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15-21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신앙적 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세상적 지혜가 아니고, 신앙적 지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 지혜를 둘로, 곧 위로부터 하늘에서 오는 지혜와, 땅 세상에서 오는 지혜라고 달리 생각합니다. 단어는 똑같은 지혜라는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는 지혜가 있고, 사람들이 땅에서 만들어 내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라 꾀나 잔재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야고보는 마귀 적이라고 합니다. 이 지혜는 남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잔재주를 부리는 ··· 그런 것 입니다. 이 지혜는 히브리적인 사상으로 볼 때는 결코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혜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를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 합니다.
Ⅰ. 지혜의 특성
15절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그러면 지혜로서 기본적인 지혜가 뭐냐 하면 시간관리 입니다. 시간을 안다는 것,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가? 본문대로 말씀하면 때가 가까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이란 주어진 시간이며, 제한적 시간이라는 것을 압니다. 적어도 시간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이것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지, 하루를 30시간이나 한 시간을 100분으로 더 길게 하거나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쇼팬 하우어」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시간을 소비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이용한다.”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냥 앉아 가지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아까운 시간을 멍청하게 다 흘러 보내는 것입니다. 그 뒤에 후회하고,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이용합니다.
그러면 지혜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힘쓰는 흔적이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지혜 있는 자는 세월을 아낍니다.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세월을 최대한 이용합니다. 미국의 대 각성 운동 당시 하나님께 귀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의 20번째 생일 바로 직전에 지은 “결심”이라는 글의 70번째 항목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내 힘껏 가장 유익하게 시간을 이용할 것을 결심하노라.”
바울의 지혜의 첫째 요소로서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시간선용이라는 점에서 과연 그는 지혜 있는 자였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의 시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은 항상 있는 줄 압니다. 계속 주어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라.”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소중한 시간에서 아끼라 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아낀다.”는 말이 영어로는 redemption 속량한다는 뜻입니다. 구원한다, 대속한다는 뜻입니다.
"Make your time the best." 네가 가진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만들어라. the best time을 만들어라. 그 말씀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아주 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라 그 말씀입니다. 대가를 지불해서 좋은 시간을 만들어라. -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좋게 만들려고 하면 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냥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을 고귀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공부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값진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도 그렇지요. 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어머니들이 얼마나 수고합니까?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게 주어진 시간, 한 시간 한 시간을 최선의 시간, 가장 높은 가치의 시간으로 만들어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가장 쉬운 것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잠 많이 자지 마십시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다 경험하다시피 잠이란 잘수록 늘어요. 그것은 습관입니다. 자기로 하면 끝도 없습니다. 24시간 다 자도 모자랍니다. 아무쪼록 잠을 줄이셔요. 그러나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는 것은 죽는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건강에 지장이 없을 만큼 적게 자야합니다. 세상에서도 성공했다는 사람들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30분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3시간 일찍 일어납니다.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남보다 3시간 덜 잔다 이 말씀입니다. 남보다 조금 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깨어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거기다가 또한 맑은 정신이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데도 매이지를 않습니다. 과거에 매이지도 않고, 남에게도 매이지 않고,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도 않고, 어쨌든 내 마음이 자유 하여야 됩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내가 시간을 갖다 바치는 것이 됩니다. 시간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나는 온전히 자유 하여야 하고, 그리고 아무에게도 시간을 뺏기는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합니다.
