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7:38-44 | 김남수 목사]
바울이 탄 배에서 승원들은 14일의 절망적인 풍랑 속에서 드디어 구원을 받습니다. 이제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지만, 구원 작업의 총지휘자가 됩니다. 그는 도망치려는 사공들을 만류하고, 일동을 권해서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76명이나 되는 배의 승원 전체가 무사히 육지에 상륙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보문 21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저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 말을 듣고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난 일을 돌아보게 합니다. 저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쇠고랑을 찬 죄수의 몸이지만, 그는 분명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믿음 없는 저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아 볼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레데를 떠날 당시는 세력 있는 사람, 즉 백부장, 선장, 선주, 선원들이 하는 말을 따르고 바울의 말을 묵살합니다. 결국 바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미항을 떠났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 내용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원점으로 돌아가서 지금이라도 내 말을 들으시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나기 전에는 바울의 말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로 죽을 지경이 되었어요. 보름동안이나 못 먹고, 거센 풍랑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고 보니까 바울의 말이 귀에 들어옵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이제라도 내 말을 들으시오. 내 말을 들었으면 좋을 뻔했는데, 큰 타격을 보았소, 이제라도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 함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다면, 많은 타격을 본 후에라도 아직 목숨이 살아있거든 지금이라도 원점으로 돌아와서, 처음 시점에서 자세를 바로하고, 믿음을 수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내 말을 들으시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 모두가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울이 명령을 합니다. 바울의 명령에 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첫째 명령은“먹어라”- 먹어야 산다. 14일이나 굶었으니, 먹고 기운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이 배가 깨어지면, 헤엄을 쳐 육지로 나와야 합니다. 헤엄 못 치는 사람은 널빤지라도 붙잡고 육지까지 가야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먹어라. 첫째 명령이 저들은 먹어야 했습니다.
둘째 명령은, 본문을 보니, 38절에“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밀을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밀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하려 합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짐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밀이 남아 있었어요. 바로 이것마저 저들은 다 버렸습니다. 처음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을 버렸어요. 그 아까운 장사 밑천인 짐, 가구들, 기구들, 다 버렸어요. 먹어야 사니까 식량만은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것까지도 버리라고 사도 바울은 명령합니다. “밀을 버려라”스스로 남은 식량을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간은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바로 지금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선주 선장, 그리고 물건의 주인에게 있어서 버리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도 바울의 명령 앞에 꼼짝을 못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버려라. 버려야 산다함입니다. 저들은 다 버렸습니다.
39절에“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소망의 새날이 밝자 그들은 육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어느 땅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들은 그 해안에 배를 대기로 했습니다. 소망은 그들로 하여금 활기차게 하였고 분주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같은 소망 때문에 활기차고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왜 사는지 알지 못하고 소망 없이 살다가, 한 순간에 허무한 죽음을 맞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품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0절을 보면 여러 가지가 나타납니다.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바울은 마지막으로 최선책을 세웁니다.
“닻을 끊어 버리고” 배는 어느 배든지 닻이 있습니다. 닻이 없는 배는 없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배가 바다에 정박할 때는, 뭍에 댈 때를 제외하고는 닻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닻줄을 끊어 버리고 맙니다. 정상적으로 정박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배는 배 구실을 못해요. 좌우간 닻을 끊었다는 것은 그 배는 끝입니다. 마지막입니다. 닻을 내려서 배가 안정을 취하는 것인데, 마지막 방도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본문에 “동시에 키줄을 늦추고”라고 말씀합니다. 배는 반듯이 키가 있어요. 키를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배를, 즉 뱃머리를 운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방향을 잡는데 키가 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배가 혹 어디에 걸릴까 해서, 키를 거둬 올렸던 것입니다. 이럴 때 키줄을 늦추라 함은 키가 물속에 들어가면 키가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키가 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키는 배가 갈 방향을 정합니다. 이럴 때 키줄을 늦추라 함은, 행선 준비를 함입니다.
