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박국 3:16-18 ㅣ 최병희 목사 ]
주전 609년 유다 왕 요시아가 죽자 유다 사회는 다시 이방신을 섬기며 자기중심적으로 변합니다.
자기 의만 주장하고 서로 다투기 바쁘니 의로운 사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 속에 살게 되고 악인들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 마음에 울분이 터져서 “하나님,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세상을 보시고도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묻는 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그러자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멸망시키겠다” 그러자 3:16절에서 하박국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창자가 흔들리며 입술이 떨리고 있을까요? 하박국은 전쟁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아비규환의 상황을 떠올리자 그렇게 온몸과 입술이 떨렸던 것입니다.
“하나님 왜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유다를 멸망시키시려는 겁니까?”
깊은 묵상 끝에 3장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참 이해가 안됩니다.
무화과나무 열매가 무성하지 못합니다.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의 소출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밭에 식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외양간에 먹을 수 있는 양도 없고, 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등입니다.
과수원마다 농사가 안되니 먹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못 먹으니 당연히 짐승들에게도 줄 것이 없어서 양과 소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고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해 하는게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은 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까?18절에 보니 구원의 하나님 때문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지만 나를 구원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겠습니다. 이런 감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비록’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이 ‘없을지라도’ 로 끝나기에‘찌라도의 감사’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박국 선지자 외에도 ‘찌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다니엘 3장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워놓고 “절하라!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풀무불에서 얼마든지 건져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런 기적을 베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우상숭배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찌라도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박국처럼 감사하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작은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큰 것만 감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큰 것만 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십시오! 감사는 사소한 것, 그저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늘 반복되는 지극히 평범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잠언6장 2절에 보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그랬습니다.
감사는 산수의 덧셈이나 곱셈과 같아서 감사하면 할수록 크고 작은 기적이 나타나지만반대로, 감사하지 않으면 뺄셈이나 나눗셈과 같아서 받은 축복이 절감되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며 무엇을 감사하기로 결단하십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것을 실천하며 사심으로 작은 일상의 기적을 체험하는 복된 한주, 복된 인생 되시길 축원합니다.
소망이 더디이루어질*지라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