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 거기에다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모델로 하고, 오늘을 살아가야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생의 표본을, 우리 장성의 목표를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 거기에다 목표를 두고, 지난날에 살아오던 그 악순환적인 고리에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된다.’ ‘안 된다’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하고 말씀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함께 가야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고, 이렇게 해나가는 가운데서 그 장성한 분량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 장성한 것이 어떤 것인지 본문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장성하게 되면 요동치 않는다고 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믿기는 하는데 지식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을 보면, 지식은 좀 있는 것 같은데 믿음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합해서 높은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깨달음이 없는 유치한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 가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진리를 이해하게 되지요. 또 진리를 생활에 옮길 수 있는 구체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또 이제 어려운 핍박이나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 변증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기회에서 스스로 장성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적인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장성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을 보면 참 유치해서 꼭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이사람 소리, 저사람 소리, 이 소리, 저 소리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흔들흔들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시험에 빠지는데, 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본 절은 성장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첫째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하였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범사에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나무를 생각해봅시다. 비바람이 치면, 흔들면 흔들수록 이 나무는 깊이 뿌리가 내려갑니다. 비바람이 치지 않으면, 뿌리가 깊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이 내려가지 못하면, 또 높이 자라지도 못합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나무가 비바람 쳐서 흔들어 놓아야 점점점 뿌리가 깊이 내려가는 것과도 같이 “범사에 자란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중생한 사람, 믿음이 바로 선 사람은 범사에 자랍니다. 실패해도 자라고, 성공해도 자라고, 칭찬을 들어도 자라고, 어떤 때는 모욕을 당해도 더 겸손해지면서 자랍니다. 언제나 범사에 자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약해빠져서, 그저 칭찬을 들으면 교만해서 넘어지고, 어려운 일 당하면 또 시험에 들어 넘어지고… 휘청휘청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명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범사에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성장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자랍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질적으로 자라고, 고난을 벗어나 형통한 날에는 양적으로 성장합니다. 언제든지 항상 계속적으로 성장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 자라면서 어느 방향으로 자라느냐 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하였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남들은 고독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범사에 성장합니다. 사랑을 알면, 사랑의 뿌리가 되어 더욱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된 것을 하며” 하였습니다. 원문의 뜻은 “진실 되게 행하라”하는 뜻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실 되게 행한다. 성숙하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 안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그 방향으로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깊은 진리를 말씀합니다.
16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으므로 연락하고 상합하며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서로 돕고, 사랑하고, 그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높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입학시험 때 최고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불합격 시켰습니다. 시험 성적으로는 최고인데 불합격을 시킨 것입니다. 왜 그랬는고 하니 면접시험에서 “혹 헌혈한 일이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이 학생은 “없는데요.”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것이 불합격된 이유였습니다. “남을 도와줄 줄 모르는 사람은 우리 학교에서 가르칠 이유가 없다.” 이래서 불합격 시킨 것입니다. 너무 했다고도 싶고, 멋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하는데, 사실 봉사정신 없는 사람 가르쳐서 뭘 하겠습니까?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 펄펄 뛰는 시절에, 그래 헌혈 한 번도 안 해본 이 사람, 이런 이기적인 사람을 데려다 가르쳐서 뭘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버드 대학이 그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락하고 상합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서로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는 아무 답도 없습니다. 아무 거리낌이나 부담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 따라,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 따라, 성실하게 서로 도우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의 기둥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집에 여러 기둥이 있습니다. 보이는 기둥,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둥들은 하나 같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기둥이 있다가 “나 좀 힘들어서 쉬겠다.”하고 주저앉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기둥, 작은 기둥 할 것 없이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서로서로 상합하면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랑 안에서 연합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세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향해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성장의 극치는 아가페 있습니다. 참 사랑을 알고, 참 사랑의 사람이 되고, 참 사랑 안에서 내 인격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그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