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7:27-37 | 김남수 목사]
지난주까지 드렸던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면 미항을 떠나 항해하면 죽는다는 바울의 말을 물리치고, 미항의 안전한 곳을 떠나 베닉스 항에 가서 겨울을 나자하면서 모험을 해서라도 향락의 도시인 베닉스 항을 향하여 떠납니다. 그러나 결국 저들은 베닉스로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많은 고생을 합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애도 써보았지마는 다 부질없었습니다. 배에 있는 기구나 가구, 짐까지 바다에 다 버렸습니다. 생명만이라도 건져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인간의 모든 기술, 능력 다 포기합니다. 배는 바람 부는 대로 쫓겨 갈 뿐입니다. 이렇게 가다가 어떤 모래톱에 부딪치거나, 혹은 그대로 육지에 다다른다면 배는 여지없이 깨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공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았습니다(27절). 그래서 26절에 사공들은 바다 깊이를 재기 시작합니다. 재보니까 깊이가 점점 얕아집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사공들은 배가 깨지기 전에 먼저 우리부터 살아야겠다, 해서 몰래 거루를 내려가지고 도망가려 합니다. 그러데 천신만고 끝에 14일 간의 절망적인 풍랑 속에서 그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하잘것없는 한낱 죄수이지만, 구원 작업의 총지휘자가 됩니다. 그는 도망치는 사공들을 만류하라고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권하여 막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276명이나 되는 배의 승원 전체는 무사히 육지에 상륙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29, 30절에“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본문에 우리가 잘 쓰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는 단어가 3개 있어요. 거루와 고물과 이물입니다. “거루”는 배에 싣고 다니는 조그마한 배, 즉 풍랑이 있을 때 내려놓는 조그마한 구명선입니다. 그리고 “고물”은 배 뒤쪽 돛대 바로 뒤쪽에 좀 평평한 데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물에 베게하고 누우셨다는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물”이라는 것은 배 앞쪽, 뱃머리 쪽에 삼각형으로 되어있는 좀 평평한 곳이 이물입니다.
그런데 배 뒷전에 닻 4개를 두고 기다리다가 날이 밝을 때에 이물 쪽에서 닻을 내리는 것처럼 하면서 사공들이 도망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육지에 가까운 줄도 모르고, 육지에 이르면 부딪치기 때문에 배가 깨진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오직 지금 사공들만 압니다. 경험이 있는 사공들이니까요 그런데 바울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남지도 못 한다. 붙들어라. 쇠사슬에 묶여 있는 바울이 명령을 합니다. “사공들을 붙들어라, 이 사람들을 놓아 보내면 우리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거룻줄을 잘라 버립니다. 이 작은 배들을 떠내려 보내고 맙니다. 우리는 공동 운명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이렇게 바울은 저들을 한 배에 전부 모여 앉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31절을 보세요.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살아남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34절을 보세요.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구원받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함입니다. 이 사공을 놓아 보내면 안 된다.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먹어라. 먹어서 기운을 차려라.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에 식사할 때는 바울이 꼭 성만찬 예식을 하는 것 같습니다.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즉 감사기도를 드리고 식사 합니다. 바울 네가 뭔데 우리더러 먹으러 말 하냐? 그렇게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야말로 바울은 이 시간에 엄청난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276명이 모두 그에게 순종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22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심하세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 무사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풍랑도 있고, 배도 깨지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있으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하나님의 권능으로 모두가 무사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들이 미항을 떠난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276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모두 무사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자신 있게 저들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교적 섭리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야하고, 그러므로 바울이 탄 배는 무사해야 합니다.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저들이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75명 전부가 전도자가 되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살아야 합니다. 다 무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34절에 확실하게 약속합니다.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그런데 왜 또 다시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따릅니까? “이 사공들이 있어야 구원이 있겠다. 먹어야 구원받겠다.” 왜 이런 말씀이 뒤따르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이 두 가지가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첫째는 이 사공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능력은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들도 있어요.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사공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공들에게는 바다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풍랑에 대한 지식도 있습니다. 또한 기술도 있어요. 이 사람들에게는 경험도 있어요. 배가 풍랑에 파손된 경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경험과 지식이 있는 사공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이면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나님의 능력, 그 제한적 능력 속에서 저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둘째는 음식을 먹어라.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은 능력이 많은데, 음식은 무슨 음식, 그것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안 그래요. 