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8:1-6 | 김남수 목사]
바울이 탄 배는 로마로 가는 도중 큰 풍랑을 만나 난파당해 멜리데 섬에 표류되어 그 섬에서 3개월을 보내게 됩니다. 이 섬에서 바울은 독사에 물렸으나 해를 면한 일과(1-6절), 이 섬의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이 고침 받는 이적이 일어나므로 바울은 복음 전도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로마전도의 전초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모두 인간의 우연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필연적 섭리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일 아침마다 사도행전을 강해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 계시기에 저들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저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순간순간 향락을 추구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신앙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결국은 바울의 말씀을 듣지 않은 그 잘못 때문에 배는 난파됩니다. 재산도 다 잃고, 소중히 여기는 가구와 배의 기구들을 다 잃어버리고, 간신히 생명만 보존하게 됩니다. 상상해 보세요. 바울이 이 배에 없었다면 배는 난파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높은 경륜이 계셨기에 저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자기들의 행위로 볼 때에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도 작은 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기회에 바울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풍랑을 겪는 가운데, 바울의 인물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마는, 하나님의 참된 권세, …. 이것을 보면서 저들은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바울에게 높은 신앙적 경외심을 가지게 됩니다. 저들의 신앙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습니다마는, 어쨌든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시고,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바울은 이미 저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먹어라”할 때에“안 먹어”했다든가, “준비해라”할 때에 “나 안 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쇠고랑을 차고 있는 가장 초라하게 보이는 이 바울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 마지막 순종이 믿음입니다. 그만큼이라도 믿음이 있었기에 저들은 이 어려운 지경에서 생명만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배도 잃었고, 세상 부귀도 잃었습니다. 의지도 꺾였습니다. 이렇듯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이르러 조난자로서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여기서 큰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저들이 지금까지는 백부장이 제일이요, 선주가 제일인 줄 알았습니다. 선장과 군인들의 지시를 받으면서 그들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다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씀 앞에 꼼짝 못하고 순종합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먹으라면 먹었습니다. 헤엄치라 하면 헤엄칠 줄 알 건 모르건, 그 말씀에 저들은 순종하여 바다에 뛰어듭니다.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 순간에 바울이 그 어떤 말을 한들 누가 안 믿겠습니까?
전에 제가 강원도 황지 예수원에서 수련을 받고 있었을 때에 양들을 키운 경험이 있습니다. 양은 목자의 뒤를 졸졸졸 따라와요. 목자는 양들이 힘들어 할까봐, 언덕을 바로 올라가지 않고 비스듬히 올라갑니다. 목자는 가는 길이 그대로 양들이 따라오니까, 양들이 간 언덕에 줄이 생깁니다. 저는 지금 그 때 그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교인들이 언제나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쪽으로 가도 그리 따라오고, 저 쪽으로 가도 저리 따라오고, 목자가 남긴 발자국 그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목을 멘 것도 아닌데, 한 줄로 죽 따라 옵니다. 여러분, 목사는 목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 양이, 양이 아닐 때가 있어요. 가끔 염소로 변할 때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 양은 미래가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 뻔합니다. 보세요. 지금이야말로 저들은 지금 양들이 되었어요. 모두가 이제는 바울만 쳐다봅니다.
다음 주일에 보겠습니다마는 바울 한 사람 덕분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멜리데 섬에서 대접을 받습니다. 대단치도 않는 저들을 왜 영접하겠습니까마는, 바울 덕분에 모두들 한 겨울동안 이 섬에서 지내게 됩니다. 바울 덕에 후한 대접을 받고, 후일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본문을 보세요. 2절에“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저들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비에 옷은 다 젖었어요. 또 먹을 것도 없어요. 저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 후하게 도와주지 않는 한 저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저들에게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때는 겨울이라 그 동안 지낼 집도 필요합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2절에 토인들이 후하게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토인”은 헬라어로“바바로이스”라고 합니다. 여기“바바”라고 하는 말이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헬라인들이 볼 때에 이 사람들은 야만인입니다. 벌거벗은 데다 가죽 좀 걸친 것이 전부예요.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아요. 그리고 말하는 것도 그저“바바바바 …….”로만 들려요. 한 마디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바바리안 ”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어요. 바바리안은 못 알아듣는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들, 비 문명인 비 문화인, 이런 야만인을 지칭하는 조금 욕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토인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조난당한 저들을 영접했습니다. 왜 영접했을까요? 그것은 하나의 인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좀 정령 적이고 미신적인 생각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조난자에 대한 예우 - 죽을 뻔 했으나, 살아남은 사람은 도와주어야 한다는, 즉 큰 풍랑 속에서 살아남은 특별한 운명에 대한 호의로써 저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저들은 생명을 다시 찾았습니다. 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찾은 생명에 대한 축하의 예우로써 토인들은 저들을 영접했습니다. 어렵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니, 도와주어야 한다는 인심입니다.
