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1:9-11 ㅣ 김남수 목사]
빌립보서 1장 1-11절은 빌립보서의 서론으로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인사와 감사와 기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와 기도는 서로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둘을 묶어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3-8절까지는 감사의 말씀이고, 9-11절은 바울이 기도드린 내용의 말씀입니다.지난주에 말씀 드린 감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아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바울은 참으로 기쁨에 찬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본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서 이 서신을 쓰고 있지만 시쁨이 충만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 항상 활동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에게 항상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된 교제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를 그들의 행위로 보여주었으며, 지금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으나,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하는 일에 바울과 협력하였습니다.이처럼 귀한 일에 그들이 참여함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 모두를 사모했습니다.그리고 이제 9-11절까지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내용입니다.사도바울의 서신을 보면 가끔 기도를 쓰고 있는데,에베소서는 3번이나 기도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의도가 무엇일까요?이것은 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남편이 군대나 외국에 나가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아내에게 편지를 할 때,
여보! 집에 가고 싶어서 밤에 잠을 못 이룬다오,이런 말 보다는 나와 당신과 애들과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드리고 있소. 라고 쓴다면, 집에 있는 온 식구가 걱정이 안 되고 마음이 편안해 질것입니다.기도가 바로 사랑의 고백입니다.그러므로 바울은 가장 큰 사랑의 고백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 바울은 자기기도 내용을 왜 빌립보 교인들에게 모두 다 말했을까요?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도 바울 자신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가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입시 철에 입시생 본인은 상대를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아버지는 또 의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합시다.
세 사람이 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방팔방으로 산만하게 기도하면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로 모아서 집중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우면 ‘주여 뜻대로 하소서’ 해야지.
각자 따로 따로 가도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나의 기도제목이 이러이러하니 너희도 이렇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쪽 기도가 하나로 합쳐져야 참 기도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는 “나는 네가 이렇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 이하에서 빌립보 교인을 향한 기도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내용을 간추려 보면,첫째는 사랑에 대하여,둘째는 분별력에 대하여,셋째는 진실에 대하여,넷째는 의의 열매에 대하여,마지막으로 다섯째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바울의 소원은 모든 면이 합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사도의 모범적인 기도를 따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기도내용을 순서대로 오늘 아침에 살펴봅시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게 가득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9절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많은 지식과, 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총명도 점점 더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점점 더 커지고 넓어지고, 질적으로 점점 더 깊어지고, 그리고 사랑이 말만이 아니라 행동화되고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계명이 이웃을 사랑 하라 이므로, 우리의 기도제목이 ‘내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해 주시옵소서’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자라, 사랑이 풍성해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지식은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έπίγνωσις)인데 좀 더 총명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특수한 단어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 신앙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처럼 신령한 지식 안에서 사랑이 점점 더 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신앙적인 인격과 신앙적인 사랑은 갈수록 더 사랑하고 더 존경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을 때 사랑하던 것을 신앙을 가지고 보니 후회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사랑하다가 기도하면서 뉘우칩니다.진정한 사랑이 이런 것입니까?
아니지요 기도하면서 만난 사랑, 기도하면서 깊어지는 사랑, 신령한 지식과 총명이 합쳐져 가지는 사랑, 그 사랑만이 진정한 것입니다.
의에서 떠난 사랑, 술집에서 만난 사랑 - 이런 것들은 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영적인 지식과 함께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음, 총명은 헬라어로 아이스대시스(ἀίσθησις)라는 말은 지각을 뜻합니다.
영적인 통찰력과 영적인 지각력이 있어야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사랑은 몽롱할 때 사랑하고, 정신 차리면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지각과 함께, 점점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을 위해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은 사랑이 성장과 함께 사랑의 관계성 문제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라는 기도가 아니라,‘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이런 기도를 합니다.
나는 부동자세로 가만히 서 있으면서,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 주시고, 내게 친절하게 해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기도는 우리의 사랑이 풍성해져서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예봄교회 교우들도 이와 같은 기도를 해 봅시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신령한 지식과 함께 영적인 통찰력을 주셔서 내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 사람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원수까지 사랑하게 해 주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둘째,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10절에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이 말씀은 앞 절의 지식과 총명을 겸한 풍성한 사랑의 목적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헬라어로 도키마제인(δοκιμἄζειν)인데 시험(test)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폐가 위조지폐인가 아닌가를 시험해 볼 때 쓰는 단어입니다.
또 이 제물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제사장이 시험해 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요즈음은 참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전부 혼미해져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무엇이 선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장 말을 들어야 하는지, 사원 말을 들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우리는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든 ‘이것이 틀림없다 이것을 위해 목숨을 버려도 좋다’ 하는 선을 우리가 분간할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우리는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본 절의 요지는 사랑이 풍성해져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높은 수준으로 사랑할 때,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식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식은 사랑 가운데서 얻어집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미워하면 그 지식이 사라집니다.
미워하면 점점 더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올바로 알려고 한다면, 먼저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지만, 미워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도 모르고 나도 모릅니다.사랑만이 참 지식의 근원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열릴 때, 상대방도 세상도 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은 것입니다.사랑하면 총명이 생기지만, 미워하고 증오하는 동안은 마음도 몸도 뒤틀리고 어두워집니다.
총명이 흐려지고, 판단력이 없어지고, 무엇이 선인지 악이지 모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극히 선한 것을 아는 분별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점점 풍성해져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 - 이것이 사도바울의 기도입니다.
셋째, 진실을 위한 기도입니다.
10절 하반 절에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벌써 경주 장에 들어선 것과같습니다.
그 경주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계속됩니다.
우리는 결승점에 도착할 때까지 무엇보다 첫째로 진실해야 하고, 둘째로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
첫째 “진실하다”는 말은 혼합되어 섞이지 않는다는 말이고, 따라서 도덕적 순결함, 진실함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순결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란 지위와 명예가 높아질수록 진실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예로 들어볼까요?
집이나 학교에서나 늘 ‘잘 한다 잘 한다’ 소리만 듣고, 기대를 모으며 자란 아이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숨기려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선생님과, 급우들이 실망할 것을 생각하며 도저히 ‘제 잘못입니다’하고 나서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아이는 굳이 거짓말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잘못했으면 잘못 했다고 사실대로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도 ‘나는 원래 그런 아이이고, 또 모두 그런 줄 알고 있으니까 …….’ 하는 배짱 비슷한 심리도 있겠지요.
솔로몬 왕은 이 딜레마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혜의 왕 솔로몬은 기도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가 거짓말하지 않게 해주세요, 남은 시간만이라도 거짓말을 멀리하고 깨끗하게 살아가게 해주세요.”
나이 많아 세상 떠날 날이 가까이 온 솔로몬이 이처럼 종말론적인 소원을 빌고 있습니다.
둘째로 “허물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넘어지지 않고, 즉 길에서 어떤 장애물에 걸려 상처를 입고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인생의 경주 장에 장애물은 항상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의 장애물, 두려움과 공포의 장애물, 자기 자신이라는 이기심과 만족의 장애물, 이 모든 것들이 천성 문을 향하여 여행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방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응답으로 그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시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잊을 만큼 슬픔으로 가득 차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여러분 속에 계신 주님은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1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은 그리스도인이 은혜로 행하여서 얻은 선물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및 그것들로 말미암은 행위들로 이루어진 풍성한 영적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 모든 행위들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 하나는 영혼을 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이런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맺어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 받은 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한 열매를 맺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기를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기도를 마침으로 바울은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11절 하반 절에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의의 열매를 맺는 것도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울의 기도 - 이 기도의 모범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의 기도를 따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면서, 그런 기도응답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