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12-18 ㅣ 김남수 목사]
바울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 되라고 권면하면서 그 방법으로 겸손을 말씀했는데, 그 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각자가 지나치게 남에게 관심을 둘 때 원망과 분열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의 구원에 돌아와 경건한 두려움 속에 살 때에, 교회는 고요해지고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본 절 말씀을 보면 “두렵고 떨림으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먼저, 죄로 인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사도들로 인하여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고 형벌을 두려워하는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사랑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이것은 귀한 사랑 때문에 오는 두려움입니다.
예) 어떤 부인은 퇴근하는 남편에게 피곤해 보인다고 하는 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밖에서 아무리 피곤한 일이 있었어도 그 가족에게만은 유쾌한 아버지, 믿음직한 남편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말을 거리낌 없이 해도 된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사랑으로 인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도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혹시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나 않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죄송스럽게 된 일은 없었는가,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오는 두려움이지, 저주받을까봐 걱정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너의 구원을 이루라”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놓고도 경건함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3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과거의 구원, 미래에 있을 종말적인 구원, 현재의 구원- 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이 세 가지 측면에서 구원을 말씀합니다.
과거의 구원은 이미 구원받은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을 말합니다.
앞으로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 이것이 종말론적인 구원입니다.
그리고 현재적 구원은 반복적인 것입니다.
매일 매일 당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 낙심하지 않는 것, 죄 짓지 않는 것, 의심하는 않는 것,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 이것이 현제의 구원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있는 앞에서는 아주 잘 믿는 척하고, 없을 때에는 함부로 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데서 칭찬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고요함 중에 고요한 것은 고요함이 아니다.
소란한 중에 고요한 것이 참 고요함이다. 남 안 보는데서 칭찬하는 것이 참 칭찬이다.아무 것도 없는 것 가운데서 진실한 것이 참 진실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보는 앞에서 진실한 척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사람 앞에서 이러고저러고 할 것이 아니라 기도도 혼자서, 경건도 혼자서,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진실이요.
- 이것이 신앙입니다.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선한 일을 위해 의욕을 주실 뿐 아니라, 능력도 주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먼 곳에 계시지 않고 그들 안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33).
우리 안에 와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에서 좋아하거나, 싫어하시는 것에 상관 않으시고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십니다.
또한 인간들의 공로 유무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뜻을 따라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구원도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말미암았으며,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도 하나님의 의지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을 따리 행하시되 강제로 행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속에 소원을 일으켜 주십니다.
마음속에 소원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할 때는 마음속에 소원이 일어나는가 안 일어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마음속에 소원이 불붙듯 일어나고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소원이 일어난 다음에는 행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소원이 불붙듯 일어나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약 2:17).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소원이 일어난 후에는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말씀을 줍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하나님의 소원을 안다면, 시시한 일로 남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원망하기시작하면, 결국은 하나님까지 원망이 올라가게 됩니다.
작은 사건 때문에 원망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별난 것까지 원망하게 됩니다.
어떤 부인이 10년 넘게 살면서도 한번 다투고 나면 중매쟁이를 원망합니다.이처럼 한 번 원망하면, 고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심해집니다.
때문에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뜻을 알았다면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시비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무슨 시비할 것이 있겠습니까?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원망과 시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참인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 하는 시시한 문제 때문에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보다 더 커지고, 먼저 되겠다고 나서던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 20:22)”고 하실 때 그 잔이 죽음을 뜻하는 줄도 모르고 넙죽 마시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2제자 중에 가장 먼저 순교했습니다.
야고보의 그 대답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이요, 하나님 구원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원망과 시비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당시 원망하고 시비하다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잊어버렸고, 하나님의 행동적인 소원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했고, 불신앙에 빠져 광야에 엎드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밤 죽는다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불분명하다면 지금 회개하고 고쳐야 합니다.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15절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라고 말씀합니다.
본 절은 이 세상을 “거스르는 세대” 라고 말씀합니다.
“거슬린다.” 는 말은 역행한다는 뜻인데, 이것을 좀 깊이 생각해보면 곡해한다는 뜻이요, 순수하게 받아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순수하게 받아주지 않습니다.
곡해합니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거스르는 세계입니다.
순수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기주의적이고 탐욕주의적입니다.
