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8-9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에 나타난 ‘종말로’ 는 ‘마지막 권면’ 이라는 뜻입니다. ‘종말로’ 은 -이제 남은 부분을 말한다는 것이지, 꼭 ‘끝으로’ 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남은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제 전환을 위해 사용된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으로 …….” 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눌 때 결론에는 공통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윤리성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서론과 본론에서는 어떤 교리를 말했더라도 “종말로 …….” 라고 한 다음에는 실천 사항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도 많고 깨달아야 할 것도 많지마는 “끝으로 …….” 하게 되면, 그 다음 이야기는 꼭 실천해야 합니다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 “종말로 …….” 라고 한 후 말한 내용들은 대개가 실천 사항들 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생활지침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윤리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활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실천적인 면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본문에 ‘무엇에든지’ 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는 점입니다. 6가지 실천 강령을 이야기 하면서 매번 이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는 ‘호사(ὅσα)’ 라 하는데, 또 “어떤 일을 만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의 윤리가 절대윤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상대적인 윤리가 아닙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대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 윤리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기독교 윤리 강령은 우리들의 생각에 비하여 매우 파격적입니다. “무엇에든지”-대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에든지”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철학입니다. 그럼으로 세월이 변했다고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특징입니다. 절대윤리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대상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절대윤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윤리의 동기는 십자가의 사랑, 거룩, 거기에 바로 기독교의 윤리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로서 받은 그 큰 사랑을 생각하고, 이에 보답코자 하는 그 마음 안에 이제 그 대상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내 편에서 해야 함은 변함없이 다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황윤리는 기독교에 통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무엇에든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6가지를 꼭 실천하여 사십시오. 지난 주 화요일 날, 대학교 때 같이 기독학생회활동을 했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삼양사 사장이 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초대 받아 삼양사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대학교 때 성경을 같이 공부하고 QT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성경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며 활동을 같이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하며 살기로 결심들을 하고, 서로 받은 은혜들을 같이 나누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들을 몸소 체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 친구가 학교를 졸업하고 삼양사에 들어가 직장생활하면서도 학교 때 결심한 대로 삼양사가 재단은 불교재단이지만 열심히 성실하고 진실 되게 생활하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며 하는 일마다 잘되었습니다. 회사 사람들과 회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불교재단이지만 예수 믿는 것을 공포하고, 자랑으로 생각하며 어렵지만 하나님 앞에서 성결과 거룩을 쫓고 정직하고 진실 되게 살려고 노력했으며 교회에서도 목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룹 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자 삼양사 오너가 삼양사 그룹의 전체 사장으로 세우고 일을 맡겼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술 담배를 하지 않습니다. 경영을 잘 하니까 회사와 계열사들도 잘되고, 지금은 나이가 60세가 넘었지만 12년 동안 사장으로 계속 근무하고 있으며 종로에 있는 삼양사 본사를 이곳 판교 삼평동에 이사하여 본사 건물을 지어 근무하고 있는데, 저를 초대하며 본사를 구경시켜주며 같이 교제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편에서 서서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말씀 따라 순종하여 살면,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자신을 믿고 순종하며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함께 하여 주시고 세워주시며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삼양사 문 사장도 대학교 때 같이 성경공부하며 서로 삶을 나누었던 것이 자신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살아 그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치유의 기적뿐만 아니라, 요셉이나 아브라함 모세처럼 삶이 전 영역에서 함께 하시는 역사가 나타나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람이라고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성경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진실하고 거룩하신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본문 8절 말씀에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살아야 할 절대적인 6가지 윤리 조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천해야 할 6가지를 차례로 살펴봅시다.
첫째, 어떤 경우에라도 그리스도인은 참되어야 합니다.
참되다(true)는 것은 헬라어로 ‘알레데(αληθη)’입니다. 언제나 참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없고, 거짓될 수 있는 구실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에는 진실하지 않아도 된다, 저런 일에는 거짓되어도 괜찮다’ 는 생각은 어림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아이들한테 약을 먹이려고 하면 써서 안 먹겠다고 달아납니다. 그러면 대개의 엄마는 “얘야, 이 약은 쓰지 않고 달단다.” 하고 거짓말을 하는데 어린아이는 정말로 단 줄로 알고 입을 딱 벌립니다. 그러나 약을 넘길 때 보니까 쓰거든요? 아이가 야단을 하면은, 엄마는 ‘너 병 나으라고 할 수 없이 그랬다’ 며 변명하겠지만, 그리고 앞으로 또 그런 거짓말을 할 때 아이가 한 두 번은 더 속아 주겠지만, 이제 그 여파를 한 번 봅시다. 이번에 먹는 약은 정말 단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이 약을 먹겠습니까? 어제의 거짓말이 오늘은 불신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떤 거짓말이 해가 없고 어떤 거짓말이 유익하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참되고 진실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무엇에든지 경건해야 합니다.
경건은 헬라어로 ‘셈나(σεμνά)’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사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든지, 말을 하든지, 생각을 하든지, 하나님이 보고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경건한 마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항상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무엇에든지 옳아야 합니다.
옳은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불의의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옳게 살아가야 합니다. 옳다는 것은 헬라어로 ‘디카이아(δίκαια)’, 영어로 just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정결해야 합니다.
정결은 헬라어로 ‘하그나(ἁγνά)’입니다. 지혜는 뱀같이, 순결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마 10:16)
어떤 세계에 살아도 정결해야 합니다. 탐욕으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증오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특별히 제일 더러워지기 쉬운 것이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온전히 빼버릴 수 있어야 마음의 정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 덕목 6가지 중 나머지 두 가지는 의미가 더욱 적극적입니다.
