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2장 17-3장 18절 | 최병희 목사]
룻이 보리 한 에바(약22kg)를 지고 기쁜 맘으로 집으로 달려갑니다. 하루 만에 주울 수 없는 양임을 안 나오미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보아스’가 베푼 선행을 말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룻에게 그가 기업 무를 자임을 이야기하고 이제부터는 다른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가지 말라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룻2:23). 이제는 보아스의 밭에 가서 곡식을 주울 수 없게 되자 나오미는 룻이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도록 하겠다고 결단의 선언을 합니다(3:1) 그리고는 보아스가 우리의 친족이며, 오늘 저녁에 타작마당에서 타작을 한 후 잠을 잘테니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어 신부의 단장을 하라”고 구체적 행동지침을 일러줍니다. 사실 1장과 2장에서 보는 나오미는 굉장히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3장으로 넘어오니까 너무도 적극적입니다. 보아스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보내주신 기업을 무를 자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을 알아보고 준비했던 것입니다.
나오미가 그렇게 말하자 룻은 그대로 다 순종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남의 집 유부남에게 야밤에 쳐들어가서 바람을 피우라는 것인데,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말없이 그대로 순종합니다(5, 7) 시어머니의 행동 지침대로 룻이 보아스의 발치에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워있었습니다. 보아스가 한참 잠을 자다가 발을 뻗었는데 뭐가 걸려요. 뭐지? 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웬 여인이 누워 있는 거에요?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룻이 대답합니다. “당신의 여종 룻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3:9)”
여러분, 당신은 기업 무를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가 없으면 영락없는 불륜 드라마입니다. 여기는 잠자리에요. “나랑 같이 자요! 나를 취해주세요!” 영락없이 작업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정확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합니다. 보아스는 한밤중에 난데없이 찾아와서 프로포즈 하는 이 룻의 행동이 엘리멜렉의 가문을 잇게 하려는 아름다운 행동임을 칭찬하며 하나님의 복을 빌어줍니다. 그리고는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고 안심을 시키며 단단히 약속을 해 줍니다.
사실 보아스는 룻이 결혼해 달라!는 이 요구를 안 들어줘도 괜찮습니다. 보아스는 얼마든지 자기의 순번이 아니고 책임과 의무도 없기에 정당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 때문입니다. 사실 룻이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라고 요청하였던 것도 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2장에서 룻이 보아스를 처음 보았을 때는 자신의 신분을 하녀(여종)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기업무르기를 알고는 당당하게 자신을 아내 삼아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3:9) 기업무르기, 고엘이라는 뜻은 구원자, 대신 빚을 갚아주었다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값을 다 치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룻은 보아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보아스는 그동안의 룻의 행동을 인애, 헤세드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고향 땅 부모에게로 돌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와서, 지금까지 이삭줍기를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섬긴 것을 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단다”
지금 요청하는 룻이나 대답하는 보아스나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보아스를 보았는가?”로 정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한다면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는가? 입니다. 우리는 이 보아스를 통해 값없이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구원자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의 모습을 보면 오늘 당장 죽이셔도 할 말이 없는데 또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번에 다니엘기도회를 하면서 20명의 강사를 통해 수많은 간증을 들으면서 얼마나 많은 결단을 했습니까? 그런데, 지금 얼마나 실천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간다면 매년 설교 유희를 하는 겁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아 좋네! 아 그렇구나! 대단하다. 우리 하나님 멋지다” 이렇게 여러분이 도전을 받고 찔림을 받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설교를 들으며 즐기기만 하는 겁니다. “또 다른 설교 없나? 더 좋은 간증 없나?” 중독자처럼 더 강하고, 더 진한 설교와 간증을 찾아 헤매일 것입니다.
실천하십시오! 들었던 것, 반복하면서 내가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을 찾으시고 그대로 행한 다음에 또 다른 은혜를 구하세요! 매년 다니엘기도회를 통해 구체적인 결단 1개라도 실천을 해나간다면 우리의 인생이 참 복된 인생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시 보아스에게로 돌아와서 보아스를 통해 누구를 보아야 한다구요? 예!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2장의 보아스의 섬김과 배려를 보면 참 따뜻합니다. 2장 8절부터 보면 “내 딸아, 들어라” 그래 놓고는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언제까지요? 21절을 보면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내 소년들을 따라다니며 주어라” 라고 하고는 소년들에게 “이 소녀를 건드리지 말라!” 신분보장까지 해줍니다. 보리만 줍게 해 줘도 황공무지로서이다! 감사할텐데, 마음껏 물도 마시게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4절에 가면 일꾼들이 함께 둘러앉아 새 참을 먹는 자리에도 초청합니다. 떡만 주지 않고, 떡 먹는 초까지 찍어 먹으라! 고 합니다. 이 배려심. 거기서 더 나가 또 다른 새참 볶은 곡식을 주는데 아까와 하지 않고 듬뿍 줍니다. 너무 많이 줘서 배부르게 먹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2: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소년들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아라 또 2:16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고 아예 명령을 해버립니다.
여러분 도대체 보아스가 왜 이렇게 했을까? 정말 이 젊은 모압여인에게 한 눈에 반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가? 2장 12절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보아스가 생전 처음 보는 이방여인에게, 이삭을 안 주우면 생계에 위협을 받는 가진 것도 없고, 남편도 없는 이 비천한 여인에게 이렇게 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이런 과분한 사랑에 대하여 룻이 놀래서 “땅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감격해하는 것을 보면 룻의 호의와 친절이 어땠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보아스가 룻에게 행하는 처신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헤세드’라고 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인데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비, 인애, 긍휼, 사랑, 은혜 등으로 번역을 합니다. 어쨌든 이 헤세드는 내가 그 사람에게 해 줄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고, 안한다고 해서 비난도 안받고, 하등의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베푸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헤세드에 대하여 설명을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구의 사랑이 떠오릅니까? 예 하나님의 사랑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보아스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보아스를 통해 우리에게 이 헤세드를 말씀하고 계실까요? 보아스가 룻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헤세드가 드러나게 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렇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함으로 하나님을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나? 안 사랑하나? 바로 미터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힘주시면 상식 밖의 사람, 인격이 마비되어 짐승 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중에 가장 최고의 사랑은 영혼구원 입니다. 그 영혼이 구원받게 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교회가 구조선이 안되고 유람선이 될까? 두렵습니다. 여러분의 목장이 영혼을 구원하는 구조선이 안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유람선이 될까? 두렵습니다. 올 한해 코로나 속에서 목장으로 모이시느라고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목장이 유람선만 되어 우리끼리 즐거운데서 끝나면 안되지 않습니까? 집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이 되어 혼자서 요트만 타고 즐기면 안됩니다. 가족끼리도 유원지에서 타는 오리배가 되어 즐거운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보아스처럼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어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코로나로 위축되지만 이제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의 vip 명단을 작성하시고, 목장에서 또 5명으로 추리시고, 12.20 성탄축하예배나 12.25 성탄감사예배에 초청하시어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삼는 모두가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