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5~26ㅣ김남수 목사]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약속하신 성령께서 임하시어 감동하고 능력이 임하면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약속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에 힘썼습니다.
14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모아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교회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참으로 귀하고 잘한 일입니다. 마가의 다락방 120문도의 기도는 진실한 기도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또한 합심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전심을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가장 힘 있는 기도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기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는 마음을 같이하여 합심기도를 합니다. 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 마음을 합해서 하는 기도가 위대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바쳐 진심으로 기도하고, 그에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함께 기도합니다. 짧은 기도 시간이지만 합심하여 함께하는 기도에 그 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공적으로 기도제목을 내 놓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마다 하나님께서 거의 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120 명의 마가 다락방의 기도는 생각해 볼 신학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옵소서.”하는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마음을 다 비웁니다. 어떤 일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능력을 이제 나타내 주옵소서 ― 성령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역사가들이나 신학자들은 초대교회 당시 복음을 전하는데 큰 걸림돌이 두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복음을 전할 때면 어김없이 “어떻게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느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는 부정적인 반응이 따랐습니다. 때문에 전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은 곧 십자가요,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결코 십자가가 복음의 걸림돌이 될 수 없다고, 자신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속량의 모든 은혜도 십자가의 복음으로부터 주어집니다.
두 번째 문제는 가롯 유다의 일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어떻게 이 같은 한 낱 제자의 손에 팔릴 수 있느냐고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지도 않는 제자 가운데서 배신자가 나오다니, 말이 됩니까?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렇듯 가롯 유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배신자라는 꺼림칙한 존재로 남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이야기할 때면 오물처럼 따라붙는 존재였습니다. 가롯 유다의 사건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120 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에 베드로가 일어서서 입을 엽니다.
16절에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셨으니 마땅하도다.”
베드로는 가롯 유다는 제 곳으로 갔다고(1:25),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사건을 인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 안에서 풀이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시간이 이미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그 해답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섭섭한 일이 있습니까?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일생의 평생목표를 세우려고 합니까?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쭉 읽어가면서 성경 안에서 그 문제의 해답을 얻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성경을 읽어 가면서 얻어야 합니다. 가롯 유다와 같은 이 모순된 사건도 성경 안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언대로 성취된 것뿐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도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베드로는 시편41:9의 말씀이 응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성경에서 그 사례를 찾는 그러한 접근 방법을 취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사례를 찾을 것이요, 성경의 예언이 오늘에 성취되었다는 것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유다의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에 “유다는 이를 버렸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유다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심판은 물론, 땅에서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비참한 최후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예루살렘 사라들은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와 같은 죄인은 편안하게 죽을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창자가 흘러나온 채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교훈 한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살아 계십니다. 이 진리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생각 할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유다에 대한 예언이 있고, 그 유다에 의해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간간이 혼란을 일으킵니다. 칼빈은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그 죽음이 예언되었다고 해서 변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예언을 이루고자하여 그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사악한 마음 때문에 그 짓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사악함을 미리아시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롯 유다는 공로자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마는, 결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자 봅시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만백성을 구할 구주로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팔아넘긴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유다의 마음이 어디까지나 사악했다는 데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 30냥에 팔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예언과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역사를 알고, 유다 자신이 대신 자초해서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일이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그 방법이 잘 못된 것은 그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롯 유다는 절대로 공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가롯 유다는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세상에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비교하여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마태복음은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찬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행1:18)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기록을 합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으려하다가 그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배가 터져서 죽은 것입니다. 한 사람은 곤두박질해서 배가 터져 죽었다고 기술하고, 한 사람은 목매달아 죽었다고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말씀은 모두 그 죽음이 자살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자기 생을 더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은 돈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감당하기 힘겨운 고통이었기에 더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죽음이라고 하는 이 사건이 초대교회의 첫 번째 이슈로 떠오른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대로 된 것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있어진 것입니다.
이제 주제를 바꾸어 본문 말씀대로 사도의 자격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1절에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어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저들은 유다가 빠진 12사도의 반열에 1명을 보선하여 그 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본래 12제자는 12보좌를 상징한 것이요, 12지파를 상징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교회의 질서와 구조를 위하여 1명을 보선하여 그 자리를 채우려 합니다. 이것은 12 이라는 숫자가 12지파와 보좌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채우려는 데도 목적이 있습니다마는, 심리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12제자 가운데 한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때마다 가롯 유다를 떠 올리게 됩니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이 문제를 임시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보다 영구적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저들은 가롯 유다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가롯 유다의 문제에 대한 것도 성서적 이해를 바로 했고, 적극적인 방법으로써 빈자리를 채워서 다시는 가롯 유다의 생각을 않도록 했던 것입니다. 마음 상한 일, 괴로운 일, 평생 목표 세우는 일 ->성경을 읽어 가면서 성경에서 답을 찾으십시오. 가롯 유다와 같은 모순된 일도 성경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았읍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든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십시오..
