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6:19-32 | 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의 24절에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회심 간증을 통한 변명을 듣고“네가 미쳤다”고 하니까? 바울이 내가 25절에“미친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미쳤느냐 안 미쳤느냐 어째서 미쳤다고 하는 말까지 듣게 되었는지 우리는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마지막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자기 회심 후의 활동상을 말한 내용입니다. 이 귀중한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을 면하고 무죄임을 증명해서 석방되어 보려는 자기 구제의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기회가 주어지면 내 명예에 내 소유에 나 자신에게 이롭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일반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생명이 바로 경각에 달려있는 중대한 시간이지만 자기 구제를 위한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이 소중한 한 시간의 기회를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점이 참 위대합니다. 나야 살든 말든 잘되든 못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려 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려 하는 간절한 충정이 마지막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재판하는 이 중요한 시간에 그는 다시 담대하고 분명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함이나 억울하다거나 분하다거나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고 자기가 만난 사건과‘내가 어째서 이렇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가 내가 전하고 있는 복음은 무엇인가’하는 것을 확실하게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19절에“아그립바 왕이여 그럼으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내게 계시해 주신 그것에 순종하고 있을 뿐입니다 함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자세입니까? 종교 개혁자 칼뱅은 예정론을 주장했는데, 특별히 이중예정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천당에 가는 길, 구원 받은 사람이 예정됐다고 하고 보니까 반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예정됐다 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흔히들 후대의 사람들이 이것을 이중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그 당시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예정됐다는 것이 기분 좋지만, 지옥 갈 사람들도 예정됐다는 것은 영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질문하고 아무리 설명 들어도 마음에 차지 않아요. 그러다가 칼뱅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막 숨이 넘어가려는 그에게 제자가 또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제 임종이 가까이 왔는데 그 이중예정론을 취소할 생각은 없습니까?” 칼뱅은 빙그레 웃으면서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Bible says so, - 성경이 그렇게 말씀한다, 나는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서 성경이 멎는데서 멎었노라, 이것이 나의 신학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입니다. 참 대단한 말입니다. 성경대로 순종했다. 이치에 맞고 안 맞고는 자기도 잘 알아요.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납득이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 그는“하늘로부터 보여주신 것, 하늘로부터 보이신 것을 내가 거역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이 고생을 했고, 그래서 이 많은 환란과 고통을 겪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매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얼마나 간결하고 확실한 고백입니까? 하늘로부터 보여진 것을 그대로 순종하고 이 시간에 이른 것이라고 아주 딱 잘라 말씀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이 시간,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유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또한 그는 말씀합니다. “많은 환란과 고통이 있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왔더니,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나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 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귀한 말씀이에요. “내가 오직 복음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위해서 필요하니까 아직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살아 살아남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많은 환란을 겪었지마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난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내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역사성과 성경적 증거를 간결하게 피력합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의미가 있습니다. 22절, 23절을 보면“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해 온 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속에서 온전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그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 속에서 모든 성경을 다 해석하고 다 이해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을 십자가와 부활 사건 속에서 얻습니다. 당신들이 죽이고 하나님께서 부활시킨 예수 그리스도, 이 시건 속에서 성경 속에서 수천 년 동안 예언해 온 예수에 대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복음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롬1:14절에“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다 내가 빚진 자라”하여 스스로 복음의 빚진 자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빚을 갚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나는 복음의 빚을 졌기 때문이 이 빚을 꼭 갚기 위해 이 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고전 9:16절에“…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는 예수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전합니다.’하는 뜻입니다. 바울은 정말로 몸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복음 전하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목사가 아니고 전도사가 아니더라도 직장이 어디든지 가정에서 일하든지 이웃의 누구를 만나든지 언제나 복음을 전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화) 정부에 반대하여 정치적인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무려 8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고생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독일 교회의 지도자인『마틴 리뮬러』라고 하는 목사님입니다. 이 분은“이 나라를 건지려면 히틀러가 죽어야 한다. 저 히틀러는 적그리스도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정치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8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목사님은 아주 한이 맺혔습니다. 그야말로 히틀러를 향해서“이 원수, 이 죽일 놈”하며 있는 대로 욕을 다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아무리 소리 지르면 뭐 합니까? 어쨌든 그렇게 원한을 품고 그 많은 고생을 하다가 2차 대전이 끝나면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에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히틀러는 이미 죽었습니다. 목사님은『전쟁 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모든 책임은 히틀러에 있다,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목사님은 무려 7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이렇습니다. 모두들 차례차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문득 큰 소리로 심판 받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듣자하니 누가 자기보다 먼저 죽어서 온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쩌렁쩌렁하게“너는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는고?”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인이 대답하는 말이“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목소리가 낯익더랍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그 심판 받는 사람을 봤더니,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꿈을 일곱 번이나 꾼 목사님은 마침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히틀러가 저렇게 된 것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히틀러에게 복음을 전했더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엄청난 일이 생겨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백서의 내용을 바꿉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교회가 복음을 바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행할 일을 성실하게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나에게 있다.”
