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8:23-31 | 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 말씀이자, 동시에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전파는 사도행전의 요절인 1:8의 말씀대로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로 퍼지고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이 헬라로, 이제는 로마로 갑니다. 바울 당시는 로마를 땅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까지 가고자 소원합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로마까지 전해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 바울의 변증과 전도(행 28:23-29)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평생 그의 숙원인 로마에 왔습니다. 여기서 다시 재판 없이 무려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로마 군인인 친위대 사람들이 하나씩 교대로 바울을 지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음대로 시내에 다닐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바울에게 찾아오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아마 백부장이나 선주, 선장 등이 바울을 통한 기적과 자기들이 살아남게 된 일들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고 했겠지요. 집에 감금되어 기다리는 2년 동안의 시간을 바울은 헛되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집에서 초청해서 전도했고, 특별히 하나님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을 불러서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30년 동안이나 핍박을 당했지만, 그 유대인들을 자기 앞에 불러서 전도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핍박했지만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했고, 복음이 확실한 진리이기 때문에 도저히 그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불행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나 깨나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복음전파였습니다.
23절에“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유대인들이 바울이 정한 날짜에 맞추어 바울이 머무는 집으로 왔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하여 강론하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금년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나로 인해 예수 믿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다면 공친 거예요.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산적 신앙이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불화한 사람들이 화목하고, 나로 인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고, 나로 인해 연약한 사람이 치유되어 건강케 되는 역사가 생겨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병자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는 복음에 대한 것을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이해했어요.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아닙니다. 세상 정치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 그것을 의식했어요. ‘지금 눈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오고 있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야 되겠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또한, 두 번째로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전파되고, 주의 재림과 함께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입니다.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구약에 있는 성경적 맥락에서 설명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대로, 23절에“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사실‘율법’과‘선지’라는 말은 구약 성경의 별명, 즉 다른 이름입니다. 지금 우리의 성경은 신약, 구약으로 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의 성경은‘율법’과‘선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의 맥락에 따라,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를 우주적 메시아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수없이 복음을 전했는데, 상상해 보세요. 바울이 얼마나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종입니까?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쳤지요. 30년 동안이나 많은 핍박을 당했지요. …. 체험으로나, 지식으로나, 능력으로나, 영력으로나, 확실한 주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두 갈래로 나뉘었어요. 오늘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24절에“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믿는 사람이 많더라.”라고만 했으면 좋을 것을“믿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전도했을 때에 “그럼요, 꼭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갈게요.”라는 대답만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전도했다고 해서 다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오늘 믿고, 어떤 사람은 10년 후에 믿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영영 안 믿어요.
가끔 상담 중에 이런 얘기가 오고 갑니다. 예수 믿는 예쁜 아가씨가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신랑감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게 마땅치 않아서 목사님에게 상담을 합니다. “목사님! 믿지 않는 사람하고 결혼해도 좋을까요?” 목사님은 대답을 이렇게 합니다. “그래, 예수 믿게 할 자신이 없느냐?” “잘 꼬셔봐야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다. 다른 일은 네가 수고한대로 다 된다고 하자.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수 믿는 일 만큼은 마음대로 못한다. 예수님께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 행여나 네 남편이 하필이면 가룟 유다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불행이 어디에 있겠느냐? 정말 그렇게 될는지도 몰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믿는 일만은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을 보세요. 사도 바울, 그 위대한 종이 복음을 전했는데 전부가 믿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안 그래요. ‘믿는 자도 있고, 안 믿는 자도 있더라.’ 이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사람들이 다 믿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저 나는 내 할 일을 다 할 뿐입니다. 믿는 자도 있고, 안 믿는 자는 안 믿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열 명에게 전도했는데 그 중 아홉 사람은 믿었어요.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이 안 믿었어요. 이에 대하여 내가 계속 마음을 씁니다.
‘내가 불친절하게 대했나. 내가 무엇을 잘 못했나, 내가 설명을 제대로 못했나, 내 사랑이 부족했나,’……. 이렇게, 믿지 않고 부정적 반응을 보인 그 사람에 대해서 자꾸 신경을 쓰다 보면, 그것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려요. 전도 못하게 되요. 이것이 바로 목회자가 가지는 고민입니다. 그러니까 어는 부분까지는 우리가 할 도리를 하지만,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안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께도, 바울에게도 있었는데, 어찌 우리에게는 없겠습니까?
바울이 자기에게 와서 전도 받은 사람 가운데 안 믿는 사람에 대해서 자꾸 신경을 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감옥에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기도하고 정성을 다 했는데, 그래도 안 믿어?’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다시는 전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의욕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믿지 않는 사람, 유감스러운 사람, 부정적 반응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마음 아프고 괴로웠지만, 그는 곧 성경 안에서 이것을 소화했어요. 성경 안에서 해석해 버리고 말았어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그는 성경을 봤어요. 26절에“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그런 줄 알고, 전도하라고 합니다. 이사야 6:9이하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미 옛날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다. 귀가 어두워지고 눈이 어두워져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함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십 년, 이십 년을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안 믿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에 있는 이 말씀을 다 외우고 명상하면서 이런 것을 마음에서 지워버렸어요. 그러므로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꾸 생각하기 시작하면 담력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내가 뭐가 부족했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 끝도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성경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깨끗이 해석하고 풀이하고서 다시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28절에“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유대 사람들이 잘 안 믿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가고 있구나.’ 하고 하나님의 높은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이방인에게로 보냄을 받는구나.’라고 합니다. 한 문이 닫힌다는 것은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 핍박과 환난을 통해서「하나님의 선교전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전략」을 핍박 속에서 보았어요. 유대 사람들이 이렇게 끝까지 안 믿는 것을 보면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가고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28절에“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요,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저희는 들으리라.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합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용기 있게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II. 바울의 옥중 생활(30-31)
30절에“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구금된 상태에 있었던 바울은 행동의 제약을 받아 마음대로 다닐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방문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자유롭지 못한 죄인의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처지에 구애받지 않고 복음전파에 힘썼던 것입니다.
31절에“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은 로마에 머무는 2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으며,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이때에 바울의 신변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였고,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할 자도 없었습니다. 로마에서는 바울의 담대한 복음전파와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 점 점 더 늘어났습니다. 이 때 로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훗날「콘스탄틴 대제」를 통하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되는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길목과도 같은 로마가 복음화 됨으로써 온 세계로 복음이 학산 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세상 권세에 굴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31절을 끝으로 그 후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맨 마지막에 있는 이 31절 말씀을 보세요.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왜 누가가 그 다음의 얘기는 쓰지 않았을까요? 그 다음부터는 사도행전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을 만한 전설에 따르면 그 다음 얘기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바울이 2년 후에 석방되었다가 곧 다시 체포되어서 순교했다는 이야기가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2년 후에, 바로 네로 황제의 핍박 때에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잠깐 석방되었다가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나, 그대로 순교했다는 이야기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마는, 어쨌든 바울은 이 로마 감옥에서 순교합니다. 그런데 순교 이야기를 누가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죽었다 - 이렇게 사도행전은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아무도 그만한 자가 없었더라. - 이렇게 마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 이렇게 사도행전을 마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이요, 소망의 복음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