다섯째 항목에 가서는 “무엇에든지 사랑하며” 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할만하다 해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매력적’ 이라고 번역합니다. 헬라어로는 “프로스필레(προσφιλῆ)”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받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직장에서도 사랑받고, 가정에서도 사랑받고, 교회에서도 사랑받는 사람이 되라-사랑의 대상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입니까? 얼마나 어렵고 귀한 말씀입니까? 잠 31장을 보면, 훌륭하고 지혜로운 아내가 있을 때에 남편이 칭찬하고 자녀들이 사례한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한테서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어머니이니까 자녀를 위해 얼마나 수고합니까? 새벽부터 밤까지 자나 깨나 정성을 들이지만, 자녀들로 부터 사례를 받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알 때에 우리는 다 양보하고 다 사랑하는 사랑의 순교자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까? 특히 교회 교인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섬기려 나오는 것이지, 섬김을 받으러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죄송한 말씀이지만 교회에서 월급 받는 사람은 교역자 몇 사람뿐이요, 여러분은 다 돈 내며 믿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 희생하고, 다 수고합니다. 그렇게 바치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정성들이고 나서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말에 잘못이 있었든지 아니면 내 사랑에 뭔가 비뚤어진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무조건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이 병든 것이지 잘못된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은 피드백 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진정 바로 된 아내입니다. 또한 바로 된 자녀라면,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사랑의 순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라는 것은 차원 높은 말이요, 일반적인 말이 아닙니다. 상호간에 감동 있는 사랑, 응답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칭찬할만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유페마(εὒφημα)”입니다. 영어로는 well-spoken입니다. 칭찬도 받아야 합니다. 혹시 내 칭찬이 가짜는 아니었습니까? 나는 나쁜 말 하고ㅡ 저쪽에서는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이상의 6가지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참되고, 의롭고, 경건하고, 정결하고, 사랑받을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게-무엇에든지, 어디에든지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모습입니다.
8절 하반 절에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고 합니다. 덕은 ‘아레테(άρετῄ)’, 기림은 ‘에파이노스(ἐπαινος)’입니다. 덕과 기림은 어떠한 덕스러움을 생각할 때에, 혹은 어떤 칭찬할만한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의 기준을 즉 이 6가지를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9절에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합니다. ‘배운다’ 는 말은 엄격히 분석해 본다면,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이라는 기능에 의해서 알아지는 것입니다.
또 ‘받는다’ 는 것은 가슴으로 받는 것이 아니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머리로 받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좋아서 받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사랑하겠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울 때나, 마음 문을 열고 전적으로 수용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듣는다.’ 것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처음부터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들려집니다. 내 주의와 생각을 그 쪽으로 기울여야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앉아 있지만, 가만히 보면 눈 뜨고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들으면 ‘저쪽 생각이 옳다’ 는 믿음과 존경을 가지고 대할 때에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다’ 는 것은 체험적인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이제는 행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배웠고 하나님께 나가는 교리를 배웠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철학 생활모습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배운 바도 행하고, 받은 바도 행하고, 들은 바도, 본 바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얼마나 오묘하고 귀한 말씀입니까? 행한 것만큼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기는 많이 배우는데, 행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거리가 많고 머리가 복잡합니다. 이제는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로 배워도 실제로 얻는 것은 내가 행하는 것뿐입니다. 행한 만큼 배웁니다. 사랑하라고 배웠으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배웠으면 내 맘이 비록 사랑하고 싶지 않더라도 배운 대로 한 번 해 봅시다. 그러면 ‘아, 이것이 이렇구나!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겸손 하라, 용서하라, 인내하라 ……. 배운 것이 이렇게 많지만, 배운 다음에 실천하고, 실천한 다음에 다시 성경을 읽어야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밤낮 배우기만 하면 생각만 많고, 말만 많고, 행하는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머리만 복잡해지고,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하여야 합니다.
누군가「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잘 깨달아지지 않고, 의심이 생기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기도하시오” 라고 대답할 터인데,「무디」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의심이 생기고 깨달아지지 않으면, 나가서 전도하라, 성경책을 놔두고 나가서 전도하고, 지나가는 손수레를 밀어주라 무슨 일이든 찾아서 봉사하고 전도하라 그리고 돌아와서 성경을 읽으면 해석이 잘 될 것이다” 참으로 귀한 교훈입니다. 행하지 않고 읽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즉석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물질로 주라 하셨으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움켜잡으면 안 주십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주면 나간 것, 없어진 것만 생각합니다. 경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실천하는 삶이 생활화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역사가 나타나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 29).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게 배우라,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면 짐이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우기만 하고, 따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짐이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그 평강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배우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받기만 하고 “아 기쁘다” 하고 펄펄 뛰어봐야 이것은 곧 사라질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듣고, 본 바를 행하여야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행한 만큼만 평강을 얻습니다. 행한 만큼만 축복을 받습니다. 행하지 못한 부분은 번민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한 인물을 봅시다. 어떤 젊은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 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눅 18:22) 그러나 그 관원은 부자이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 사람은 끝끝내 아마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은 들었는데, 실천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평강을 얻지 못했습니다.
앞 장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생각을 지키신다는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 조건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한 단계 더 높은 말씀입니다. 듣고, 받고, 보고 배운 바를 행할 때에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고 합니다. 이것은 동력 동사하겠다는 말씀이요,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생활 속에 같이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형통하고, 이제 그 능력이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도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을 통해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합시다. 그러면 평강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