17절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자기의 뜻대로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지혜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서만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님도 친히 기도할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으며, 또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이를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일반적인” 뜻과 “특수한” 뜻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인 뜻”은 하나님의 백성 일반에게 관계되는 것으로서 예컨대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특수한 뜻”은 우리의 삶의 특성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예컨대 우리가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하며, 또는 우리가 결혼해야 할 것인지 또 한다면 누구와 해야 하는지 등과 같이, 각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일단 두 가지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야,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낼 방법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뜻은 성경에서 발견되어 질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수적인” 뜻은 성경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인도할 일반적인 원리들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나, 보다 자세한 결정들은 주의 깊게 생각하고, 기도하고, 우리보다 경험이 많고 성숙한 신앙 소유자들에게서 조언을 구한 뒤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Ⅱ. 성령 충만 (엡5:18-21)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랑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의 본성과 이름 자체에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거룩의 비결에 있어서는 성령 충만 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성령 충만하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십시오. 영이 지배하는 때가 있고, 육이 지배하는 때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항상 영에 속해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육에 속한 일을 합니다. 휘청거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입니까? 이 비율을 물어야 합니다. 얼마만큼 영에 충만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세상 근심에 매여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지혜로운 자에게는 성령 충만한 시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에 속한 시간으로서의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본 절에서 보듯이 술 취하고 방탕한 시간이 많습니다. 맑은 정신을 술 취함으로 몽롱하게 만들었습니다. 술 취해가지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 시간은 버려진 시간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시간을 생명이라고 한다면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함으로써 술 취함과 성령 충만 사이에 어떤 유사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외관상으로는 이 둘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술기운으로 무엇을 하려고 들듯이,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은 분명코 성령의 영향과 능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사점은 이것으로 끝나고, 연이어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현대에 가장 유명한 강해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목사님은 엡 5:18-6:9의 강해 설교 집에서 그는 의사로 또는 목사로서 술 취함과 성령 충만 이라는 두 가지 상태를 잘 비교해서 대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술-알코올은 약물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활성제가 아니고, 억제제이다. 술은 무엇보다도 우선 두뇌에 있는 모든 것의 중심부를 억제한다. 이는 사람에게 자제력, 지혜, 이해력, 분별력, 판단력, 몸의 균형, 사물에 대한 평가력을 제공해주는 모든 것을 가장 훌륭하게 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억제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성령은 그 반대의 일을 행하신다. 만일 성령을 약물 교재에 기입해 넣을 수 있다면, 나는 그를 활성제의 범주에 넣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속성상 그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활발하게 한다. …그는 우리의 모든 기능, …정신, …지성,… 마음,… 의지… 등을 활성화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함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바울은 술 취함의 결과가 방탕이라고 합니다. 술 취한 사람들은 난폭하고, 방탕하고, 무절제한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지나친 음주가 사람을 짐승과 같이 만들어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기 때문에 우리를 더욱 사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4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명령으로 되어있습니다. 권위 있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당시 에베소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일은 의무적인 것이지,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공동체 전체를 향해서 주어진 명령입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술 취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집사가 되려면 적어도 술, 담배 정도는 끊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몇 몇 선택된 자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로,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필수적인 것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에서, 우리가 뉘우치고 돌아서서 그에게 완전히 우리를 믿음으로 내어 맡김으로써 그가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데, 아무것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 기록된 병행구절에서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골 3:16)고 되어있는 것은 의미가 아주 깊습니다. 우리는 성령과 말씀을 결코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성령께 복종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넷째로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명령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계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계속 유지하고, 받으라고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잃어버릴 수 없는 단회적인 체험이 아니라, 부단 없이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새롭게 받아야 하는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는 것은 단 한번으로 끝나지만, 성령의 충만은 매일 매순간 계속해서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경우에 나타내는 4개의 새로운 결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교제
엡 5:19상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서로 화답하며” “시와… 서로 화답하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제입니다. 시, 찬미, 신령한 노래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서 이는 공적 예배를 가리키고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인이 모일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 간에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노래하는 시가 실제로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권면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시95편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라.”는 식으로 노래의 내용이 서로가 서로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배를 위해서 서로 간에 교제하며, 찬양을 위해서 서로 간에 권면하는 것입니다.
2)경배
엡 5:19하 “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며” 여기서 노래는 “서로”를 향한 것이 아니라, “주께” 향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들으시도록 너희의 마음으로 노래하며”라고 번역함으로써 곡조 있는 노래를 할 수 없는 비음악적인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물론 마음속에는 기쁨도 있고 곡조도 있겠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는 말 없는 경배가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오며, 성령 충만한 공중예배는 하나님의 큰일을 기쁨으로 축하드리기 마련인 것입니다..
3) 복종
엡 5:2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피차 복종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그들이 피차간에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면서 연유된 것이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도 역시 복종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참 으로 복종하는 자들은 피차간에 복종하는 일은 어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4) 감사
엡 5:20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불평하는 마음은 성령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죄 가운데 하나가 서로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와 모세를 향해서 줄곧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신자는 불평이 아닌 감사로 충만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도록 되어 있는데, 범사에는 죄악까지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 중에서라도 하나님께 불평해서는 안 되며, 그를 신뢰해야 하고, 또한 악한 일까지라도 선한 목적으로 바뀌게 하실 수 있는 그의 섭리하심에 대해서 감사드려야 합니다(롬 8:28).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 악한 일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그것으로 인해 그에게 찬미하거나 감사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범사”는 하나님의 부성과 그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자기 계시와 일치하는 한에서의 범사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20절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 이것은 시간을 얻는 길입니다. 시간을 얻는 길은 바로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왜요? 감사하는 것은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요, 감사하는 것은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 마음이 기쁩니다. 더 훌륭한 일은, 감사는 자기능력을 극대화할 수가 있습니다. 감사만이 시간을 높은 가치로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시와 찬양, 이것이 창의력을 주는 것입니다.
시간은 귀중한 시간으로 만드는 비결이 무엇인지, 이제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람을 극대화할 수 있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고, 감사하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하고 찬송하는 시간만이, 가장 높은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감사와 찬송, 이것이 가장 생산적이고 높은 가치의 시간을 창조하는 비결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