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1-4 ㅣ 김남수 목사]
빌립보 교회 설립 과정이 행전 16:1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가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 들어갔는데, 빌립보 성에는 유대인이 적게 살고 있는지라,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서 안식일에 조용한 강가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이 강가에서 바울은 자주 장사를 하는 여성 루디아를 만나 전도하게 되는데,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시므로 그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 집을 열어서 예배 처소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넉넉한 루디아의 집이 선교 본부가 되고, 빌립보 교회가 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루디아라는 한 여성으로 시작된 교회인 만큼 아마도 여자가 교회전체를 주도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는 장점도 있었고 단점도 있었습니다.
장점은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교회들은 또 갇히셨구나 생각하고 기도만 했지만, 빌립보 교회는 여성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갇히셨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인데 “얼마나 춥고 배고프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로금을 모읍니다.
그것을 에바브로 디도라는 목사에게 맡겨 바울에게 전해주고, 감옥에 갇혀 불편을 겪고 있는 바울 사도를 잘 돌보아 드리라고 로마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빌립보 교회의 여성적인 장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단점도 있었습니다.여성의 결정적인 약점인데, 바로 질투입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질투하고 시샘하다 보니, 교회가 화목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니 바울의 마음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빌 2:1-4절에서 권면하기를 은근하게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라나, 단체나, 교회가 힘을 얻으려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unity).그런 다음에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harmony).
하나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습니까?
젊은이와 기성세대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음은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이렇게 각자가 가진 특성들이 하나의 뜻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때 힘은 하나로 되어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와 반대로 분열이 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면, 각자가 가진 능력도 발휘할 수 없고, 개인과 단체의 능력도 약화되어 다 무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본래가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사람은 태어날 때 누구나 빈 몸으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다 똑같은 하나입니다.
여기에 무슨 빈부귀천이 있겠습니까?
또한 세상을 떠날 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덤의 묘지가 크고 작고, 비석이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마는 그 속에 썩어 누워있는 시체는 꼭 같습니다. 내용이 같은데 겉이 불필요하게 크고 작고, 넓고 좁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사람은 태어날 때 한 모양이고, 마지막으로 가는 모습도 한 모양이므로 본래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길을 지나가던 한 손님이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면서 이것을 알아맞히면 상을 주겠다고 했답니다.
질문은 이스라엘의 제1대 왕이 누구이신가? 라는 문제인데, 아이들은 대답을 하지 않고, 몰려 앉아 자기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다시 와서 일제히 사울 왕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손님은 꼼짝없이 전체에게 상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모두가 하나의 결론을 내기만 하면 된다는 지혜로운 생각으로 하나 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라는 의식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도 하나요, 마지막 운명도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우리는 하나 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같다고 인정할 때에라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엡 4:3 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된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 됨의 원리란 권력이나 능력이나 힘이 아닙니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공약도 아닙니다.오직 성령으로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전에 노사문제가 한참일 때 어떤 회사에 노사문제가 터졌는데, 그 회사의 사장님은 허탈감에 빠져 어찌할 줄 몰라 했습니다.
그간 20년을 동고동락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완전히 남남이었다는 것입니다.
20년이 아니라 30년, 50년을 함께 있었어도 이해관계로만 한 직장에 있었다면 하나 될 수 없습니다.
하나 됨의 역사한 주가 하나요, 고백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인 즉, 성령의 감화 안에서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하지 않고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화로서만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하나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마디로 이것은 죄와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 되지 못하는 원인이 중요합니다.
하나 되자는 것, 그것만 가지고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 됩시다.우리 절대 헤어지지 맙시다. 이런 소리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대부」라는 영화에 보면, 깡패 두목들이 모여 하나 되기 위한 예식을 치릅니다.
깡패 두목들이 즉석에서 손가락을 툭 툭 잘라 피를 컵 하나에 모아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마십니다.
서로의 피를 마셨으니 우리는 이제 피로 맺어진 몸이다.
앞으로 우리끼리는 절대 싸우지 말고,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웬걸 며칠 후 시시한 일로 싸워서 다 죽이고 두 사람만 남게 됩니다.
