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1:12-14 ㅣ 김남수 목사]
본 편지의 서론을 마치고, 드디어 본 서신의 본론에 들어갑니다.
본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와 선물에 대한 감사 외에 바울이 감옥에 투옥에 대한 빌립보 교인들의 염려에 대한 해명과 빌립보교회에 있었던 분열, 기타 문제에 대한 교훈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빌 1:12-14절은 바울 사도의 매임과 복음전파의 진보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 개인의 일을 거론합니다.그것은 그대로 복음의 일이요, 교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투옥에 대한 변명을 합니다.
당시 믿음이 약한 초신자들은 이 일을 오해하며, 나아가서 우려와 불안을 느꼈으므로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역경을 통해 진보하는 복음의 신비로운 능력을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교인들은 근심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제 그가 갇히므로 복음의 사역이 중단되리라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하나님 나라 사업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복음을 전하면 더 효과적으로 전도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늘나라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하늘나라의 법대로 이루어집니다.당시 빌립보교인들에게 존경받던 사도의 갇힘은 그들의 신앙에 큰 회의와 좌절을 가져다주고, 크게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복음 전하는 자를 갇히게 하시고 고난 받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권세와 능력으로 그런 불행을 해결해 주시지 않으시는가?바울은 롬 11:33절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라고 감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와 비슷한 불평들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신데, 왜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는데도 구해주시지 않는가?하나님이 왜 내 문제를 다 해결해 주어서 예수를 더 잘 믿게 해 주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세상의 생각이 같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미련하게 보이는 것들이 이 세상의 지혜롭게 보이는 것들보다 더 귀하고, 이 세상의 온갖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더 큽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상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하는 자들에게 바울의 옥에 갇힘은 하나님의 손해요, 어리석음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했던 바울은 자신의 갇힘이 오히려 복음의 전파에 진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당한 일’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나의 당한 일’이란 곧 바울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옥살이 하는 것, 억울하게 보이는 이 고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빌립보교인들도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당한 일 ‘고난의 의미’를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당한 일’이란, 현재 감옥에 있는 것뿐 아니라 감옥까지 오게 된 경로에서 되어진 모든 일을 다 종합해서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몸으로 살기 원했습니다.그래야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광장에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종 편지 속에 전도의 문이 크게 열리기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감옥에 들어가는 일만은 면해보려고, 인간적인 수단도 다 써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서 감옥에 2년 갇혀 있으려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감옥에서 나오기는 해야겠는데, 나오려고 하니 또 밖에는 삭발을 하고 그를 죽이겠다고 맹세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올 수도 없고, 그대로 있자니 아까운 세월만 흐르고 …….할 수 없이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내가 로마 시민권이 있으니, 가이사에게 가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다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이사랴 감옥에서 나와야 하겠기에 로마에 상소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사도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묶인 채 로마로 호송됩니다.
그러면 로마로 가는 길은 평탄했습니까?
사도행전 강해 때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이 탄 배는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 그 정도라면 이 배는 상당한 규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300명이 타고, 거기다가 밀을 포함한 짐까지 실었다고 하니 바울을 태운 배는 당시 수준으로 볼 때 굉장히 큰 배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큰 배를 타고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갑니다.
그 배에는 죄수들을 총관장하는 로마의 백부장, 선주, 그리고 선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3사람의 인도 아래 로마로 향합니다.
그런데 미항이라는 곳에 머물렀다가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계속 항해하는 중에 그만 큰 광풍을 만납니다.
배가 파선되려 하자 군인들도 죄수들도 모두 짐을 다 버리고 가까운 섬으로 헤엄쳐 가 겨우 목숨만을 건집니다.
그 섬에서 3개월 동안 겨울을 나고 고생 끝에 로망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아마도 2, 3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이러한 형편이고 보니 사도바울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벌써 전도 못한지가 몇 년입니까? 예루살렘에서 갇혀서 고생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2년이 지나갔습니다.
배가 파선됨으로 해서 섬에서 고생했습니다.또 이곳 로마에서 2,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5년 동안 전도를 못한 셈이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째서 길을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일까 답답했을 것입니다.
언제 감옥 문이 열릴는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는지, 아무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흘러갑니다.
이러한 마당에 무슨 희망이나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깊이 생각했습니다.문은 닫히고 부자유합니다.
