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14-16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은 짧은 본문이지마는 그러나 이 속에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강하고 우수한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네는 노벨상하면 하늘의 별을 쳐다보듯 선망하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30%가 유대인이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우수한 민족이 되었는가 하면, 그 비밀은 자녀교육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마땅한 자녀교육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풍속을 보면 가장 핵심적인 것이 자녀교육을 우선으로 하고 거주지 선택도 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건한 유대인들은 반드시 회당 옆에 삽니다. 걸어서 나올 수 있는 거리에 삽니다. 모든 것 보다 이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공기 좋고, 교통 좋고, 집값이 싸고, 어떻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교회를 지었습니다마는 어떤 분들은 교회를 따라 70%이상이 양천구 목동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교회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회당을 짓는다하면 아주 허허벌판에다 짓습니다. 싼 땅을 사 가지고 먼저 회당을 구성하고, 공동체에서 거기다 회당을 짓고 회당을 빙빙 돌아가면서 각각 사는 집들을 짓습니다. 울타리 치듯이 동그랗게 삽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고 삽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합니다. 걸어서 갈수 있는 거리에 회당이 없다면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회당을 중심해서 온 가족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당은 주일날만 모이는 데가 아닙니다. 생활의 중심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하고는 먼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 뿐 아니라 그들은 항상 율법과 「탈무드」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어떤 고등학교에서는 그 바쁜 시간에 오전 내내 율법과 「탈무드」만 읽습니다. 그리고 점심 먹고 오후부터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세계적인 학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탈무드」가 꽉 차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가득 차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유대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지혜가 있고, 삶의 생명력이 있다고,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꽉 차야 지혜가 있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 “벤자민 볼룸”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있는데 그 분이 한번은 “자녀교육에 관해”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학자들, 예술가들, 운동선수들, 흔히 말하는 성공했다고 하는 존경받는 분들 120명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조사결과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는“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많이 칭찬하라”
아이들은 칭찬을 받는 수준에서 자기 가치를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칭찬 받는 그것, 바로 그 수준에 도달하도록 그들은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칭찬 받는 만큼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칭찬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르치기는 하되 나무라지는 말라”
아이들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한번 나무라면 “내가 잘못했는가 봐”하고, 두 번 나무라면 “내가 세상에 있는 것이 귀찮은가 봐” 난 구제불능인가 보다, 세 번 나무라면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키우는 것이 고통스러운가봐”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자포자기하고 ,부모를 싫어하게 됩니다. 벌써 정신적으로 고아가 되고, 자살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무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이 얼마든지 있어도 아이를 나무라면서 키울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공했거나 잘한 일이 있거든 그것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자기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니까요. 잘한 일에 대해서 오래오래 기억하게 됩니다. 너는 이런 일을 잘한다. 그래서 장점을 계속 극대화하도록 해 주는 것이 교육의 원리라고 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 사랑은 위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물으시고 사랑을 확인한 다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볼티모어」에 빈민굴이 있는데 너무 형편이 어지러워서 어느 사회학자가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아편 중독자이며 알코올중독자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입니다. 너무나 취약지구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을 보내 연구한 결과 내 놓는 보고서는 이렇습니다. “아무리 기대해 보아도 저 빈민굴은 구제불능임” “그래서 자라는 어린이들도 소망이 없음” 그래서 기다렸다가 25년 후 다시 사람을 보내었더니, 이것 보십시오. 소망이 없다고 한 그곳에서 176명이나 되는 학자, 목사, 교육자, 그리고 훌륭한 과학자들이 나왔습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하고 원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 속에 그들을 위해 희생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한 평생을 그들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는데, 그 여인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이 구제불능의 빈민굴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났더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가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합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내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내 아버지가 나빠도 좋습니다. 누구인가라도 단 한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참으로 귀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인도한 그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그 아이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린 아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어린 아이에 대하여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을 총총히 지나고 계실 때, 마을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13절에 “제자들이 꾸짖거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자, 귀찮아서 꾸짖었을까요?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붙들고 복을 빌고 하는 일보다,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더 크고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은 시간만 빼앗기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소홀히 여겼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앞에 가시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에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복을 빌어 준다고 당장 눈앞에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 변화는 2~30년 뒤에나 나타나게 됩니다. 어린 아이에 관한 일은 전부가 그렇습니다. 눈에 띄게 당장 얻어지는 효과는 없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에 보면 서로 장난질하거나, 돌아다니지, 가르치는 내용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해 보십시오. 줄줄 잘도 대답합니다. 장난치면서도 들을 것은 다 듣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간혹‘아멘’을 외치며 모두 이해하는 것처럼 듣습니다마는 막상 물어보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어른과 어린 아이들의 다른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조급하게 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급히 생각하면 당장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같은 조급한 생각을 가졌기에 사람들을 꾸짖어 물리친 것입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실망하시고 제자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14절) 이렇듯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당신 곁에 모인 어린 아이들을 차례차례 모두 안아 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 철학의 사조는 헬라적인 것과 히브리적인 것이 있습니다.
