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1:1-2; 4:4-7, 11-13 ㅣ 김남수 목사]
금년에 주일 아침마다 빌립보서를 같이 상고하겠습니다.
빌립보서가 다른 성경보다 귀하거나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어느 성경책이나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어두운 한국 사회와 정치를 보거나, 복잡다단한 생존경쟁속에서 사는 성도님들의 목회적 필요에서 볼 때, 빌립보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현대인들이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고 얻기 위해 복용하고 있는 신경안정제는 세계적으로 연간 수 톤에 이르고 있으며, 정신안정요법서 까지 나돌고 있는데, 그러한 책이 큰 인기를 얻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참 평안은 약물이나 서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본서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특히 빌립보서 4:4-7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이나, 12, 13절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등을 담고 있으므로 본서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의 최대의 행복의 비결을 배운 바울이 박해로 인하여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로마 감옥에 지금 갇혀 있는 죄수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를 상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방금 말씀드린 대로 본서는 진정한 참 행복과 평안의 비결을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본 서신에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둘째로, 본서는 이 비결을 배운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서에서 깊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의 마음을 쏟아놓는 바울의 참 모습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 번째로, 본서는 그 비결을 바울에게 가르쳐주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되시고,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본서에서 겸손한 사랑의 위대한 모습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제 빌립보 성의 역사와 이 성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이 없이 빌립보서를 탐구한다면 유익을 얻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빌립보시는 원래 크레니데스(krenides), 즉 ‘작은 성’이라는 뜻을 가진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요한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BC 350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한 후 빌립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후 BC 163년 마케도니아 지방이 로마에 점령될 때, 이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빌립보시의 종교생활은 마케도니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다신교적인 우상숭배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도시에는 유대인이 극히 적었고, 따라서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으며, 또한 유대인들에 대한 감정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행16:20,21).
자 이제, 바울이 빌립보 전도와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과정을 살펴봅시다.
주후 52년경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때의 어느 날 밤, 그는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게 됩니다.
환상 중에 바울은 한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라”(행 16:9)라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려던 전도계획을 바꾸어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 빌립보로 갑니다.
바울의 일행이 빌립보에 도착하여 전도를 시작한 날은 그리스도교가 유럽에 최초로 건너간 날이었습니다.빌립보에는 유대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회당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낯선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린 여자아이 하나를 고쳐 준 것 때문에, 애매하게 감옥에 갇혀 아무 죄도 없이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인데도 찬송을 부르고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순교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늘나라에 가게 된 것이 감사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힘 있게 찬송을 부르는 바로 그 때, 옥터가 움직이는 지진이 일어나고 기적적으로 옥문이 열립니다.
모든 사람들을 매고 있는 쇠사슬들이 다 벗어졌습니다.
옥사장이 이 기적의 사건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칼을 빼 자결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바울이 소리 질러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에 있노라” 는 이 말을 듣고 옥사장이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바울이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한 후, 옥사장이 그들을 데리고 나가 자기 집에 가서 그와 온 집안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으므로 그밤에 구원을 받고 온 집안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옥문이 열리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가 서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를 향하여 기뻐하라고 한 이 기쁨은 특별한 의미와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질이나 권세를 얻어 기뻐하는 세상적인 기쁨과는 비교도 안 되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은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기적을 배경으로 얻어진 신령한 기쁨인 것입니다,그러기에 여기서 기뻐하라고 말씀한 이 기쁨은 죄악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는 권세와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입니다.이 기쁨은 곧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느헤미야도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다”(느 8:10)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알아봅시다.
첫째,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자기들의 영적 지도자인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모아 목사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냈고, 또한 에바브로디도는 옥에 갇힌 스승에게 친히 봉사하게 됩니다(빌2:25).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다른 교회 교인들은 “또 갇히셨구나” 하며 기도만 하고 맙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추우실까? 얼마나 배고프고, 외로울까?” 하고 마음으로 부터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도와 드리자고 의논하고 위로금을 모아서 그 교회의 목사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 드립니다.
바울은 이런 인정을 퍽이나 고마워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4:18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라 했고, 15절에는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는 많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할 만한 무엇을 해 준 교회는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빌립보 교회의 따뜻한 사랑이 더욱 고마왔을 것이고, 이제 그에 대한 감사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위로금을 가지고 온 에바브로디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을 돕기 위해 로마에 온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동안 봉사하다가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그만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자기를 위로하러 온 사람이 병이 들었으니 바울의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겠습니까?
일이 잘못되어 죽기라도 한다면 빌립보교회에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낫기 위해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에바브로디도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건강을 회복하자 바울은 조금 더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를 빌립보로 곧 돌려보냅니다.