내 뜻대로 안된지가 벌써 5년이 넘었습니다.안타까웠지만 이제 바울은 엄청난 말을 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진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코페(προκοπῄ)인데,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울 때에 나무가 빽빽한 밀림지대를 지나게 되면 길을 만들기 위해 벌목을 하게 됩니다.
나무를 베어내고 찍어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을 진보라고 합니다.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진보‘란 결국 복음이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방해되는 장애물 전부를 제거하고 전진한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감옥생활이라는 것은 선교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서는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전하지 못하고 끝날 것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이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놀라운 진리를 깨닫습니다.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문을 닫는 사건아 아니요, 오히려 그 문을 활짝 여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가의 처한 환난 속에서 이것이 복음의 진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몇 년을 지나는 동안 ‘여기에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그리고 이것을 빌립보교인들도 알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슬퍼하지 마라. 하나님의 사업에는 실패가 없다고 말합니다.
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그런데 어떻게 해서 바울이 묶인채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 안에 복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시위대”는 헬라어로 프라이토리온(πραίτῴριον)은 왕궁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왕은 3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적도 많고 그를 죽이려 하는 자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신임할 만한 사람들과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이렇게 귀족들이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데 왕 한명이 일만 명의 친위대를 두었다고 합니다.
군사만 일만 명이니 그 식구들까지 치면 얼마나 많은 숫자입니까?
어떤 왕은 16,000명까지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믿을만한 많은 군사들과 고관들을 주위에 방어진으로 둘러놓고 그 속에서 삽니다.이 귀족들을 모아 놓은 곳이 바로 시위대입니다.
이들은 모두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인데, 바울이 시위대 뜰에 갇혀 있으면서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방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도착했을 때를 상상해 봅시다.
겨우내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같은 배에 탔던 백부장, 선주, 선장의 위신은 떨어지고 바울의 위상 높아졌습니다.
276명의 죄수들은 바울을 하나님처럼 높이고 위하여 그의 말씀만을 들었습니다.
죽지 않을 테니 염려 말라 하면 안심하고, 먹으라 하면 먹는 등 그의 영적 권위에 꼼짝 없이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함께 온 백부장이 로마 황제에게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이번에 잡아 온 바울은 키는 작아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겨우내 지내고 보니까 위대한 능력과 권능의 사람입니다. 유의해서 무죄로 석방해야 할 것입니다.”아마 이렇게 추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왕 혼자서만 들은 것이 아니라, 거기 앉은 문무백관들도 다 들었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다음에 한 사람씩 바울을 감옥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로마 고관들이 바울을 찾아와 당신이 그 능력의 사람이냐고 물을 때 이것이 얼마나 좋은 전도의 기회였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능력과 지혜를 다 해서 전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들은 고관들이 가정에 가서 이야기 하고, 친구에게 전하고 ……. 이렇게 해서 시위대 속에 전파된 복음이 온 나라 전체로 퍼져나가고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고관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 네로 황제 박해 때에 네로 측근에서는 이미 그의 삼촌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그의 어머니와 딸들이 예수를 믿고 많은 고관들로 믿었습니다.그 후 불과 300년도 안되어 대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선포됩니다.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7%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고 고관들이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 나라 전체가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군대 장성, 그리고 영향력 있는 경제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 나라의 복음화도 훨씬 더 빨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 작전은 먼저 로마의 고관들로 부터 시작됐다는 그 깊은 의미를 깨달았다면 말입니다.
14절에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의 매임으로 인한 복음 전파가 시위대뿐만 아니라, 이제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죄수로서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 그는 즉시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행 28:24).
믿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교회를 로마에 세웠습니다.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으로써 신자가 된 무리와 유대인들로 된 무리 사이에 그리스도인들 간의 밀접한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한 형제들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 로마를 떠나지 않은 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가 “매임”을 당한 그의 사도의 마음속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 온 결과로 형제 중 다수가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용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에 의해서 생명력 있게 유지됩니다.
감옥 안에서는 바울이 시위대 안의 모든 고관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감옥 밖에서는 바울을 보며 감동 받은 빌립보교인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의 당한 일’-내가 당하는 고난과 실패, 내가 당한 질병, 여기에 하나님의 전도 전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보’-닫힌 문 같으나 열리고, 끝난 것 같으나 시작하는 일요,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내가 당한 사건 속에서 지금 이루어짐을 알고, 의미를 알아 거룩한 뜻에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