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8:7-15 | 김남수 목사]
행 23:11을 보면“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은 이 약속을 믿음으로 굳게 붙잡고 성령 안에서 용기 있게 살았습니다. 3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이제야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에 가기 바로 직전에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나게 되고 그 후에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7절에“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대접을 받습니다. “높은 사람”이라는 말은 첫째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보블리오는 이 섬에서 첫째가는 사람, 즉 영주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바울 일행은 이 사람의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먼저, 풍랑 속에서 저들이 겪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알았기 때문에 보블리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이다.’하는 한 가지 경건이 있었기에 저들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또, 지난 시간에도 보았듯이 바울이 독사에 물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어요. 이것을 보고 바울을 가리켜“신이다”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만큼 바울은 높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보세요. 풍랑 속에서 무사했습니다. 독사에 물려서도 무사했어요. 보블리오는‘바울이 무사하다’는 그 사실이‘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거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섬의 중요한 인물인 보블리오 부친이 열병과 이질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지금 병에 걸려서 죽을 지경이 된 것은 또 뭡니까? 그러나 이때에 바울이 필요합니다. 8절에“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그랬더니 온 마을의 환자들이 다 몰려옵니다. 당연히 그럴 것 아니겠어요? 9절에“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환자들을 데리고 왔어요. 또 바울은 그 환자들을 다 안수하여 고쳐줍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안수로 많은 사람이 고침 받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 마을의 가장 높은 사람이 저들을 대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연히 친절을 베풀게 됩니다. 여기에는 경건도 있고, 얼마간의 신앙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것은 보답이기도 합니다. 저희들의 병을 고쳐 준 것에 대한, 자기 부친의 병을 고쳐 준 것에 대한 보답인 것입니다.
막 16:17, 18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뱀을 손으로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바울은 뱀에게 물렸습니다마는 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이 있으므로 인해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심을 더욱 더 믿고,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여기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김 명순 목사님은 한 분이 보청기를 끼고도 새소리가 안 들렸는데, 훈련 받은 대로 귀에 손가락을 넣고 기도하자 귀가 열려 들리는 역사가 일어났고, 육 달수 장로님은 한 번 결석 했는데 그 교회 부인인 김 희자 목사님께 그 날 배운 내용을 집에서 교육 받고 실습을 하는데, 기적이 일어나 나면서부터 8자 걸음을 걸었으나 치유 받아 똑바로 1자 걸음으로 걷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로님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되어 건강하라고 저에게 장뇌삼을 선물했습니다. 그 외에 암병, 급성폐렴, 고관절, 척추협착증 등 여러 가지 병들이 치유되고 있으며, 이 분들이 예봄교회 성도님들과 저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 그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하십니다.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능력을 고난 속에서만 알고 깨닫습니다. 인간의 우둔함이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흥해서는 안 돼요. 그런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해요. 그런고로 감사도 없고,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세요. 고난이라고 하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또 이 사건들을 보고 나서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듣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또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좀 더 겸손하고, 온유한 가운데 밝은 마음으로 한 번 수용해 보세요. 고난이 왜 있어야 할 것 같습니까? 왜 고난이 있고, 질병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 전략입니다. 바울이 풍랑을 겪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된 바울의 위상이 높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필이면, 276명이나 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이 뱀에 물리는 것입니까? 하지만 바울이 물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됨을 증거하게 되지 않습니까?
또 왜 하필이면, 가장 높은 사람의 부친이 이때에 병에 걸리는 것입니까? 그럴 가치가 있었습니다. 자칫 부친은 죽을 뻔했습니다마는, 이 사건이 있었기에 그 한 겨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3개월 동안이나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왜 있어야 하느냐고 우리는 묻지만, 모든 일이 다 지나 간 뒤에 좀 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 고난은 있어야 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장에서는 이것을 모르고, 또 인정하지 않으려고 듭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기 있어요. 그럴 때에 그것이 왜 있느냐고 묻지 마세요.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도 묻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십니다. 신학적 용어를 밀려 말하자면 고난의 선교적 의미,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시려는 의미, 필요를 채우시려는 의미, 이것을 잊지 마세요.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신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얻으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건지고, 필요를 채워주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려 하십니다.