또 하나“돛을 달고” 이를테면, 방향을 정하고 이제 바람을 맞게 하여 제대로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행선 채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닻줄을 끊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행선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갈는지, 몇 시간 걸릴는지 모릅니다. 좌우간 닻줄을 끊었으니 이제는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종착지를 향해서 그대로 돌진 할 뿐입니다. 키를 낮추고, 돛을 올리고, 바람 부는 대로 돌진할 뿐입니다. 이것이 배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마지막 찬스인 것입니다.
41절에“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그들이 소망의 돛을 달고 해안을 향하여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목적지로 향하여 가던 배는 육지에서 흘러오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 흐르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바다 양쪽에서 휩쓸러 온 모래들이 모여서 항만 앞에 불쑥 솟아 있는 모래언덕이었습니다. 바로 이 모래언덕에 배가 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해안까지는 거리가 먼데, 파도는 사정없이 배를 때리며 배의 뒷골인 고물을 깨뜨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가지 시련만 당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어려움이 해결되면, 또 다른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42절에“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지금 군사들이 가진 의무가 있는데, 저들은 그 의무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백부장이 주동해서 이 모든 죄수들을 풀어 주라고 한 것입니다. 죄수들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이대로 놓아두었다가는 물에 빠지면 꼼짝없이 죽어버려요. 그러면 큰일이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헤엄치지만, 저들은 헤엄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죄수들을 풀어줘야겠는데, 그들이 도망가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참 큰일입니다. 옛날에는 간수나 군사가 죄수를 노예로 부리다가 한 사람이라도 도망갔다 하면 책임을 그들에게 묻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도망가면 그 대신 군인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당시에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만일에 죄수를 놓치게 될 성 싶으면 차라리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기가 무사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도 배가 파손될 지경에 이르니까 죄수들의 쇠사슬을 풀어줘야겠는데, 풀어 놓으면 도망갈 것이고, 도망가면 자기들이 책임져야 하니까 군사들이 죄수들을 죽이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43절에“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백부장은 그 동안의 일련의 사건들을 죽 보며, 감동된 바 크고, 마음속에 깨달은 바가 큽니다. 그래서 바울을 살리기 위하여 죄수 전부를 풀어 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군사로서 자기의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법에 의해서도 아니고, 자기가 평생 지녀온 군사지식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한 마디로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용단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들은 배가 깨질 때에 전부 헤엄쳐 나가고,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은 널빤지를 타고서라도 육지로 올라와 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44절에“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의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 되니라.”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이 먼저 떠나고 난 후에도, 배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엄칠 줄도 모르고, 또한 육지까지 타고 갈 거룻배도 없었으므로 물에 뜨는 널조각 등, 물건들을 의지하여 육지로 헤엄쳐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배에 있던 276명 전원이 무사히 육지에 상륙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항상 순풍에 돛단배가 순조롭게 항해하는 것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여러 고비가 있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 위해서는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여 말씀이 불타오르면 인생의 거센 풍랑이 불어와도 결코 요동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볼 때 어리석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 큰 풍랑을 당했을 때나, 이런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 같은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이 어떻게 되느냐, 장차 어떻게 되느냐는 고사하고 우선 선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를 당했으면 내 신의를 점검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위기를 당할 때마다 믿음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선을 생각하고, 믿음을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 배가 깨지는 순간입니다. 이 시간에 백부장은 생각했습니다. ‘바울을 살려야겠다. 그래서 죄수들을 다 놓아 주라고 명령합니다. 드디어 배는 파손됩니다. 그리고 22절의 예언의 말씀대로 생명들은 무사하고, 오직 배만 손상된 것입니다. 모두가 헤엄쳐서 살아남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애당초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파국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늦게라도, 죽을 지경이 된 시간에라도 이 마지막 기회에 바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저들은 바울의 명령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먹으라, 할 때에 순종했습니다. 결국 저들은 이 순종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더욱 더 순종을 가능케 한 것은 풍랑의 고난이었습니다.국 저들은 죄수 중 한 사람인 바울의 말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잘 듣고서야 구원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