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1-12절] | 최병희 목사]
현대인들은 모두 다 외로움, 고독이라는 질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예전에 비해 잘 먹고 편리한 생활을 하며 외국여행도 자주 가고, 취미생활도 다양하게 합니다만 마음속에 허전함과 외로움의 문제는 더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것의 해결을 위해 미칠 정도로 일에 몰두하고 여기저기 새로운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현실을 잊어보려고 게임을 하고 술을 마셔봅니다. 친구들과 만나서 열심히 수다를 떱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고독은 완치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고독은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들었을 때 그곳에는 고독이라는 단어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가 들어오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게 됩니다.
창세기 3장 8절을 보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지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 그랬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즐거움이었지만 죄가 들어오니 하나님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
또 죄가 들어오니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숨은 이유는 벗은 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따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점을 지적해 주십니다. “3:11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그랬더니 아담이 “3:12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그렇게 극찬했었는데 이제는 “너 때문이야! 너 아녔으면 이런 일이 발생 안했을텐데”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왜, 이 여자를 주셔서 이런 죄를 범하게 하십니까? 난 달라지도 않았는데 괜히 주셔서 이런 죄를 범하게 하십니까? 내 죄는 궁극적으로는 당신 책임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 조상의 첫 범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짐으로 우리는 수치를 알게 됐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으며 서로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잘 놀다가도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면 웁니다. 아무리 먹을 것을 주고, 재롱을 떨고 별 쇼를 다해도 오히려 더 악을 쓰며 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럴 때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아이가 엄마 품을 떠난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의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한 이 외로움과 불안함, 고독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인간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줄 알고 열심히 선을 행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독약에 물을 타도 독약의 양은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선행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을 많이 쌓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식이 많아지니 번민만 늘어납니다. 종교로 해결해 볼 수 있을까? 각종 우상 앞에 절을 해보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계속적인 방황과 혼란 속에 빠집니다. 물질을 많이 모으면 그 물질이 이 고독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쾌락을 마음대로 누리면 이 고독의 문제를 벗어나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인간적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물속에 더 빠져들게 됩니다.
◇ 유일한 구원자 예수그리스도 ◇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우리 인간의 죄악의 바다에 직접 뛰어드셨습니다. 구명줄만 던져준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물에 뛰어들어 우리를 구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진리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하는 유일한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며 ‘테텔레스타이’ 내가 다 이루었다. 죗값을 다 치루었다! 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수치심과 두려움의 극치입니다.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중요한 부분을 가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완전히 빨가벗깁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 공중에 매달아 놓고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럽게 서서히 수분이 빠져서 죽게 만드는 것이 이 사형방법입니다. 그래서 로마당국은 자국민들에겐 이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습니다.
왜 수치를 느낄 필요가 없이 완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이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의 수치를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한테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고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죄로 인한 수치심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이 수치와 저주를 다 가져가심으로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영생을 선포하십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과거완료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어떻게 됩니까?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우리는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으십니까? 그 예수님을 믿고 내 마음속에 영접하셨습니까? 오늘부터 있는 ‘예수영접모임’을 통해서 아직까지 영접하지 않은 분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조금 희미해지신 분들은 다시 그 믿음을 확고하게 가지게 될 것입니다. 목자들의 안내를 따라 여러분 목장 시간에 다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 예수님의 선물 공동체 ◇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선물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 아래서 우리 모두가 다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언니 오빠 동생의 가족이 생기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순간 우리는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마가복음 3장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지방에서 활동하실 때에 예수님이 미쳤다 하는 소문을 듣고 나사렛으로부터 어머니와 형제들과 일가친척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밖으로 좀 나오라! 어머니가 오셨다”라고 전달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참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합니다.
본문 33절에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바깥에서 가족들이 들으면 상당히 섭섭할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가족들의 방문이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상관이 없다는 투의 말씀을 하시며 오히려 그 곁에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육신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형제간의 우애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가족관계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새로운 영적가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순간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일반적인 가족이 혈연이라면 새로운 가족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가족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고 육신의 가족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말씀은 ‘우선순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나사렛에서 가족들과 함께 잘 살아왔습니다. 요셉이 일찍 죽고 가장의 역할을 잘 감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십자가의 사건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영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친족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제 메시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순간을 맞으셨기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 기준을 제시합니다. 3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
주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는 육신의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가족 그 이상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형제요 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비록 육신의 가족이 힘들고 어려워도 영적인 가족 공동체를 둔 성도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그곳에서 천국을 경험할 것입니다. 물론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예봄교회와 목장을 통해 가족 그 이상의 가족을 경험하고 전하는 복된 삶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