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4-8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의 육적 자랑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를 신뢰하는 유대인을 공격한 그가 그들 못지않게 이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을 단정하려는 것입니다.
I. 본문 4-6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육적 자랑할 만한 것을 피력합니다.
그것은 육체를 신뢰하는 유대인을 공격하는 그가 그들에게 못지않게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을 단정하려고(8절)한 것입니다. 바울은 5, 6절에서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그가 버린 것에 관해 7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7가지는 바울이 자랑할 만한 것, 신뢰할 만한 것입니다.
첫째, 난 8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할례는 지금 세례와 위미는 같으나 의식이 다릅니다. 유아 세례가 이 할례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할례 받은 그 자체는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선민이다’라는 뜻이 있고, 이스라엘의 영원한 언약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할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자기’ 라는 의식이 형성되기 전인 난 지 8일 만에 행해집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내 의와 선행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요,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해 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은총 적이요, 순수한 구원의 약속을 말해주기 때문에 8일 만에 받는 할례가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8일 만의 할례가 중요한 이유는 ‘혈통의 순수성’에 있습니다. 이삭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8일 만에 할례 받은 제 1호가 이삭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지금 이스라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규례를 따라 수속을 하고, 히브리말을 배우고, 율법시험을 쳐서 어느 수준에 도달하고, 맹세하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간에 개종해서 이스라엘 사람이 되면 30세에도 40세에도 할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8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것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이요, 중간에 개종하지 않는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합니다.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시고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자기를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셋째, 베냐민 지파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자’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12 아들 중 가장 사랑하는 막내요, 그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아 준 아들입니다. 이 베냐민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나왔는데 바울은 그 이름을 따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또한, 르호보암 왕 당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베냐민 지파는 남쪽에 속하여 훗날 메시야의 혈통이 되는 유다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지파라 함은 사도바울이 왕족이요, 간접적으로는 메시야 혈통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넷째,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헬라권에 사는 히브리인이 많았는데, 이들은 자기네 말인 히브리말을 잊고 헬라어 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오늘날도 미국에 있는 이스라엘의 회당에서는 찬송가도 성경봉독도 히브리어로 하는데 설교는 영어로 합니다. 어렵고 추상적인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은 히브리어로 말해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설교를 다 알아들으려면 상당한 학술적 언어를 습득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려운 히브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히브리 종교에 능통하여, 그 풍속에 완전히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순수한 혈통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바리새인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사람 중에도 특별히 엄격한 규례를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파리사이오스(φαρισαἶος)”는 ‘구별’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약 6000명의 바리새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특별히 성별된 히브리인을 뜻합니다.
여섯째,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유대교회의 극렬분자요 적극적인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일곱째,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모든 전승, 모든 규례를 다 지켜서 유대 사람으로서는 아주 상급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상 7가지로 자기자랑을 이야기합니다. 유대 사회 어디에다 내 놓아도 당당한 가브리엘 문하의 학자요, 히브리인이요, 종교에 능통하고, 모든 사람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아주 높은 긍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II. 바울 사도는 예수님 안에서 그가 받은 유익과 기대에 비하여 유대인의 특권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그는 7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라고 말씀합니다. 즉 그는 바리새인이었을 때 그가 유익하다고 여겼던 것들, 그리고 그가 이전에 중대하게 여겼던 것들 “이 모든 것들” 을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겼습니다. 그는 이것들이 그를 윤택하게 하기에 불충분할 뿐 아니라, 만일 그리스도에 반대하여 그가 그것들을 신뢰했다면, 분명히 그를 허약하게 하고, 파멸하게 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행한 것 이상을 행하라고 설득하지도 또한 자기가 그만둔 것 이상의 것을 그만두라고 설득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내건 기존의 어떤 것도 제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그는 우리에게 그가 열망하였고 얻으려고 애썼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그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경험으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실제적이고 효력이 있는 지식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가진 지식의 지식 중에서도 거장 고상한 지식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 혹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는 여러 뛰어난 인간의 지혜와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넘어서는 풍성하고 초월적인 고상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지식은 타락한 죄인들의 정황에 알맞은 것이며, 그리고 그 지식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는 어찌하여 유대인으로서 또한 바리새인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그러나” (7절) 라는 말로 자신의 자랑스러움을 표현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 이란 그가 앞서 말한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입니다. 