결국 하나 된다는 것은 의로울 때만 가능하고, 선한 일을 할 때만 되는 것이지, 악한 방법, 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 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셨는데 , 이런 마음과 사랑과 뜻의 내적 일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형식적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우리 교회-임시목사 청빙하는 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임시 목사 청빙하는데 당회원과 청빙 위원들이 기도하고 하나로 뜻이 모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신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한 이유를 말씀하고 하나 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입니까?
먼저,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나 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본문에서 4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랑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합니다.
자기 자랑은 곧 불신앙이요 교만으로 통합니다.
교만이 있으면 마음속으로부터 분열이 생깁니다.
그래서 창 11장의 바벨탑의 역사를 보면 인간이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하고 단결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랑이 있는 곳에는 분열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에도 자꾸만 자기만 잘났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왠지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 되는 비결입니다.
둘째,자기 우월감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특권 의식 때문이요, 쉬운 말로 자기가 잘났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라고 말씀합니다.
“다툼”은 의견이 불일치 될 때 일어납니다.
두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두 사람이 서로 자기를 내세울 때 다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함으로 회개하고 자아가 깨어지면 서로가 절충이 됨으로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허영”은 알맹이가 없이 겉을 치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부풀게 하여 허영을 부리게 합니다.
허영을 부리게 되면 시험이 다가오게 되고 허영으로 자랑하게 되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파괴하게 됩니다.
3절 하반부에서 사도바울은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다툼과 허영은 사랑의 위로와는 전혀 반대되는 행동이며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생기는 결과입니다.
다툼과 허영으로 일을 하는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장로님이 말끝마다 “나는 성질이 못되어서 복 받을 만하지 못하는데 이만큼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우리 집사람 때문인 것 같아요.” 합니다.
“우리 집 사람은 성품이 좋고 덕이 높아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가 봐요.” 라고 합니다. 얼마나 값진 이야기 입니까?
나는 복 받을 만하지 못한데, 내가 아내 때문에 복 받아 잘 살고, 나는 시원찮은 사람인데, 내 남편 때문에 이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 생각을 한 번도 생각한 것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속으로 생각만 할 뿐 아니라, 이제부터는 말을 하도록 합시다.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 때, 그 가정에 무슨 싸움이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치켜세우면서 싸우는 거 봤습니까?이런 상황에서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에 직장도 가정도 교회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대로 되어 자기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한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젊은 세대와 자녀를 대하여 “나는 부족한데 너희들은 참 훌륭하다”는 말을 하고,
또 자녀들은 “나는 부족한데 부모님은 참 훌륭하십니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 있다면 둘이 모여도 하나요, 열이 모여도 하나요, 만 명이 모여도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자기집착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 주관이라고 하는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자기 일도 물론 성실히 해야 하겠지만, 남의 처지도 그 분의 처지에서 좀 더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사랑과 동정으로 그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화목을 파괴합니다.
어느 가정의 남편이 외과의사인데 그 남편은 매일 밤 11시, 12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간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수술을 하느라고 피를 만지고 나면, 집에 들어 갈 마음이 없고, 들어가서 잘못하면 부부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내어 저녁도 함께 먹고, 당구나 탁구를 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늦게 집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부인이 남편이 매일 밤늦게 들어온다고 불평을 합니다.
여러분, 처지를 바꾸어 놓고 보면,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래야 하나가 됩니다.
자기 주관적인 고정관념에 딱 매여 있는 것을 터널 뷰(Tunnel View)라고 합니다.
굴속에서 보면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저 쪽 끝에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굴속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이란 바로 그 구멍만큼 밖에 되지 않습니다.그렇다면 하늘이 그렇게 작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자기 아는 것이 전부라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하나 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고 할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사도바울은 하나 됨의 비결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너희들이 다투기 전에 내 처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버지 앞에서 형제간에 싸움을 못합니다.
옛날 에서도 야곱이 미었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죽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영적 아버지이니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는데, 빌립보 교인들이 서로 싸워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헐뜯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기쁨도 크다는 것을 생각한다며 , 우리가 어찌 싸우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싸울 수 없고, 십자가 앞에서 서로 시비할 수 없습니다.
이상 4가지로 사도바울은 하나 되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 되려면,
첫째가 자기 자랑을 버리고,
둘째는 자기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 되지 못함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좋은 점을 칭찬하며,
셋째로 자기 집착을 버리고,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넷째는 영적 아버지인 하나님과 스승인 바울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가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하나 됨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