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3ㅣ김남수 목사]
본문 1절에 바울은 “종말로” 라는 강조 형을 쓰고 나서 그 주제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빌립보서에 기뻐하라는 말이 약 9번 나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 감옥 밖의 사람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합니다. 남보다 좋은 여건에 있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보고 기뻐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해도 그 말이 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불행한 여건에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을 향해 기뻐하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바로 그 때문에 강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빌2:18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나는 괴롭지만 너희들은 기뻐하라” 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쁘다. 그런고로 너희도 함께 기뻐하라” 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고 나서야 남에게 기쁨을 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불행한데 남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나는 고생할 테니 너희는 잘돼라” 고 하는데, 이런 부모의 교훈을 듣고 잘되는 자녀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너희를 키우며 행복했다” 고 말할 수 있어야 그 자녀들이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맛있게 먹으면서 남에게 권해야지, 저는 안 먹으면서 남에게 맛있으니 계속 먹으라 한다면 누가 먹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기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기뻐하라고 하는데 기뻐할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 안에서’ 입니다.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이런 말이 그 편지 가운데 132회나 나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는 말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쁨에는 절대적인 것이 있고,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 은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의 기쁨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구체적으로 4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 얻은 기쁨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이 주안에서의 기쁨을 극대화해서, 이 벅찬 기쁨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기를 원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주 큰 기쁨을 느끼게 될 때에, 시시하고 작은 걱정들을 다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이 절대적 기쁨이 충만해서 이 기쁨으로 모든 시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것은 기쁨입니다. 기쁠 때에 능력이 있고, 기쁠 때에 화평이 있고, 기쁠 때에 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이 떠나면 아무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절대적 기쁨이 없을 때에는 돈을 벌어도 걱정이요, 출세해도 불안합니다.
둘째, 주께서 나와 동행한다는 것을 아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또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교제를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하나님의 일꾼 된 영광, 그리스도와의 동행, 그리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제로 체험하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를 알고 사랑하고 동행하신다 하는 것을 아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롬8:35 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하게 느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도 주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입니까? 사실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 자체도 특권이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한 번은 제가 어느 교회 헌당예배를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곳 목사님이 목을 놓아 웁니다. 그 예배당을 짓기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건축위원장이 2명이나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 번째 건축위원장이 일을 마무리 짓고, 마침내 헌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건축에 가담하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수고하는 것을 피곤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주 안에서, 주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자의 특권에서 오는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오는 충만한 기쁨을 주안에서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성령사역과 전인치유사역 훈련교안I”을 집필할 때, 깨닫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기뻐하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뻐하게 될 날을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요, 지금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쁨에 대해 생각할 때 먼저 무슨 좋은 일이 있어야 내가 기뻐하는 줄 생각하는데 그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진장한 기쁨은 조건적인 기쁨이 아니요, 생동하는 기쁨입니다. 창조적 기쁨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니 기뻐하라’ 는 말이 아닙니다. ‘기뻐하라 그러면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 오직 이것 하나만을 이유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이것 하나만이 기쁨의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이 구원 받았다. - 이 한 가지만 생각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기뻐할 때, 이 기쁨이 확산되고 극대화될 때 시시한 문제들이 다 해결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또 말씀합니다. 1절에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라고 합니다.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입니다. 진리는 반복돼야 합니다. 설교 말씀이나 강의, 훈련하는 말씀도 또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의 교훈은 암기가 먼저요, 실천이 둘째요, 깨달음이 셋째입니다. 소위 세뇌라고 하는 것은 반복을 계속으로 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텔레비전 약 광고를 보십시오. 기왕이면 가끔씩 프로를 바꿀 때, 광고 내용을 바꾸면 좋을 성 싶은데, 늘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광고합니다. 그렇게 해야 머릿속에 쏙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에게도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예수 잘 믿어라” “진실하게 살아라. 평생 이런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가 세상을 뜬 후에도 그 자녀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의 믿음이, 아버지의 하나님 사랑하는 믿음이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가장 좋은 교육은 반복이라는 훈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앞의 1 절에서 “기뻐하라는 복음”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복음을 전하고 나서 사도바울은 이제 경고의 말씀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을 저해하는 일들이 많고, 또 우리의 은혜로운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야만 그 기쁨을 지속할 수 있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특별히 주장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은혜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그 가치를 소홀히 여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에 거기서 춤을 추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불과 보름도 못 가서 원망으로 바뀝니다. 그만큼 은혜를 완전히 소유하고, 은혜의 사람이 되고, 은혜의 세계관으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마운 마음이 며칠을 갑니까? 그 순간에야 그저 “고맙습니다. 하다가도 몇 시간이 지나면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본문에는 은혜를 지속하기 위한 몇 가지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2절에 삼가라 하는 것이 세 가지요, 3절에 취하라는 것이 세 가지 입니다. 전자는 부정적인 것이요, 후자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이제 부정적인 면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2절에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첫째, 개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개” 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개는 짖고 싸우는 것입니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고 물어뜯습니다. 사56:11에 이런 개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마 7:6)”고 하신 바 있습니다. 개의 특성은 짖고 싸우는 것입니다. 또한 개는 더럽습니다. 썩은 고기를 먹고, 시체를 뜯어 먹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는 회개하고서 다시 옛날 죄로 되돌아가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벧후 2:22 에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가 퀙퀙 기침을 하며 먹은 것을 다 토해 놓고는 잠시 후에 그것을 다시 핥아 먹습니다. 뉘우치고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맹세하고 죄짓고 …….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 개와 같다고 합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고 하는 것이 다 그런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통틀어서 ‘개’ 라는 것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방인은 떠들고, 욕심 많고, 더럽고, 도덕도 없으며, 악한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이방 사람들을 삼가라, 이방 종교를 삼가라는 뜻이 됩니다. 솔로몬이나 많은 유대의 왕들이 이방 사람의 풍속과 종교에 많이 넘어 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은 이런 이방 문화, 이방 풍속과 그들의 사상. 이념들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행악자들을 삼가라.