하루빨리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을 걱정에서 해방시켜 주고자 함 입니다.
이 때 써 보낸 서신이 빌립보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착하고 귀한 종이라고 칭찬하는 동시에, 기쁨으로 빌립보 교회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쓰게 된 세 번째 이유는 교회의 화목, 일치였습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여러 면에서 칭찬을 받을만하나 교회가 하나 되는데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힘 있는 귀부인들이 분쟁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었는데, “이 두 여인이 서로 서로 양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겸손히 섬김으로 화해하여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한 마음을 품으라.”
“하늘나라에 가서 생명의 기업을 같이 누리게 될 터이니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부탁했습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세가지 동기 외에도, 본서를 통한 바울의 목적은 자기의 투옥에 대한 변증이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의 감옥생활이 사도바울은 물론, 복음을 위해서도 덕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자기의 감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유익하며, 신비한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해명을 했습니다(1:21 이하).
그 외에 디모데를 파송하고 자기 자신이 방문할 계획(2:19-24)등도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1:1,2절을 봅니다.
1:1,2절은 인사말입니다.
I. 인사(1:1-2)
오늘날의 편지는 맨 먼저 인사말을 쓰고, 맨 끝에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쓴 다음, 끝을 맺는데,바울 시대의 서신은 먼저 서두에 발신자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래서 서두에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인사가 시작됩니다.
일반적으로 바울 당시의 편지의 순서는 처음에 인사와 기도가 있고, 다음에 편지의 내용이 뒤따르며마지막에 끝맺는 말, 곧 작별인사와 축복이 뒤따릅니다.바울 사도는 정확한 기독교 내용을 당시의 그 관례적인 형식에 담아서 편지를 썼습니다.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발신자는 바울과 같이 동역하고 있는 디모데입니다.
바울이 그의 이름을 먼저 쓰고 있는데, 그가 본서의 저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빌립보서에 디모데의 이름을 덧붙인 이유는 아마 공동의 저자는 아니라 해도 디모데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울과 함께 협력했으며, 그들에게 파송되도록 결정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바울의 비서로서 이 서신을 대필한 기록자일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와 디모데를 종”이라 불렀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사도라는 위엄 있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디모데와 함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로부터 이미 사도직책에 대해서 확인과 함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은 히랍어 둘로스(δοῦλοϛ)로 노예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사회의 일반적인 노예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주님이 값 주고 산 자들이므로 주님의 소유가 되었으며, 주님께 완전히 예속되었고, 주님을 위하여 끊임없이 충성하였습니다.
우리 일반 성도들도 이러한 의미에서 “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하여 순종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란
1) 그리스도의 소유란 뜻으로, 생명, 재능이 모두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2) 종은 주인에게 절대 순종합니다. 주안의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이요, 주인의 뜻이 곧 자기의 뜻입니다.
3) 그리스도의 영광도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이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사도바울이 사용하는 전문용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는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보스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를 연구하여 세계적인 유명한 신학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동시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어떤 존재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의 “그리스도 안에서”에다 밑줄을 긋고, 그 말씀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해하고 고백하며, 그 말씀을 믿으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 생명, 사랑, 능력, ……. 등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1절에서 바울은 이 편지의 수신자를 밝히고 있습니다.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성도”란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ἅγιος)인데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그 분을 모시는 거룩한 무리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 이라는 말은 “ … 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도 구별되고 목적도 구별되고, 의복도 구별되고, 운명도 구별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에 사는 “성도” 란 하나님 편으로, 그리스도 편으로 구별되는 사람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감독들과 집사들”이라고 한 것은 감독과 집사를 교회와는 별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로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받아 교회를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편지한 것입니다.
감독은 장로와 같은 직분을 말합니다.
2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이게 있을찌어다” 하는 말은 바울 서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말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인데, 곧 축복이란 뜻으로 헬라인들이 즐겨 쓰는 인사말입니다.
“평강”은 히브리어 샬롬(shalom)으로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헬라식 축복과 히브리식 축복을 동시에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헬라와 히브리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요 14:27).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이야 말로 성도가 사모해야 할 진정한 축복입니다.
“은혜”는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적극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후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평화와 질서가 있고, 악마의 세력이 있는 곳에는 분쟁과 시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나 그리스도의 빛이 없으면 어두움만 더 할 뿐입니다.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강해로 첫 시간인데 이상으로 서론과 인사말의 고찰을 마치겠습니다.
앞으로 빌립보서 강해를 통해 기쁨과 평안이 임하며 행복한 성도, 가정,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