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5-11 ㅣ 김남수 목사]
바울은 빌 2:1-4에서 교회가 하나 되기를 권하고, 그 요소로서 겸손을 강조한 바울은, 이제 그 겸손의 본으로서 그리스도를 예로 제시합니다.
주의 겸손을 배우는 것은 주께서도 친히 명하신 바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사랑의 본이시며, 충성과 용서의 본이시고, 인내와 극기의 본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최대한의 자기 비하를 하셨고 이런 자기 비하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하신 주님을 하나님은 또한 최고로 높이셨습니다.
주님의 겸손을 본받는 길은 그대로 그의 존귀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이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말 광명의 사자로 둔갑한 사탄이 사막에서 기도하고 있는 교부에게 다가가서 그를 시험합니다.
사탄은 빛나는 천사의 모습을 하고 다가가서 그를 유혹합니다.
“나는 가브리엘 천사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너에게 왔느니라.” 하고 말합니다.
그 때에 교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시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보냄을 받았겠지요.
저는 천사의 방문을 받을 만한 사람도 못되고 아무런 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 사탄의 방문을 물리쳤습니다.
사탄은 실패하고 그 자리를 떠나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겸손한 자는 사탄인 나도 유혹할 수 없다”
여러분! 겸손한 자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반대로 교만하면, 사탄의 시험에 그대로 빠져듭니다.
이 귀중한 진리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암시된 내용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사도 바울의 사랑받는 교회요, 당대의 가장 높은 칭찬을 받는 교회이지만, 그래도 그 교회 안에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염려하면서 그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빌 2:2-4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하나 되지 못하는 것,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해법은 바로 겸손에 있다고 말씀하는 가운데, 완전한 해법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품어야 할 마음, 예수의 마음은 한 마디로 말하면, 곧 겸손입니다.
겸손은 심리상태가 아닙니다.
겸손은 행동이다 -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
육신이 되신 incarnation,곧 성육신을 말합니다.
본문은 겸손의 4단계, 명확하게 4단계로 나누어 말씀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첫 단계는 비웠다, 둘째 단계는 되었다, 셋째 단계는 복종하셨다, 넷째 단계는 하나님이 높이셨다, 입니다.
첫 단계가 자기를 비웠다는 것입니다.
7절에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비웠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케노센(εκένωσεν)”인데, 기독론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비웠다”-는 아주 텅 비웠다는 말입니다.
먼저는 자기를 비웠습니다.나 됨을 비웠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비움을 말하는 것입니다.비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됨을 비워서, 아주 깨끗이 비워서-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시작입니다.
스스로 비우셨습니다.
요 10:18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버리노라-이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스스로 비우는 것입니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피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비로우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뜨겁게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러면 어느 사이에 내가 없어지고 맙니다.좌우간 남편 앞에 고집부리는 사람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고, 내 자존심이 아직 그렇게 소중하다면,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자존심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동안에 다 녹아 없어집니다. 명예고 욕심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 녹듯이 다 사라집니다.
없어지고 맙니다.그것이 겸손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지요.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작아진다나요.
작아지는 게 아니라, 없어진다니까요.
그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건 절대로 억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지어먹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 그 자체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아주 비어버립니다.남이야 뭐라고 하든, 나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있으나 없는 것처럼, 알지만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지고 맙니다.
유능하지마는 무능해지고 맙니다.
할 수 있는 일인데, 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보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 화가가 그린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의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바보 예수”라는 제목입니다.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보아도 바보다, 이것입니다.
너무 사랑하고 고생을 많이 해서 입술이 마르고, 불쌍한 사람을 너무 많이 불쌍히 여겨서 눈 하나가 찌그러지고 진물이 나옵니다.
그렇게 그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바보가 되신 것입니다.그 능력 많으신 어르신께서,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되었다” 입니다.
“되었다” 는 말은 헬라어로 “게노메노스(γενόμενος)” 인데, 이 말은, 영어로는 “Becoming” 이라는 말입니다.