‘헬라적’이라는 것은 이성에, ‘히브리적’이라는 것은 신앙에 근거를 둡니다. 헬라적인 교육은 합리적이라는 이론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반면, 히브리적인 교육은 순종과 「제자도」를 제일 먼저 가르칩니다. 순종이 가능하려면 절대적인 권위가 전제되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30%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뛰어난 것은 전승을 지켜나가기 때문입니다. “전승이다. 어른들이 말이다”하면 판단은 끝납니다. 술, 담배를 많이 하여 패가망신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술 담배로 패가망신 했으니 너는 술 담배를 입에 대지도 말라!” “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내가 먹어보아야 패가망신 하는지 안하는지 알지요!” 이러면 악순환이 끝나지를 않습니다. 실수의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적어도 아버지가 경험한 실수를 아들은 겪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다니, 망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른들이 순종하는 덕을 가르치지 못했다면 교육은 끝난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가정은 다 된 것입니다. 순종은 어려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제자도」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은 별것이 아닙니다.
먼저, 음식에 대한 훈련입니다.
균형 있게 먹어야 합니다.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을 가릴 줄 알게 해야 합니다. 자녀의 입맛은 어머니가 만듭니다. 절제와 자제를 가르치고, 감사함으로 먹을 줄 알게 해야 합니다.
또한 좋은 말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데로 되어 집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에어로빅 한답시고 이상한 음악, 로큰롤 따위만 듣습니다. 엉덩이를 흔든다고 좋다 재미있다하고 박수치지 마세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력은 그 사람의 가치기준인 것입니다. 그 따위 속되고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으면서 무슨 사색이 자라겠습니까? 결코 바람직한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조용한 클래식을 들어야 합니다. 클래식을 들으면 식물도 잘 자라고, 소도 우유를 많이 냅니다. 부드럽고 친절한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송을 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좋은 것을 보아야 합니다.
좋은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의 목장 원들이 은혜를 못 받는다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저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목자가 담임 목사님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하기 때문에 목 원들이 마음을 닫고 믿지 않으며, 은혜를 못 받는다고 합니다. 집에서나 목장에서나 부정적인 비판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말은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고, 영혼이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 칭찬하는 이야기, 남 존경하는 이야기, 경건한 이야기를 꽃피우기 바랍니다. 남 흉보고 원망하는 이야기, 비판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을 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교육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본을 보이면 됩니다.
부부간에 다정하게 살고, 올바른 가치를 가지고 집안이 화목하면, 자녀 교육은 이미 된 것입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보는 대로 닮기 때문입니다. 「고려장」이라고 하는 풍습이 있던 그 옛날에 한 아들이 나이 많은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내버리러 간 것입니다. 늙은 아버지를 내려놓고 막 돌아서는데, 따라갔던 어린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저 지게 가지고 가야지요?”“왜?” “다음에 아버지 내버릴 때에도 필요하잖아요.” 어린 아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아들은 내버리려 했던 늙은 아버지를 다시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효도를 가르치는 방법이 달리 없습니다. 효도하는 본을 보이면 됩니다. 효도하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는데, 정작 효도하는 것을 본적이 없으면 어떻게 효도를 합니까? 부모를 구박하면서 자녀가 잘되기를 바랍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제할 때에 자녀들에게 시킨다고 합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좋은 것을 보게 하고, 좋은 일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경험하게 하고, 선행에서 오는 마음의 기쁨을 경험하게 해 주십시오. 전에는 우리교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가 1년에 한번 이상 고아원이나 지체 부자유자들이 있는 재활원을 방문했습니다. 갈 때마다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봉사의 기쁨, 사랑과 희생에서 오는 영광, 인내에서 오는 능력을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즐거움과 자신이 건강한 것에 관해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머리로만 가르치려 하니 말만 무성합니다. 좀 더 히브리 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가르치십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들을 교육하려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는 부족합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닮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양육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유명한 교육가 「페스탈로치」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동상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자한 모습을 한 페스탈로치가 허리를 굽혀 어린 아이를 내려다보고, 그 어린 아이는 페스탈로치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페스탈로치 모습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닮으라고 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하였다.”의논한 끝에 동상을 고쳤다고 합니다. 페스탈로치의 모습을 그냥 놔두고, 페스탈로치를 올려다보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더 먼 곳을 보는 모습으로 고친 것입니다. 나를 닮으라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하면 만사형통입니다. 「에이브러험 링컨」은 대통령 취임을 할 때에 낡아빠진 조그마한 성경책을 들고 나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성경책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는 그리 놀랄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어머니가 계모였다는 사실에는 놀랍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링컨이 14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웠습니다. 그 어머니, 비록 계모였지만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쳤기에 오늘날 위대한 한 인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동리에 찾아오신 예수님! 그에게 보이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저분처럼 되게 해 달라고 같이 우러러 보는 데에 참된 교육이 있습니다. 참된 가정, 참된 자녀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 하면,곧 나를 영접함이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