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25-34 ㅣ 최병희 목사]
여러분은 요즘 어떤 염려를 하고 사십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해 건강과 경제에 대한 염려를 할 것입니다. 또 집에 관한 염려도 많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염려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종류는 달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다 염려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성적과 숙제에 대한 염려가 있을 것이고, 나이 드신 분들은 노후에 대한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염려는 영어로 ‘worry’입니다. ‘worry’의 어원은 ‘물어 뜯는다’ 로서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 라는 뜻입니다. 잠언17:22절에 보면 “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그랬습니다.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우리의 뼈를 썩어들어가게 하여 결국은 사람을 죽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염려가 죄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세에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3가지 악을 지적합니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방탕함과 술취함 외에 무엇입니까? 생활의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 생활의 염려를 방탕함과 술취함과 같은 죄로 지적합니다. 충격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을 내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 염려하고 산다면 그것은 불신앙이기에 이렇게 큰 죄로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피조물 된 우리에게 안타까워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27절입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여러분, 피조물 된 우리들이 염려한다고 우리 자녀들의 키를 한 자, 30cm라도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는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여기 ‘키’로 번역된 ‘헬리키아’는 ‘생명’ 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네가 염려한다고 한 자의 거리를 갈 수 있는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 건강에 대해 염려한다고 생명을 연장할 수는 없다.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염려한들 소용이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자동차의 엔진을 중립에 놓고 악세레이타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를 중립에 놓고 아무리 세게 악세레이타를 밟아도 소리만 크고 연료만 많이 들어가지 차는 1mm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염려해 봤자 이렇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우리가 어려서 밥 외에 먹을 것이 없고 우물가의 물 외에 음료수가 없었던 것처럼 먹을 것이 없고 겉옷 하나로 생활하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시며 목숨이 중요하기에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위의 사물을 들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26절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저 새가 씨앗을 심는 것을 보았느냐? 저 새는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염려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연속하여 말씀하십니다.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또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우리나라의 백합화는 흰색이고 길쭉합니다만 이스라엘의 백합화는 빨갛고 크기가 작습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새들이 어떻게 매일 먹고 사는지 상상이 잘 안갑니다. 제비는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면 하루에 100번 정도를 암놈과 수놈이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우리 보고 그렇게 제비에게 먹을 것을 주라면 줄 수 있겠습니까? 조류가 한 두 마리입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신단 말입니다. “그 전능하시고 부유하신 하나님이 날짐승도 먹이고 키우시는데 하물며 너희들일까 보냐?” 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까지 내어주신 분이 그 무엇을, 우리 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준비가 안됐고,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안되서 주시지 못하시는 것이지 주시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밥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서 다 먹기를 기다리는 부모처럼 우리 입 앞에 반찬을 들고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염려가 생겨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려고 할 때마다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꾸는 사람 없어도 온 천지에 충만한 들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코스모스가 피고 가을 열매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염려가 올 때마다 그것을 보고 여러분 자신에게 말씀하세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저 새도 키우고, 저 들풀도 키우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렇다면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서 싸우다가 저녁이 되면 창가로 다가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이 교회가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당신의 세상이요, 당신의 교회라면 그것을 친히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러 가겠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백성의 태도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라는 별칭이 그 이름 앞에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도 자라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염려가 아니라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시고 가장 적절한 것으로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따라 합니다. “염려 대신 기도! 염려 STOP!!”
그래도 여러분의 마음에 염려가 떠나가지 않으면 염려상자를 하나 만드시기 바랍니다.아서 랭크 (Arthur Rank)는 주야로 사업에 대한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매일 매일 염려에 붙잡혀 지내기보다는 일주일 중 하루만 염려하는 날로 택하여 염려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수요일을 ‘염려하는 날’로 정하고는 ‘염려상자’ 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염려가 생길 때마다 그 내용과 날짜를 기록하여 상자에 넣어두고는 수요일에 개봉을 하였습니다.
어느 수요일엔가 랭크는 메모지를 뒤적이며 정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메모지에 기록하여 상자에 넣을 때는 큰 염려거리로 생각되었던 것이 며칠이 지난 수요일에 꺼내어 보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변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분명히 큰 염려거리라 염려상자에 넣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 염려들이 희미해져서 염려할 이유마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어떤 문제도 염려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염려한들 소용이 없는데 왜 염려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악하고 험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수 많은 염려가 끊임없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집을 짓고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가 있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인생길에 문득 문득 염려가 몰려올 때마다 그 염려를 주님께 던져버림으로 염려에서 해방되는 일상 속에 기적을 경험하는 축복의 주인공 되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주님 주신 은혜를 늘 기억하고
염려가 둥지를 틀기전에 염려상자에 던제넣어버리겠습니다.^^
아멘!
귀한 말씀을 통해 염려가 죄악임을 실감했습니다.
또, 기어를 중립에 놓고 악셀레이터를 밟을 때의 느낌을, 염려가 밀려올때마다 떠올릴 수 있을 것 이라서 큰 무기를 장착한 느낌입니다 ^^
기도하고 주께 맡기면 피한 길도 주시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도 주시는데, 아직도 염려와 걱정가운데에 힘들어하는 제 모습을 보며 다시한번 설교말씀으로 재무장하고자 합니다.
염려 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