또 하나, 여기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아니지만, 토인들이 믿는 신에 대한 종교적 세계관이 나타납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자기들로서는 신이 살려 준 사람, 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인데, 신이 도와서 살아남았다. 이런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 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들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에, 바울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결코 기독교적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이제, 구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을 구조라 했습니다. 행27:44절에“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 되니라” 행 28:1절에도“우리가 구조된 후에” 우리는 지금 구원이 무엇인가를 이 상징적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셨을 때에“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귀신에게 붙들려 있다가 귀신이 쫓겨났고 자유함을 얻어 온전해 질 때에도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에 붙들려 있고, 사망에 붙들려 있다가 이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이라고 말씀하실 때, 원문 성경에서 헬라어로“쏘조”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구원, 이 쏘조는 병으로 부터의 자유, 귀신으로부터의 자유, 국가적인 재난으로 부터의 구원도 소조, 죄악으로 부터의 자유도 동일한 단어 쏘조 입니다. 구원, 쏘조는 이렇게 광범위 하게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조 받았다”함은 생명을 보존했다는 뜻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생명 위주의 개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저들은 오직 은혜로 살아남았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헤엄을 잘 치거나, 노를 잘 저어서 산 것도 아닙니다. 자기들의 노력이나, 선원들의 기술에 의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저들은 생명을 보존 받았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1절에“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저들은 시실 이 방향으로 오려고 했던 것이 아니에요. 미항을 떠나 헤매다 보니까,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동쪽인지 서쪽인지도 모르고 정처 없이 흘러 왔습니다. 저들은 정말 자기들의 길을 몰랐어요. 그 뿐 아니라, 미지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저들이 이 섬으로 오려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이렇게 저렇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구조, 구원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물리적이 구원만이 아니라, 마음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심령의 구원도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보세요. 저들은 그 많은 고집, 그 많은 욕심, 이제 다 버렸습니다. 아주 빈 마음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제 바울의 말씀만 조용히 듣는 사람들로 구원을 받았어요.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구원 받은 모습입니다. 저들의 심령 상태로는 정말로 구원에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저들이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 물리적인 현상은 영적으로서의 구원을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교훈이 됩니다. 아마도 저들의 마음속에는 경건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제 부터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바울을 통해서 들은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할, 그런 각오가 있는 경건이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본문 2절을 보세요.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참 고마운 일입니다. 추워서 벌벌 떠는 저들을 위해 토인들이 모닥불을 피워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절에“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 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불을 피우려고 모아 두었던 나무 더미 속에 뱀이 들어 있다가 불에 뜨거우니 뱀이 사도 바울을 물었습니다. 지금 바울의 손에 뱀이 달려있습니다. 이것을 본 토인들이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용케 살아남지만 공의가 용납하지 않는구나. 공의의 신이 바울을 살지 못하게 한다.”
4절에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이렇게 생각한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토인들은 뱀을 공의의 신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옛날 아프리카의 북부 리비아 해안에 아주 흉악무도한 해적들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큰 폭풍을 만나서 배가 파손되어 이들이 멜리데 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간신히 헤엄쳐서 살았다고 하고 쉬고 있는데, 이상한 뱀이 나타나 가지고 이들을 다 물어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다에서는 배가 파선되어도 살아남았지만, 공의의 신이 뱀으로 나타나서 이들을 물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해적은 죽어야 하니까 죽었다고 토인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설이 전해지고 있었기에 이를 보고 이 사람들은‘아이쿠 이 사람은 살인자다. 천하에 악한 사람이고, 살아남았는데도 결국은 죽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어요. 바울이 뱀을 털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일단은 뱀이 물렀으니까 독이 들어있을 것이 아닙니까? 토인들은 바울이 퉁퉁 붙거나, 독이 올라 눈이 빨개지고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잔뜩 기다렸는데도 웬걸 안 죽습니다. 안 죽으니까 토인들의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6절에“그가 붙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살인자가 신으로 뒤바뀌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토인들은 바울을 향해서 신이라고 말합니다. 왜요? 분명히 뱀이 물렀는데도 무사하니까요? 여러분, 조금 더 영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 걱정하고 두려워 떨 것 같은데, 걱정 안 해요. 죽을 지경인데도 아주 평안하고 여전해요.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요, 신앙의 위력입니다. ‘이상이 없음을 보고 모두가 놀라더라.’ 여러분, 위기 속에서도 마음은 고요하고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레슬레이는“이것이 경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경건을 생각해 보세요. 사실 요즈음 세상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많아요. 최 순실 사건, 매일 신문에 대문짝처럼 보도되고 정치적으로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하고 온 나라가 시끄럽고 흔들려요. 우리는 찬송가대로 늘 증인되어야 합니다. 매일 증인이 무엇입니까? 남 놀라는 대로 놀라고, 남 떠드는 대로 떠들고, 남 욕심 부리는 대로 욕심 부리고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신앙을 운운하겠습니까? 그런고로 위기, 역경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바울을 가리켜“신이라 하더라.” 합니다. 행 14장에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사도 바울이 벌떡 일으켰을 때에 루스드라 사람들이 11절에“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 드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바울이 곤욕을 치렀지만, 적어도 이만큼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지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위상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본문을 보세요. 뱀이 분명히 바울을 물었습니다. 저들의 상식으로는 독이 퍼져서 바울이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무사해요. 이것을 보고 저들은 깜짝 놀라고, 사도 바울을 우러러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야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상, 귀신, 등 물건들을 불에 다 태우고도 거뜬하고 무사해야, 비로소 사람들이‘무사할 수 없는데 저렇게 무사하다니, 과연 예수가 세구나’하지요. 이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Power Encounter-힘의 대결이라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쪽이 영의 힘이 더 세냐? 입니다. 그 대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거나, 죽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빨리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강하고 담대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상위(上位)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귀신을 배신하면 무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귀신 섬기는 물건들을 다 불태워 버리고도 우리가 거뜬해야 합니다.
자, 뱀에 물린 사건도 알고 보면, 사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물리는 것도 은혜예요. 물리고 무사한 것도 은혜입니다. 다 기적입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들려오는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다 복음 선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참으로 그 역사가 오묘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오묘하게 복음의 문이 열어지는 것을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