본문 22절에 사도의 자격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탁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우리와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사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증거하는 것입니다. 목장에서-목원들이 함께 그물전도를 하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습니다. 남은 11제자와 더불어 증거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보선된 한 사람이 더불어 증거합니다.
이제 유다가 빠진 자리에 한 사람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득불 사도의 자격을 논할 수밖에요.
사도의 자격은 신학적으로 3 가지입니다.
첫째는 오늘 본문에 나타나 바와 같이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서 하나”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3년 동안을 늘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다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한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일1:에서 말씀한 대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함께 한 사람만이 사도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친히 지명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삼은 사람을 친히 지명하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여고보, 안드레…….이렇게 불러 내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친히 불러 지명한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다녔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너는 내 제자다. 나와 함께 하자”하고 예수님께서 개별적으로 이름을 부르사 지명한 사람만이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이니까요. 마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사람들 앞에 당신을 나타내 보였다고 성경에 11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것을 친히 경험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위의 3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사도가 될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추리를 해 볼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사도가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생애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지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가롯 유다는 사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시도의 3가지 자격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선은 체험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자기 생활 속에서 주님을 만났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면서든, 병중이든, 길을 가든, 분명히 예수님을 만난 체험적 신앙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만 한 것이나, 남의 것을 복사하여 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체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지명하셨다고 하는 개인적 소명의식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가하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운데서 늘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을 바로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23-26절은 유다의 한 자리 채우기 위해 제비뽑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서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분을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120 문도는 사도의 자격 3가지에 합당한 사람을 선택하여 사도로 세우려합니다. 다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뵌 사람, 가운데서 사도를 선택하려합니다. 이러한 요건에 합당한 사람으로 바사바와 맛디아가 천거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지명을 하심으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개별적으로 지명을 해 주셔야 합니다. 결국 저들은 주님의 뜻을 묻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택합니다. 바사바와 맛디아 두 사람이 모두 사도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만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120 문도는 두 사람을 세워 놓고 하나를 사도로 지명해 주십시오.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맛디아를 제비뽑아 12제자의 반열에 함께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인 소명에 대하여 주님 앞에 묻고 있는 저들의 진지한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자가 되는 자격에 있어서 소명의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비뽑는 절차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비뽑기는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네 단계를 거칩니다. 첫 째는 성경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상식에 준합니다. 저들은 마구잡이로 선택하여 세우고 투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사바와 맛디아 두 사람을 천거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가 사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상식을 다 동원하여 천거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함께한 사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뵌 사람, 이렇듯 저들은 상식문제를 충분히 고려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을 추천해 놓은 것입니다. 천거한 즉시 투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주님께 합당한 사람으로 지명해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이러한 후에야, 네 번째로 제비를 뽑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투표를 할 때면 언제든지 먼저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 주시기를, 투표를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지명해 주시기 바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러한 다음으로 우리가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대로 투표한다고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투표결과 역시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들은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울 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제비뽑기로 물었습니다.
참고로 네 번째의 제비뽑기하는 과정을 말씀드리면, 제비뽑기는 조약돌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매끈매끈한 조그만 조약돌 두 개에 천거된 두 사람의 이름을 각 각 씁니다. 이름을 쓴 조약돌 두 개를 둥그런 그릇에 담은 뒤에 기도를 드립니다. 두 사람 가운데 당신이 원하는 자를 사도로 지명해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조약돌이 담긴 그 그릇을 한참 흔듭니다. 그러다가 하나가 툭 튀어 나오면 그 조약돌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사도로 뽑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에 있었던 저들이 사용한 제비뽑기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밝히 계시되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제비뽑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선택의 문제가 나왔으니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성서적이지 못합니다. 선을 보고 나서 여러 명의 배우자감을 놓고 무작정 “주여 한 사람을 지명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는 그 계시가 꿈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마는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이 있고, 상식이 있습니다. 그러니 건강한 사람, 신앙이 있는 사람, 성격이 좋은 사람, 4봉사 정신이 있는 사람, 나아가 이기적인 즐거움보다는 남을 섬기면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 교회생활 속에서 봉사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해야지요. 그런데 이러한 자격을 모두 갖춘 사람이 두, 세 사람이라서 고민이 되거든, 그 때는 이렇게 생각해 보고 선택하여 결정하십시오. 사실 아무리 같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애초부터 똑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자기가 한 쪽에만 점수를 주어서 합리화하고 동등하게 만드는 것일 뿐, 사실 진정으로 동등하지는 않았습니다. 대개 보면 될 수 있는 대로 큰 것, 좋은 것, 이로운 것만 택해 나가다가 결국에는 큰 손해를 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첫 째 주님을 위하고, 둘째는 남을 위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선택의 기준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유다를 12제자의 반열을 채운 사도를 제비뽑기로 세우는 120 문도,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선택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간혹 우리는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지혜를 얻습니다. 맛디아를 선택하는 그 절차나 기준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지혜를 다해서 옳은 일, 선한 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둘이 남고 셋이 남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성령님의 인도를 믿고,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된 대로 정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