그래서 2000년의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의 문은 오직 두 가지 경우에만 열렸습니다. 가난과 질병입니다. 우리나라가 맨 처음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도, 그 때가 바로 병들었을 때에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고, 알렌 선교사가 고종 황제의 주치의가 됨으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때였기 때문입니다. 질병과 가난 - 이것이 복음의 문을 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이 지금 멜리데에 있을 때에 여러 가지 사건이 생깁니다. 질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이 안수로그 병을 고치고 나니까 복음의 문이 확 열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게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오늘의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인즉 사실은 바울 한 사람이 좋은 일 했는데, 나머지 275명이 다 그 덕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악인과 동행하면 욕을 얻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무릇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저들은 바울 덕에 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 한 때 라반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야곱 하나 때문에 우상 섬기는 라반의 집안에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에 경건치 못한 보디발의 아내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셉 하나를 보시고 복을 내리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죽을 사람이 안 죽고,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많은 환자가 치유 받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창 39:5절에“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그러니까 여러분, 한 가정의 온 식구가 다 온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누구하나만 똑똑히 예수 잘 믿어도 그 한 사람을 보시고 그 가정에 복을 내리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 한 사람 때문에 저들은 다 무사했고, 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후한 대접을 받으며 한 겨울을 지내고, 석 달 후에 알렉산드리아 배로 출범하여 시실리아를 거쳐 삼관 등을 경유하여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행 28:11-14).
로마로 가는 중간 기착지에서도 바울은 형제들을 만납니다. ‘형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이 벌써 바울의 소문을 듣고 있다가 찾아와서 만난 것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 14, 15절에“로마로 가니라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합니다.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15절 끝에 보면 바울은 형제들을,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담대함을 얻습니다. 그는 분명히 1년 전에 죄수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자유인입니다. 지금도 신분상으로는 여전히 죄수입니다. 내적으로는 사실 자유인이요, 선교사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겉으로는 죄수입니다마는 내용적으로는 자유인이자 당당한 선교사로 지금 로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겪은 많은 고난의 결과에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하다는 것을 바울은 압니다. 죄수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대접받고, 사도로 로마에 도착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가 받은 많은 사랑과 친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은 존경을 감사드립니다.
사도바울은 선장, 백부장, 군인, 멜리데 섬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간에 만난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적으로 높은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 고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로마에 교회가 있다는 것은 말은 들었지만, 그곳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로마 전도에 있어서 먼저 믿는 이 사람들과 함께 협력해서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어 갈 것이라는 생각에 전망이 밝아 보입니다. 그래서 또 감사드립니다. 오랜 숙원 끝에, 그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마는 계획한지 4년 만에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긴 여행에서 있었던 불안은 다 사라지고, 안도하는 마음으로 그는 로마에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특별히 모든 일이 사람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주도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사례한 다음에, 곧 바로 그는“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합니다. 다시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 다시 앞의 일을 우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 이 담력의 연유를 생각해 보십시다.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깨닫는 사람은 현재에 감사할 수 있어요. 내게 주신 은혜가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은 미래의 것을 걱정하지 않아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없이 가르쳐 줍니다. “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니라.” 과거에 너희를 애굽에서 건지신 그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걱정할 때마다 열 개의 큰 재앙과 큰 기적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어떻게 건지셨는지, 그것을 기억하라고 줄기차게 일깨워 주십니다. 그 권능의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함께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과거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십니까? 그리고 오늘 감사하고 있습니까? 잊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그 은혜가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미래의 문제는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과거에 인도하시고 공급해 주신 하나님께서 현재에 미래에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확실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입니다. 우리는 역사의식이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담대해지고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