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45 ㅣ 김남수 목사]
영국 속담에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 동안 행복하려면 여행을 하라. 한달 동안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1년 동안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일평생 동안 행복하려면 이웃을 섬기라.’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것, 바로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으로 마음을 바꿀 때라야 비로소 자유 할 수 있고 행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주님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오셔서 그 목적대로 사시고 그 목적대로 죽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섬기려 이 세상에 오셨고 섬김의 삶을 사시다가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섬기는 것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섬김을 받는 자가 행복한 줄로 착각합니다. 유교적 동양 문화가 늘 그렇습니다. 그것이 성공이요, 섬김 받으면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섬기는 것에 행복이 있습니다. 성경은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자에게 확실한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섬긴다고 할 때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자발적인 아닌 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그리고 섬김이란 의도적이고 확실한 목적적 행위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행동인데 빼앗기는 일이 있고 주는 일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주면 주는 것이고, 마음이 없이 주면 빼앗기는 것입니다.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 팔자 탓이다.’라는 소리를 합니다.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체념을 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한 평생 좋은 일을 했다 하여도 그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그런 섬김에는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고, 축복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섬길 때 그 사람에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세계적인 심리학자요, 의사인 폴 투르니에는 인간의 삶을 3단계로 간단하게 설명하였는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아동기라고 하는 어린 아이 시절입니다. 어린아이 시절에 열망하는 바는 ‘소유’입니다. 먹는 것, 가지고 노는 것만이 행복의 기준입니다. 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소유했을 때 웃고 좋아하고 제 손에서 떠나갈 때 웁니다. 이것이 바로 아동기적인 인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청년기입니다. 이때에는 ‘경험’하는 것에 열망이 있습니다. 많은 지식을 얻고, 많은 세계를 경험하고, 많은 것을 체험하려 듭니다. 경험하는 것에 열망이 있어서 경험할 수 있을 때 그것이 행복인 줄 압니다. 경험하지 못했을 때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장년기입니다.
장년기가 되면 이제는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체험한다고 해서 그 체험이 나를 어떻게 합니까?
에베레스트 같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깃발 하나를 꽂아 놓고는 내가 산을 정복했다고 큰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단순히 산에 올라갔다 내려왔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장년기에 들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푸는 것만이 남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주는 것이 목적이다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고 특별히 주님은 당신의 의를 주셨습니다. 이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물질을 받는 것,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것은 영예를 받고 의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데 주님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흘리신 피로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주려 오셔서 생명을 주시므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 교육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녀들이 말썽을 부립니까? 이제 한번 간단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아낌없이 주십시오. 그런데 좋은 대학에 딱 들어가야 내 체면이 서지! 합니다. 체면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뭔가 받겠다는 것이 딱 걸려 있을 때 자신도 불행하고, 자식은 자식대로 결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저 주노라, 조건 없이 주노라. 그러면 자녀들은 무럭무럭 자라 힘껏 자랍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섬김, 여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성도들에게 섬김의 삶을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9-11절에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고 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는 이 말씀을 표준 새 번역에는 “열심을 품고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를 섬기십시오.”라고 돼있습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라는 표현이 원문에 더 가까운 변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 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면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섬기려 하고 둘째로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조건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주는 사람은 자유하고 평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사신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실 때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줄 때는 그저 주기만 하고 그저 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얼마나 윤택하고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이런 가치가 인간 삶에 심어있으면 봉사는 보람을 주고 행복을 줍니다. 봉사를 굴욕적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섬기며 살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떠나려 하고, 본질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섬김을 목적으로, 섬김을 행복으로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삶 자체가 바로 사람을 가장 지혜롭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즉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동안 나 자신 만을 위하여 살았다면, 이제는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고 받은 사랑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피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몸도 내 마음도 내 영혼도 내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만을 섬깁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를 섬깁니다.
예를 들어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자식을 위하는 봉사도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남편을 위하는 것도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의 봉사도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그 목적과 마음은 항상 주를 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라 하십니다. 이렇게 섬기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뜻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또 나아가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고 하였습니다. ‘열심을 품고’라는 뜻은‘불 붙는 가슴’, ‘불 붙는 마음’으로 주를 섬기라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불붙는 마음이 아닙니다.
또 나아가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고 하였습니다. ‘열심을 품고’라는 뜻은‘불 붙는 가슴’, ‘불 붙는 마음’으로 주를 섬기라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불붙는 마음이 아닙니다.
또 기쁜 마음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 자체가 기쁜 것 아닙니까? 사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좋지요. 예를 들어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 손녀에게 뭐든 그저 주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든 주려고 애를 씁니다. 줄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사랑하고 주는 마음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35절은 주님의 말씀하신 바를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 퀴로스(Kyros)가 전쟁 중에 적국의 왕자와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을 생포했습니다. 이제 재판을 해서 그들을 죽이려 합니다. 퀴로스왕은 왕자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만일 내가 그대를 죽이지 않고 풀어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고?’ 그 왕자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퀴로스 왕이 ‘이 아이들을 놓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자가 ‘내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퀴로스 왕이 또 묻기를 ‘그대의 아내를 놓아준다면?’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퀴로스 왕은 놀랐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이 있단 말인가! 아주 감동하여‘다 풀어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 귀한하여 왕자는 축하 파티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보고 말했습니다. ‘오늘 보니 퀴로스 왕은 참 훌륭합니다. 내가 보니 참 미남입니다. 의젓하고 지혜롭고 훌륭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왕의 얼굴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럼 무얼 봤소?’ ‘나를 위하여 대신 죽겠다고 하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느라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왕자의 아내처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를 따르고 본받고 그를 따릅시다. 주님은 섬기려 오셨고 대속물로 목숨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길입니다. 주님은 내가 섬기려 왔노라 하십니다.
이 길을 따른 길만이 그 분이 누렸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섬기려 왔노라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여기에 소망이 있고 활력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우리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오신 목적이요, 주님의 사신 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행복입니다.섬김의 삶을 사시므로 참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