그러면 이런 세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다음 세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째, 흠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서나 그리스도를 향해서나 아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우리는 이 세대, 이 세상을 살면서 행여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순수해야 합니다.
순수는 섞이지 않았습니다.
우유에 물을 타면 그 우유는 순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동기, 생활의 사상 의도가 깨끗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믿는 마음이 순수해야 합니다.기도하는 마음도 순수하고 티가 없어야 합니다.
만일 동기가 복잡하면 그 신앙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지켜나가고 그 순수성을 보존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하여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15절에는 “흠 없다”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l나중에 나오는 “흠 없는 자녀”에서 “흠 없다”는 헬라어로 “아모마(ἄμωμα)”입니다.이 말은 아주 허물이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 없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사람 앞에서 주관적으로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평을 받을 수도 있지만,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고 평을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때에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지 정말 그것은 수수께끼가 아니겠습니까?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아도 자신과 세상 안에서 순수하고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소원입니다.
다음은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 는 생명의 말씀, 즉 메시지 있는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증인은 말없이도 증거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이 빛들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빛은 말이 없어도 길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예화) 헬라의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장님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갑니다.자신은 비록 불빛을 못 보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이 빛을 보고 내게 부딪치지 말라고 등불을 켜들고 갑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어떤 사람하고 “딱”하고 부딪쳤습니다.
장님은 화가 났습니다.
“너는 눈도 없느냐? 나는 소경이다. 앞을 못 보지만 이 등불도 못 보느냐” 하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자 부딪힌 사람이 손으로 등불을 더듬어 만져보고는
“자 네 등불은 꺼진지가 이미 오래 됐네.” 하고 하더랍니다.
내가 등불을 들고 있지마는 불이 꺼진 줄 모르고 들고 다닙니다.
꺼진 것을 모르고 사니까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사회에서든, 직장에서든, 어디서든지, 빛과 같은 것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작장이라면, 이 직장이 환히 밝아져야 합니다.
주님은 친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상입니다.메시지 있는 생을 살아야 하고, 빛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하고, 성실하고, 그 선행이 많은 사람들을 밝은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16절을 봅시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을 언제나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운동선수로 생각합니다.빌립보는 헬라의 아덴과 가깝고, 그곳에서 올림픽을 했기 때문에 곳곳에 운동 경기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16절 상반부에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습니다.
운동선수는 한 순간을 위하여 평생을 절제하고, 또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기에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라고 한 번 자기의 삶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나이 많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합니다.
마지막 골인 점에 가까이 와 있음을 압니다.이제 요단강을 건너가 골인할 때에 주님께서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게 주실 면류관을 주실 때 그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받을 상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전도해서 믿게 된 사람, 내가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제자들이 된 사람, 이들이 바로 내가 면류관을 얻게 되는 기준입니다.
이 일에 동참하여 같이 협력하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기준입니다.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굳게 붙잡으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 생활을 잘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빛이 되고 말씀이 되면 바로 그것이 “나의 수고의 열매요, 그리스도의 날에 나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부와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것입니까?결국은 전도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그들만이 나의 자랑이요 훈장과도 같이 내가 받을 상이 될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가장 큰 기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17절, 18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봉사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내가 전도한다고 됩니까?
믿음은 하나님께 로서 오는 선물입니다전도는 내가 하지만, 믿고 안 믿고는 주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믿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사람이 예수 믿어 믿음이 생길 때에 가장 기뻐하고 또 그들의 믿음이 자라서 봉사하려고 할 때에 기뻐합니다.
전제로, 즉 순교의 제물로 드릴지라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요3서 3절을 봅시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나이 많은 사도 요한이 그가 전도해서 믿는 자녀들의 믿음의 소식을 듣고 자기의 기쁨을 이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기쁨이 충만했고, 그 기쁨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믿음과 봉사에서 오는 기쁨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내 피를 쏟아 붓는 관제를 드릴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가치관과 행복관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희생하며 기뻐했습니다.이것은 생명을 거는 종말론적인 기쁨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8)” 고 말씀합니다.
기쁨은 기쁨을 전달합니다.
다른 것은 없더라도 기뻐하는 것만 가지고도 봉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기뻐하며 남에게도 “나와 함께 기뻐합시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때에, 다른 사람도 나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는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