행악자란 ‘카쿠스 에르가타스(κακούς έργατας)’ 라고 하는 말인데,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악한 동기로 행하는 자요, 또 하나는 행동적인 사람을 뜻합니다. 일종의 행동부대로서 참 위험한 사람입니다. 행악자의 성경의 예를 들면 행23:12-13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여명의 유대인이 있습니다. 왜 그런 맹세가 필요했겠습니까? 저들은 바울과 별 이해 관계가 없는데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저들이 바울을 죽이지 못했는데, 과연 그 40명이 먹지 않고 한꺼번에 죽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악한 목적을 위하여 맹세한 사람들, 행동부대 이들이 행악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생활을 해 나가려 할 때, 우리 주위의 이런 극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해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참 괴롭고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을 대항하다가 내가 더 악해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행악 자를 삼가라는 것은 이들을 피하거나 도망가라는 뜻이 아니요, 행악자로 인하여 소중한 은혜가 피해 입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좀 더 믿음으로 은혜롭게 살려고 하면, 꼭 이런 행악 자와 부딪치게 됩니다. 이럴 때에 함께 부딪혀 끝장을 내어 버릴 수도 있지만 잘 참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손 할례당을 삼가라고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손 할례당은 내적 의미에서 할례 받은 것이 아니라, 형식만으로 받은 것을 뜻하며, 따라서 이것은 무효입니다. 다시 말해서 손 할례당이란 형식주의, 외식주의를 가리킵니다. 외식주위에 한번 유혹되거나 빠지면 여기에서 헤어나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마음이 먼저 있고, 의식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 있고 선물이 있는 것이지,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에 따르는 표지로서 선물이 있어야 사랑을 더 크게 만듭니다.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표지는 함께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거기에서 더 이상 나가지 않고 가만히 멈추어 있으면 그 마음이 사라집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따르면 그 사랑에 강도가 더해집니다. 선물이 따를 때에 그 사랑이 구체화 되며 점점 더 확실해 집니다. 한 편 마음은 없으면서 입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위선입니다. 마음은 없는데 말만 있고, 형식과 선물만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얼마나 외식적인 것입니까? 그런데 본문에는 마음은 제쳐놓고 육체에 반은 할례만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할례 받은 백성이다”라고 큰소리 치고 싶은 위선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큰 함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기쁘게 헌금도,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없이 이 일을 형식적으로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어 교회에 나온다고 하면 이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마음이 있고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은 없고 의식만 있다면 이런 사람이 바로 손 할례당인 것입니다. 신앙이 있어서 봉사하는 것은 좋지만, 믿음 없는 사람도 어쩌다가 기분으로 봉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칭찬을 합니다. 아무개는 착하고, 새벽기도도 잘 나오고 교사로도 열심이고, 칭찬을 해대면 그는 믿음도 없이 이것을 지켜보려고 합니다. 열심히 이것저것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집에 가면 부부 싸움을 많이 합니다. 이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그 부인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터집니다. 안 터지면 그는 정신병원에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 묵은 위선자가 있습니다. 몇 십 년 위선자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속이 엉뚱하여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근사하고 의젓합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참 무섭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에는 영이 병들고, 몸이 병들고, 인간관계가 다 병이 듭니다. 언젠가는 크게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위해 절대로 위선자가 되지 맙시다. 본문에 있는 손 할례당처럼 특별히 종교의식이나 거룩한 위식을 형식적으로나 외식적으로 하는 일은 참 위험합니다.
이렇게 삼가야 할 세 가지를 이야기 한 후에 사도바울은 취해야 할 세 가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 첫째가 성령으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봉사는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도 영어로는 서비스(service)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봉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말하는 봉사를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λατρεία,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보충번역하면 ‘성령 안에서 예배하라’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것은 예배로 표현되고, 사람 앞에 봉사하는 것은 봉사로 표현됩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 봅시다. 성령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남 앞에 나아갈 때에는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성령이 깨닫게 하는 대로, 성령이 감화하는 대로, 조금도 거역함이 없이 성령 안에서 그대로 예배하라 신령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의식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먼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고, 영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지금 설교 중에 여러분이 귀로는 제 음성을, 눈으로는 제 얼굴을 보고 있지만, 영의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잘 나가다가도 예수님께 돌려야 할 자랑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궁극적인 영광을 하나님께 반드시 돌려야 합니다. 자기 자랑을 해 버리면 그 순간에 은혜가 없어집니다. 모처럼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리게 됩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의뢰하라는 뜻입니다. 과거도 은혜요, 현재도 은혜요, 미래도 은혜입니다. 자기의 의를 신뢰하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의에 빠지면 반드시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고 책망합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 얻었는데, 나중에는 행위로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헌금해야 복을 받고, 선한 일을 해야 기도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은혜로운 생활을 하려면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이요 율법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고 하며, 개, 행악 자, 손 할례당을 삼가고,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가 본문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상이라고 합니다. 예봄 교회 교우들은 바울이 본문에서 말씀한 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