여러분, 오늘도 그런 사람들 많아요. 우리는 이 복음이 온 천하에 전해진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느 집사님이“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저보고 예수 믿으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 온 아파트 맞은편에 사는 사람이 좌우간 무엇을 사 먹이고 봉사하고 별 짓 다해 가면서 교회에 꼭 한번만 가 달라고 졸라서,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따라갔다가 예수님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 진작 못 믿었나.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예수 믿으라고 안 했나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보세요. 바울은 끝까지 복음을 전했어요. 오직 복음입니다. 감옥에 있으면 감옥에 있는 대로, 핍박이 있으면 있는 대로, 재판 받을 때는 받는 대로, 어디서든지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생애의 목적을 삼고 전심전력을 다 기울인 것입니다.
24절을 봅시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로마 총독 베스도가 볼 때에는 바울이 확실히 미쳤거든요. 이 “미쳤다”라는 말은 헬라어로“마이네”라고 합니다. 그리고“미치광이”라는 말은“마이니안”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를 지금 소개하는 이유는 이 말이 “마니아(mania)”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니아”라고 하는 말은 우리는 요즈음 흔히 쓰고 있습니다. 시판되고 있는 오디오 제품에는 이를테면“롯데마니아”하며“마니아”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고 써야 합니다. 원래“마니아”라는 말이“미쳤다”는 뜻입니다. “광적”이라는 말입니다. 워낙 현대인은 무엇에 홀려 다 부분적으로 미쳐 가지고 산다 합니다. “마니아” - “미치광이”입니다. 컴퓨터 마니아라고 하면 컴퓨터 미치광이, 오디아 마니아라면 오디오에 미친 사람입니다. 원래 나쁜 뜻을 가진 이 말이 이렇듯 좋아서 미친다는 것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가 볼 때 바울은“Jesus mania”입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에요. 예수 미치광이지요. 이 말은 불명예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미쳤다는 말을 좀 들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광이 라는 말도 좀 들어야지요. 책벌레라는 말도 좀 들어봐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미친다는 말은 나쁘게만 해석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 가지만 전적으로 몰두한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바쳐요.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바치는 희생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게“미친”것입니다. 혼자서만 좋아하고 희죽희죽 웃는다면 미친 것이지요. 남이야 아랑곳없이 자기만 좋아가지고 비쳐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요새“컴퓨터 마니아”들이 많아요. 밤낮 그것만 마주하고, 딴 정신이 없어요. 밥먹으라 해도 모르고, 자라고 해도 아랑곳없어요. 이게 미친 것이거든요.