되었다는 7절에 사람과 같이 되었다, 된다는 것입니다.
비워서, 또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저 사람과 같이 죄인의 모습으로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죄인과 가깝게 되어 죄인이 되어 버려서. 불명예스럽게도 죄인의 친구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세속주의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 라고 하는 좋지 못한 이름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똑같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레오 버스카글리아』 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작가이면서 연사입니다.
이 분이 아주 재미있는 대회를 하나 마련하였습니다.어린 아이들에게 선한 일을 장려하기 위해서, 마을에서 제일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각자가 착한 일 한 것을 알려라, 하고 모집을 했더니 저마다 뭐 이런 일 했고, 뭐 저런 일 했고, 착한 일 했다고, 모두가 다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집 아이가 착한일 했다고 상을 받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좋기는 하나 아, 얘가 무슨 일을 했기에 ……. 그게 궁금했습니다.
뭐, 돈도 준 적이 없고, 넉넉지도 못한 형편인데 “네가 무슨 착한 일을 했느냐, 무슨 구제를 했느냐” 하고 물었더니.
“아니에요, 나는 뭐 돈도 없고, 그럴만한 것도 없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할아버지가 늘 쓸쓸해합니다.
늘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우는 것 같아요.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품에 안겼지요.
늘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놀랐어요.할아버지가 나를 쓰다듬으면서 나를 좋아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눈물 흘리고 있는 할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예,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구제 보따리 가지고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나 스스로 비워서 내가 사랑하는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Becoming”입니다.그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세 번째로 말씀합니다.
“복종하셨다”8절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여기 “복종하다” 는 헬라어 단어는 “휘폐코오스(ὑπήκοως)”라는 말인데, 노예적 복종을 말합니다.
모르고 순종하면 복종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데도 따라갑니다.이게 복종입니다.
다 알고 하는 게 아닙니다.납득이 가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면, 그것이 복종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복종하신 거라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빌라도 앞에, 로마 군병 앞에 끌려가서, 매 맞고 죽으시는 거 같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는 순간 완전하게 복정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현실을 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받아들입니다.
요 18:11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현실 속에서도 조용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입니다.여러분, 변명하지 마세요.
구차하게 이론 늘어놓지 마세요.하나님의 뜻에 조용하게 복종하세요.
그것이 겸손입니다.
예)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구두를 스스로 닦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옆에 있던 비서가 깜짝 놀라면서,
“아니 대통령께서 이렇게 구두를 닦으시다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제가 미리 닦아 놔야 되는 건데 …….”
그러니까? 대통령은 껄 껄 웃으면서,
“이 사람아, 그러면 대통령이 자네 구두를 닦아야 하겠나?
내 구두 내가 닦는데, 그게 무슨 문제야?”
이 얼마나 참 평안한 겸손입니까?
교만하다보면 시끄러워집니다.
겸손하게 되면 이렇게 편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아주 완전한 자유입니다.
보십시오.
남이 뭐라고 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자유롭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겸손하게 되면,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무슨 소원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 기도, 기도 아무리 해 보세요.그냥 들어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 응답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겸손하게 만들어 놓으신 다음, 그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교과과정입니다.
달란 다고 그냥 다 내어 주시지 않습니다.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겸손한 자에게, 겸손을 갖춘 다음에만 주십니다.
그러니까 겸손하게 만든다는 그 자체가 복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진 다음에, 겸손한 마음에, 겸손한 그릇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대로 되리라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제야 높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시고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놓여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시고 만주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것,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높이는 것처럼, 맹랑한 일이 없습니다.
다 쓸데없습니다.그것으로 되지도 않고요.
문제는 나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바로 여기에 축복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물어보세요.
모든 문제의 그 깊은 원인이 무엇인가, 물어보세요.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그런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
그 그리스도의 겸손,
그 마음을 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