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3-48, 로마서 10:13-15 ㅣ 김남수 목사]
요즘 서울 시내 일류 호텔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려하고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글귀가 없습니다.
즉 ‘즐거운 성탄절’이나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말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십자가도 없습니다. 예수가 없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때 참으로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장사를 위한 하나의 장식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요1:43~48절에 빌립은 친구의 소개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는 행복하고 주님이 너무도 소중해집니다.
그는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합니다. 또한 메시야를 만났으니 ‘와 보라’고 말합니다. 나도 보고 알았으니 너도 와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우리도 예수를 만났으면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는 반드시 오실 것이라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언은 믿으면서도 그 예언의 성취는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실 거라는 것은 믿으면서도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면서도 이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유대인은 메시야 없는 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크리스마스가 됐는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미 주님은 오셨습니다. 또 우리교회에서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못 믿지 않습니까? 유대인과 우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 빌립은 나는 만났으니 너도 와 보라, 너도 와서 만나라고 나다나엘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생각하였기에 일단 부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빌립이 ‘일단 와보라’ 했더니 옵니다. 오는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의심하면서도 옵니다. 왔기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 왔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만나 하시는 말씀이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느니라.” “네가 나에게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보았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나다나엘은 그만 굴복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의심하면서도 오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도 나올 때마다 은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공치는 날도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졸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지만 졸아도 교회에 와서 졸아야 합니다. 아버지 품에서 졸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행동 거기서 만남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내가 만난 주님을 친구에게, 이웃에게 전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내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되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용서하시고, 치유해 주시고, 자유하게 해주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이 보다 좋은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롬8:32)라고 말씀하십니다. 독생자를 주신 분이 하물며 무엇을 못 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안 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받은 것 아닙니까? 이렇게 모든 것을 은혜로, 모든 것을 복음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될 때 은혜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 사랑하는 자가 장차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을 모르면 안 됩니다.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런고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든 없든 지위가 높든 낮든 마찬가지입니다.
운명은 다 한길로 가고 있습니다. 한 치도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장례식 같은데 가보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들 보니까 너무도 다릅니다. 부귀영화 권세가 있어도 통곡하고 절규하는 것을 보니 부귀영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자들은 장례식 때도 찬양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이요, 최고의 선행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4:14~19절에 보면 바울이 전 생애를 통해 복음을 전하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선금을 모아서 에바브로디도 목사님 편에 보내왔습니다. 바울은 이 선물을 받고 너무도 감사해서 빌립보서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사도 바울은 그 받은 성금에 대하여 빌립보서 1:7절에 보면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는데 감옥에 있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이 은혜에 너희가 성금을 보냄으로 동참했다고 합니다.
또 빌 4:14절에 보면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당한 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너희가 동참한 것이라’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또한 15절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느니라.’라는 말씀 읽을 때마다 저는 교역자로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사방에 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그 많은 고생을 했지마는 유독 빌립보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위해서 성금을 보내 주었습니다. 주고 받은 것입니다. 영적인 것으로 주고 물질적으로 받았습니다. ‘이 일에 가담한 교회는 너희 밖에 없다’했으니 참 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오지에 가서 풍토병과 독충과 맹수와 싸우며 외롭게 복음을 전하고 계신 선교사님들이 우리가 모아 보낸 선교헌금을 받을 때 바울처럼 가슴이 뜨거워져 감격하며 선교에 더욱 불타는 심령으로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선교헌금으로 뒤에서 지원하고 선교사님들은 최전방에서 나가 몸으로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라는 것이 귀하게 쓰일 때는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탈무드’에서 돈에 관한 것을 읽어보면 ‘돈은 하나님께 선물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합니다. 돈은 선한 일에 기회가 됩니다. ‘돈은 악도 저주도 아니다. 돈은 축복이다.’라고 합니다. 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8절에 ‘나는 풍족하다’라고 합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뭐가 풍족하겠습니까? 마는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풍족하다 더 이상 받아들일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향기로운 제사다.’고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은혜와 고난에 동참하는 그들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사도권을 가지고 천만배로 갚아주시도록 그들을 다음과 같이 축복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여러분 영혼을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해 선교헌금을 작정한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우리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여러분의 모든 쓸 것을 넘치게 채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