먹어라. 먹어야 구원 받는다. 왜냐하면 육지가 앞에 바라보이면 어떻게든 거기까지 헤엄쳐 가야 하는데, 헤엄 칠 수 있는 사람은 헤엄쳐서, 헤엄 못 치는 사람들은 헤엄치는 사람들을 붙들고 허우적거리면서라도 가야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기력을 차려야 될 것 아닙니까? 14일간이나 굶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기력을 차려야 이제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칠 때를 생각해 보세요. 12살 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딸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모두가 깜짝 놀라는 순간에 예수께서는“먹을 것을 주라”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예수 몫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일어난 후에는“먹을 것을 주라.” 하셨어요. 오래 앓는 동안에 허약해졌으니까요. “먹을 것을 주라” 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 부분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힘을 돋을 수 있거든요. 만일에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또 죽을 거예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인간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또 한 예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그의 무덤을 찾아 가셨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돌을 옮겨 놓으라.”하셨어요. 무덤을 막은 돌은 무척 커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야 움직여요. 사람들이 끙끙대면서 옮겨 놓습니다. 그 때 옆에서 마르다가 한 마디 합니다. “벌써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 역시 보나마나 입니다. 이미 다 끝난 일이에요. 아마 이 말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돌을 옮겨 놓았어요. 예수님께서는“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소리치는데, 보세요. 나사로가 걸어 나오지 않았습니까? 또 그 다음에 보니, 나사로 몸을 쌓던 천을“풀어 놓으라”하셔요. 왜 예수님께서 고치실 때 멋있게 다 완벽하게 하시지 않고, 돌을 옮겨놓는 것도 우리에게 하라하시고, 천을 풀어 놓는 것도 우리에게 하라 하셨어요. “나사로야 나오라”이것만 예수님께서 하셨어요. 여기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분야가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잊지 마세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건강을 주실 때는 우리의 절제를 통해서 주십니다. 절제하지 않고 되는대로 먹고, 되는 대로 방탕하면서 “하나님이여 건강을 주세요.”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러한 기도는 잘못됐거니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식도 있습니다. 가르침 받은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에 유익하다. 이것은 건강에 해롭다. 예를 들면 설탕은 아주 해롭습니다. 독이에요. 꿀은 몸에 좋습니다. 그래서 유익한 것을 따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지식을 주시고,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를 건강케 해 주십니다.
간증) 제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기도원에서 1년여 동안 회개하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1월에 추운 겨울인데도 오후 1~2시에는 옷을 따뜻하게 입고 매일 4-50분씩 걷기운동을 하고 체조를 했습니다. 중풍이 후유증도 없이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긍휼을 베푸셨고, 저도 마비가 풀리도록 계속 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중풍이 치유되었습니다.
“주여 고쳐 주세요.”하지만 마세요.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세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무슨 방법을 통해서든 일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 보고 하라는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시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좌우간 게으르고 는 건강할 수가 없어요.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 없이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은 있어요.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살 것이다.” 안심하라. 틀림없이 머리털 하나라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 사공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먹어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저 사공들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기에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저 땅을 네게 준다.” 젖고 꿀이 흐르는 땅을 준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라. 모든 법을 지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앞에 있고, 확실한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능력대로 별도로 나타난 일도 있지만, 혹은 대 자연을 움직이고, 천지 개벽적인 것도 있지만, 때로는 평범하게, 순리성 기적을 통해서, 혹은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병자를 고치셨는데, 혹은 환자의 집에 찾아가셔서 고쳐 주시기도 하고, 혹은 멀리 집에 있는데 병자를 고쳐 주신 일도 있습니다. 또 주님과 만나는 병자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 사공들이 필요하다. 저들의 경험 지식이 필요하다. 또 먹어라 기운을 차려라.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큰 소리로 명령합니다. 그 많은 고난 속에서,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다 무효로 돌아가는 바로 그 절박한 시간, 그 위기에 있어서도 바로 주의 종만이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사하는 사람만이 강하게,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명령합니다. 그리고 모두는 그 영적 권세 앞에 온전히 순종하게 됩니다. 떡을 들고 축사할 때에 누구하나 감히 고개를 젓는다든가 거부하는 사람이 없어요. 받아먹으라, 할 때에 안 먹는 사람이 없어요.
영적 권세-이런 위기의 때만이 아니라, 죽을 때만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항상 주의 종이 지닌 영적 권세를 높이 인정하고 사는 데에 생명의 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저 “목사님, 목사님”찾아요. 평상시 일이 잘 될 때는 기도해달라고 찾지 않아요.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풍랑 속에 쇠사슬에 묶인 채 서서 명령할 때에 모두가 순종하는 그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바울의 말씀에 순종해야 삽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있어요. 그러나 순종할 때에만 그 약속이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