예수 미치광이 - 어떻습니까? 예수밖에 몰라요. 성경 밖에 몰라요. 그저 시도 때도 없이 교회 나가는 것 밖에 몰라요. 교회 봉사하는 것 밖에 몰라요. 남들은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요. 나만 항상 기뻐요. 항상 만족해요. 이것이“Jesus mania”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더 재미있어요.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라고 베스로가 말합니다. 너무 많은 지식이 생각을 미치게 했구나. 이 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원래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베스도는 그를 보고 예수 미치광이라고 말하지 않고,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한다고 하더니 이상하게 미쳤구나, - 이런 말입니다. 배운 바 없는 사람, 불학무식한 사람이 열심히 복음을 전할 때에는 다른 말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오로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얘기할 때에는 같은 복음을 들어도 그것을 어떤 학문의 한 분파를 전하는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베스도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한다고,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유식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무식한 사람, 고귀한 사람보다 오히려 천한 사람들을 들어서 쓰신다는 점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아그립바 왕아 또 한마디 합니다. 28절에“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에 바울은 29절에“말이 적으나 많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어쨌든 조금 마음에 설득이 되는가 봐요. 설득이 됐으면 충분히 설득당하면 됐을 것인데, 버티고 서서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설득해서 기독교인 만들려고 하는구나.” 하고 비웃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재판하고 있는데, 바울은 죄수로 앉아 가지고 오히려 재판장을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예수 믿으시오”- 굉장한 얘기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자세가 복음 전하는 자의 기본자세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확실한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나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충만해야 됩니다. 내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고, 내 마음이 확신에 차 있고, 내 신학적 지식이 분명해야 됩니다. 거기에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 만큼 확실해야 합니다. 희미한 소리, 이래서는 안 돼요. 반드시 이래야 됩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 이것이 복음 전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독설이래도 좋고, 독단이래도 좋습니다. 독단적 의견이 아니고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미쳤다고 할 만큼 양보 없는 확실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마는 어떤 부인이 본인은 여 집사인데 남편은 교회에 안 나가요. 어쩌다 한 번 구경 갈 정도인데, 영 신앙이 생기지 않는 거예요. 언젠가는 부흥회 때인데, 남편을 잘 꾀어서 데리고 갔더니 여전히 졸다가 나오는 거예요 아주 섭섭했지마는 다음 날 또 같이 갔어요. 설교를 듣고 돌아갔습니다. 세 번째도 가는데 가면서 부인이“오늘 맨 앞에 앉아서 은혜를 받읍시다. 그리고 구원 받읍시다” 했더니 그 남편, “나는 별로 은혜 받을 마음 없구만.”해요. “왜요? 은혜 받아야지요.” “당신 은혜 받았다며?” “나야 많이 받았지요.” “은혜 많이 받고도 그 모양이라면 안 받는 게 더 낫지요”- 보세요. 은혜 받으면 은혜 받은 냄새가 나야 해요. 은혜 받았다고 떠들기만 했지 집안에서 말대꾸하고, 다툴 때는 혼자 똑똑하여 한 술 더 뜨니, 이래가지고 무슨 은혜 받았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을 보세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 - 내가 먼저 만족하고, 생명을 걸 만큼 확신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이 보다 중요한 일이 없어요. 음식 먹을 때에 맛있게 먹는 사람하고 같이 먹으면 음식이 시원치 않아도 입맛이 돌아요. 앞에 앉은 사람이 시원치 않는 기분으로 앉아 있으면 입맛이 없어져요.―재미가 없어요. 언젠가 한 번 TV에서 살 빼는 강의를 하는데 뚱뚱한 사람이 강의를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너무 뚱뚱해서 돼지처럼 뚱뚱해요. 우선 강사부터 날씬해야 돼요. 아무리 그럴듯한 소리 해 봤자 그게 영 귀에 안 들어옵니다. 뚱뚱한 사람이 살 빼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당치 않아요. 자신부터 살이 빠져 날씬해 있어야 말발이 서지요.
전도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충만하고 나서“제발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같기를 바랍니다.”해야 진실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재판 끝에 아그립바 왕이 말합니다. 32절에“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 하였다 하니라” 바울이 무죄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뭐 이런 말을 해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가들의 형태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섭리가 있었습니다. 행 23:11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더러“네가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하셨습니다. 바울은 법적으로 무죄가 입증되었지만, 가이샤에게 호소하였으므로 로마로 호송하게 됩니다. 천부장과 벨릭스와 아그립바 왕에게 세 차례 심문을 통하여 무죄가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못하고 계속 구속되어 있다가 결국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 안에서 로마에 복음을 전파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