그는 본문에서 “모든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세상적인 쾌락과 또한 외적 특권들, 즉 그리스도 대신에 그 마음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들, 또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가치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다만 해로 여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8절에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모든 존귀와 이점들을 내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고백하고 전파함으로 따라오는 모든 불명예와 고난을 견뎠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닻을 내리게 되자, 그는 거기에다가 희망을 걸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특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해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을 배설물로 찌꺼기로 여겼습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비해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그리스도와 비교하고자 할 때, 최고도로 경멸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원의 은혜를 손해 보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반대로 구원의 은사를 인간의 영혼 안에 맺힌 성령의 열매로써 또한 인간의 영혼 안에 맺힌 하나님의 형상의 결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신약성경은 구원의 은사를 신적인 것,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귀중한 믿음이라고 일컬어지며 온유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값진 것”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전 4:4; 벧후 1:1).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마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한테 “당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일까요?”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전도학에서는 이것을 간단하게 정의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요, 내 주인이요, 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가 내 가치관의 중심이 되시고, 그리스도가 내 목적을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참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목적이요, 주인이요, 중심이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가치 변화인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속사람이 변화되고, 그 가치관이 전적으로 달라집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달라진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이런 것이 소중했으나 이제는 저런 것이 소중합니다. 전에는 이런 일에 미쳤으나 이제는 그 정반대의 일을 위해 내 온 정성을 쏟고 삽니다. 이쯤은 되어야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에 좋던 것이 아직도 좋다면 이런 사람은 아직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가치관의 변화가 뿌리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솟아나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전에는 이런 것이 나를 유익하게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해롭습니다. 취미도, 생각도, 남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자기만의 신비로운 기쁨을 스스로 향유하며 삽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절대 가치 변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절대적인 가치가 변호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소중한 것을 가졌다’ 하는 마음은 참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은 다 나쁘고 남의 것은 다 좋아 보입니다. 물론 자기 것만 지나치게 위하는 것은 교만입니다마는 그 중 우리교회 가장 좋고,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가장 좋은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이런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거기서 새롭게 발견한 가치관, 그것으로 형성된 가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성된 가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치관이 중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가치관이 중생하지 못해서 먹고 마시는 세상 것이 좋고, 그 전의 것이 좋아 보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이 좋다면,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성령으로 예배하고, 영적인 것을 중히 여기고, 예수님을 자랑하라 합니다. 그의 긍지가 예수님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전에 좋아하던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위하며 어떤 것을 포기할 때는 그 포기한 만큼 ‘그 무엇’에 대한 가치관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것은 가치 인식입니다. 어떤 가치 자체는 내가 인정한다고 해서, 도는 부인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위하여 버리는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내가 100만 원짜리 물건을 산다고 합시다. 나는 그 물건 하나를 위하여 내게 있던 백만 원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100만원을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100 만원을 주고 산 그 물건이 내게 그 만큼의 가치로 내게 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100만 원짜리 물건을 어쩌다 길에서 주웠다면 이야기가 사뭇 달라집니다. 주운 물건은 그 참 가치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게다가 100만 원짜리를 내가 10만원에 샀다면, 미안하지만 그 물건은 100만 원짜리가 아니라 10만 원짜리입니다. 내 마음 속에는 적어도 그 물건이 10만 원 이상으로 좋은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밭에 감추인 보화(마 13:44)’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후, 돌아와서 집, 땅 할 것 없이 저한테 있는 것을 다 팔아 치웁니다. 밭에 감추인 것이 너무도 값지고 귀한 것이므로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팔아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그것을 팔기를 주저했다면 그는 보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 밭만 사면된다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가 다른 것들을 아낌없이 팔아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 가치를 평가하시기를, 부모나 형제나 전토나 무엇이든지,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눅 14:26, 33).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버리고 따르라, 부인하고 따르라고 말씀하시고(마 16:24), 만일 여기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버리고, 손이라도 찍어 버리라고 하십니다(마 5:29, 30).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그 가치가 그렇게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옛사람의 가치관, 옛날에 좋아하던 것을 깨끗이 버렸습니다. 본문 8절 이하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즉 스스로 상실하고 스스로 포기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7절에서는 그는 ‘이전에 유익하던 것을 지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전에는 그렇게 소중하던 것이 이제는 소중하지 않고 무관심할 뿐 더러 앞으로는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해로 여긴다.’ 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에 유익하던 것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해만 될 뿐이요,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계된 것만이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에 좋아하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고, 그리스도로 인한 유익만을 최고로 즐기며, 충성을 다 할 때에 바로 이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예봄교회 교우들은 바울처럼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